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마라토너들은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충만히 살기 위해서 달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보스턴(Boston)은 마라톤 도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마라톤 대회일 뿐만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저 없이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마라톤 대회’라고 부르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보스턴은 1896년 시작된 근대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이듬해 1897년부터 4월 세번째 월요일을 ‘애국 기념일(Patriots' Day)' 공휴일로 정하고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날은 또한 ’마라톤 월요일(Marathon Monday)'이라고 불리며, 도시 전체가 26.2마일(42.195킬로미터) 마라톤 코스를 따라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응원하는 보스턴만의 축제를 벌이기 때문에 보스턴 마라톤을 뛴 사람이라면 그 감동은 쉽게 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한국과 인연이 깊어, 서윤복, 함기용, 이봉주가 1위를 해 한국인 우승자가 무려 3명이나 된다.
홉킨턴(Hopkinton)은 보스턴 외곽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이만 육천여 명의 마라토너가 이곳을 출발해서 42킬로미터 떨어진 보스턴 시내 보일스톤(Boylston) 거리까지 달려가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비행기를 타고 대회 전날 보스턴에 갔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보스턴 한인 성당 신자 몇 분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의 차를 타고 홉킨턴을 방문했다. 마라토너에게 사전 코스 답사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이 세계적인 마라톤 대회 준비로 분주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이십여 분 정도 마을을 달렸다. 마지막 훈련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승부는 거의 출발점에서 정해진다. 그게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다. ‘어떤 식으로 출발점에 다다르는가.’그게 전부다. 나머지는 42킬로미터의 코스를 통해 실제로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살아있는 사람 5(Living Man 5)’의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홀로 달려야 한다. 나처럼 보스턴 마라톤을 달릴 자격을 얻지 못한 지인들은 마라톤 코스 중간과 결승선에서 응원하기로 했다. 처음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직접 구경하고 응원하는 꼬마들은 신이 나 있었다.
나는 혼자였지만 혼자가 아니기 위해 달리기 셔츠를 직접 만들었다. 검은색 셔츠에 (가톨릭 사제가 공식적으로 입는 수단의) 하얀색 로만 컬러를 바느질해서 달았다. 지난 일년 동안 수많은 언덕을 뛰어 오르내렸고 꼼꼼히 코스를 연구했다. 후반부에 있을 연속되는 언덕들과 특히 20마일(32킬로미터)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심장이 터진다.’는 하트브레이크 언덕(Heartbreak Hill)'에 대한 대비도 다시 점검했다.
2009년 4월 20일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보스턴 시내로 나가 그곳에서 마라토너들을 수송하는 버스를 타고 홉킨턴으로 갔다. 버스는 러너들을 내려놓고는 짐을 챙겨 다시 시내로 갔으니 어떻게든 완주를 해야 제때 자신의 물건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늘에는 헬리콥터가 날고 여기저기 플래시가 터지고 사람을 찾는 방송은 계속 나왔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가장 앞줄에서 몸을 풀고 있을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몸을 풀고 있는 아마추어들 가운데 로만 컬러를 한 한국인 사제로 섰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마라톤이라는 도전,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무찌른 아테네의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던 전령 필립피데스(Philippides)의 정신, 근대 올림픽을 기념하는 보스턴 마라톤의 역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거대한 것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경외심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썬더버드 전투기 두 대가 러너들 위를 날며 축하비행을 마치자 누군가 말했다. “저걸 타면 결승선까지 3초도 안 걸릴 텐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10시 정각에 출발 총성이 울렸다. 마침내 제113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른 천명 단위로 되어 있는 그룹이 천천히 움직여 출발선에 다다르는 데에도 몇 분이 걸렸다. 시골 마을의 도로는 아주 좁고 가팔랐기에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하여 1마일(1.6킬로미터)을 달렸다.
봄이 막 시작되는 추운 날씨에도 길가에는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나와 큰소리로 응원을 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전통 백파이프 소리에 맞춘 밴드가 곳곳에서 음악을 연주했고, 연도에 선 아이들은 먹기 쉽게 자른 바나나와 오렌지를 나눠주었다.
마라톤 도시다웠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넘쳐나는 곳에서 나의 몸은 천천히 다가올 결전을 대비하며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