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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M Dec 26. 2020

TENET, 공존 그리고 학교

누군가의 관점에서 본 순행과 역행의 시간과 삶의 공존

*이 글은 영화에 대한 해석과 적용에 논리적 비약이 있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출처: https://t1.daumcdn.net/thumb/R720x0.fjpg/?fname=http://t1.daumcdn.net/brunch/service/user/8EUf


TENET과 공존

올해(2020년)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새 영화, TENET. 코로나19로 인해 극장가에서는 많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놀란 감독의 TENET은 극장가가 아닌 온라인을 통해서 여전히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영화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영화를 해석하는 영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스포일러를 허용하는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잠시나마 힐링하고자 TENET을 선택한 관람객들에게는 오히려 지적 피로감이 찾아올 수도 있다. 본인 역시 그러했다.


그동안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보면 인간의 삶이 마주하고 있는 양극단의 대립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배트맨 다크나이트에서는 선과 악, 인셉션에서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TENET에서는 시간의 순행과 역행 식의 구도를 그려내고 있다. 보통 대립적인 구도로 보이는 것이기에 영화에서는 마치 '대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공존'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예를 들어, 절대선과 절대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선하면서도 악한 것과 공존하고 있다. 우리 자신 역시, 어떤 면에서는 선하고, 어떤 면에서는 악하다. 우리가 상대하는 일과 사람들도 선하면서도 악하고, 악하면서도 선하다. 그래서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개념은 공존하는 것이 맞다. 대립각을 세우는 듯한 요소들의 '공존'을 2시간의 짧다면 짧은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놀란 감독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의식 속의 TENET

TENET은 시간의 순행과 역행의 공존을 다룬 영화다. 물론, 기존의 놀란 감독이 표현했던 '공존'들에 비해서 어렵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가치의 공존', '분리된 공간의 공존'은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순행된 시간과 역행된 시간의 공존에 대해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론적이고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순행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나와 역행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나의 존재, 그리고 그 둘의 만남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물론, 영화와 같이 각각의 삶의 주체들의 역동적인 결투 순간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안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나가 공존하고 있다. 미래에서 온 내가 현재의 나에게 질문하고, 논쟁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예측된 미래의 결과를 위해 현재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시하고, 과거로부터 삶을 이어온 나는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를 따져 묻기도 한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 말을 끊임없이 걸고, 현재의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현실 학교에서의 TENET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의 공존의 가능성은 영화나 의식 속에서만 가능할까? 현실 속에서 그러한 시간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복잡하다. 그래서 그러한 공존가능성을 좀처럼 사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공존은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물론, 동일인물의 시간에서만 보지 않는다면 말이다. 신체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과 노쇠해 가는 어른들의 공존. 봄에 피고, 겨울에 지는 식물, 겨울에 피고 봄에 지는 식물의 공존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순행과 역행은 공존한다. 무엇이 순행이고 역행인지는 과학적 규정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규정이기도 하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 시간의 순행한다는 것이 사회적 진보를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그 반대가 퇴보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자연계의 삶과 같이 사회적 삶 역시 변화는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출처: https://ojsfile.ohmynews.com/CRI_T_IMG/2020/0730/A0002662633_T.jpg


나에게는 학교가 그렇다. 학교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을 하나의 생태계적 관점에서 보자. 동일인물이 살아가는 순행과 역행의 시간 공존은 말할 수 없을 지라도 전체적 관점에서 요소가 기여하는 순행적 혹은 역행적 요소의 결합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즉, 학교와 교육의 개선이 시간의 순행을 따라 변화, 발전하는 듯 보이지만 어느 한편에서는 역행처럼 보이는 일들도 함께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역행하는 사건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순행의 시간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주변의 삶들을 다시 둘러보면 역행의 삶은 늘 존재했다. 최근 교육계의 삶을 둘러보면 역행처럼 보이는 것들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학교 당 교사 정원축소와 같은 것들이 사례가 될 수 있다. 국내외 미래학교 사례들이 교사의 연구시간 확보, 학급 당 학생 수 축소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졌음에도 경제적 논리에 따른 교사 정원 축소는 그동안 다양하게 실천되어 오던 교육의 개선에 역행적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강남의 모 혁신학교의 지정 철회 사건도 그러하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변화에 대응하는 교육을 기대하고 있고, 수많은 정책들이 학교와 교육의 개선을 추구하고 있다. 미래학교, 혁신학교 등의 학교혁신모델 뿐만 아니라 공간혁신, 에듀테크 등의 눈에 보이는 환경 개선사업 등도 변화를 바라는 여론의 반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혁신학교 지정 철회가 남긴 사회적 파장은 작지 않다. 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여전히 입시와 부동산 문제에 묶여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변화하는 시간과 변화에 묶여 있는 시간, 변화를 되돌리려는 시간이 공존하고 있다. 


출처: 좌.https://bit.ly/3aHD0lj, 우.https://bit.ly/37QqQoq


미래학교에서의 TENET

그동안 미래학교에서의 삶이 말 그대로 미래의 교사와 학생들의 순행하는 삶을 만들고자 했다면, 지금 우리는 역행하는 제도와 그로 인한 삶과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역행으로 보이는 삶은 단지 하나의 사건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순행하는 삶을 위한 선택의 기로에서 역행에 적응하는 삶을 선택하는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영향력이 더 무서운 것일지 모른다.


미래학교의 구성원들은 나름의 순행하는 삶을 만들어 갔으며, 그결과 지금의 우리의 학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삶이 역행이라고 생각되었을지 모른다.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문득, 문득, 너무도 자연스럽게 과거에 내가 보았던, 그리고 개선하고자 했던 모습들과 마주하게 된다. 많은 시간의 땀과 노력이 만들어 낸 삶이었으나 때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지 못한 삶을 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마치 TENET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의 나는 과거-현재-미래의 나 중 어떤 나인가? 나는 이러한 현실에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분명 다른 나이지만 수년 전에 만났던 유사한 장면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름 순행하는 삶을 기대했던 동료들에게 어떤 삶을 독려할 것인가? 역행하는 것들에 순응하라고 할 것인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인과율의 법칙이자 TENET에서 많이 등장하는 잠언이다. 미래를 어떻게 대비하고 준비할지에 대한 노력을 할지언정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종교적이던, 과학적이던 간에 인과가 작용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TENET은 미래를 바꾸려는 등장 인물들의 혈투가 아니라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해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현재를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약간의 지적 피로감이 가시고,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교육도 그러할 것이다. 현재의 학교와 교육이 어떤 삶들 간의 만남이던 간에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 일어날 일에 선악의 개념을 부여할 수는 없지만 순행하는 삶이 기대했던 희망은 그려볼 수 있다. 다만, 기대했던 순행과 기대하지 않았던(혹은 너무 익숙했던) 역행의 삶이 만날지라도 말이다. 기대했던 순행의 삶을 포기하고 너무 익숙한 역행의 삶에 안주하는 것 또한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겠으나, 그러한들 기대하지 않은 불행까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삶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어날 일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과거의 삶이 만들어 낸 현재의 삶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지만 현재의 삶이 만들어 낼 미래의 삶은 지금의 일어난 일을 대하는 삶의 몫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삶의 누적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지금의 일어난 일들은 수많은 삶이 만들어낸 일들이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순행과 역행 중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선과 악도 규정하는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꿈꾸었던 순행의 삶이 틀리지 않았음을, 역행하는 삶을 만날지언정 그러한 삶을 만나고 있는 우리네 이웃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오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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