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침내: 보스턴 마라톤 대회 2

13마일(약 21킬로미터) 하프코스 지점에 다가가자 유명한 ‘비명 터널(Scream Tunnel)'이 다가오고 있음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다녔던 웰슬리(Wellesley) 사립여대 여학생들이 학교 앞에 나와서 러너들을 응원하며 지르는 함성이 마치 비명소리로 가득 찬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처럼, 수천 명 여자들의 비명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고 달리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지는 우레와 같은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한 비명소리는 놀랍게도 한 사람(정확히는 달리는 한 사람과 휠체어에 앉은 한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1591342354181.jpg?type=w1 호이트 부자(Team Hoyt) @google.com


그제서야 제113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들만큼이나 유명한 ’호이트 부자(Team Hoyt)'를 알아보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에 걸린 아들 릭(Rick)을 휠체어에 태우고 달리는 아버지 딕(Dick)이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믿기지 않겠지만 그들의 ‘천 번째’ 마라톤 대회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스턴 사람 모두가 보여준 열광적인 응원은 그들 부자의 놀랍고 감동적인 모습에 대한 성원일 뿐만 아니라 굽히지 않는 인간 정신과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했다. 나로서는 휠체어를 밀며 뛰고 있는 아버지 딕을 감탄과 존경의 마음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달리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만다. 그를 지나치면서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린 것이다.


마치 복음에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었던 마음과 더불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비명 터널에서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웬일인지 내 앞에서 달리기를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하나 둘 응원하는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달리면서 보니 여대생들이 ‘키스해 주세요!(Kiss me!)'라는 푯말을 들고 서 있었고 러너들 가운데 그런 호기를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멈춰서 볼 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기도 재미있기도 한 풍경을 보며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심장이 멎을 뻔했다. 왜냐하면 ‘뽀뽀해 드릴까요?’라고 한글로 쓴 푯말을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 달리기 복장에 로만 컬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17마일(약 27킬로미터) 지점에 이르러 뉴턴(Newton)에 들어서자 마침내 ‘연속 언덕들(Chain Hills)'이 시작되었다. 세 개의 언덕을 차례로 넘고 나서 20마일(32킬로미터) 지점에 드디어 하트브레이크 언덕이 나타났다. 이제 본격적인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비축해둔 힘을 쏟아부으며 언덕을 뛰어 올라갔다. 수없이 연습했던 언덕 오르기와 열광적인 응원 덕분에 많은 러너들을 뒤로하고 가장 높은 지점에 올랐고 고지를 점령한 이등병처럼 기뻤다.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었다. 바람처럼 신나게 달리면서 연도에 선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나를 레이스에 맡겼다.


그런데 정말 심장이 터지는 코스는 심리적 승리를 맛본 후에 찾아온 도심의 평평한 거리였다. 지루한 도시의 평지를 달리는데 저 멀리 시스코(Cisco) 사인이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이며 온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근육은 경련을 일으키고 다리는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다시 성모송을 외며 보스턴 시내의 멋진 풍경을 잊고 그저 한 발 한 발 뜀박질에 온 정신을 쏟아야 했다.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 파크(Fenway Park)를 지나 결승선이 보이는 보일스톤 거리로 들어섰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수만 명의 사람들! 그들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큰 함성을 지르며 맞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더없이 푸르른 봄하늘이었다. 나의 심장은 터질 것 같은 성취감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뿜어내고 있었다. 3시간 7분 35초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알았다. 가야할 곳이 있었다. 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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