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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어느 5학년 남학생의 고백

나는 대구 S 국민학교 5학년 7반이었다. 그 시절 나의 절친들은 반장이었던 남*수, 아버지가 사업가였던(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던) 박*왕, 우리 가운데 가장 덩치가 컸던 이*창, 그리고 재미있었던 김*웅이었다. 우리들은 대개 5학년 남자들이 그렇듯 늘 즐거웠다. 물렁공으로 학교 뒷마당에서 야구를 하거나 코카콜라 1리터 병두껑으로 골목에서 야구를 하며 보냈다. 학교 오고 가는 길이 멀었지만 항상 놀거리가 있었다. 뽑기도 하고 남의 집 초인종도 누르고 가끔은 다른 동네 아이들과 신발주머니 싸움도 하곤 했다.


*왕이 집에 놀러가면 신기한게 많았는데 서서히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친구 누나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앞에 앉아 있던 같은 반 정*숙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하얀 피부에 동그란 안경을 써 더 동그란 얼굴의 *숙은 아버지가 군 장교였다. *숙의 친구도 기억난다. 여*주, 김*혜, 서*연, 모두다 우리 패거리처럼 여자들 사이에서는 한가닥하는 아이들이었다. 


김*숙 선생님과 여자 아이들, 왜 나는 친구처럼 입지 않고 저기에 있을까?(아쉽게도 정*숙은 없다.)


곱게 손질해 반짝거리던 *숙의 머리카락을 매일 보면서 한번이라도 더 뒤를 돌아보기를 바랬지만 시험지를 뒤로 넘길 때, 샤프를 떨어트렸을 때가 아니면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어려웠다. 한번은 *숙이 자를 떨어트리고는 몰랐는데 난 그것을 주어 내 책상 서랍에 넣었다. "내 자 봤니?" "아니." 떨렸지만 거짓말을 했다. "내 자가 어디갔지?" 계속 두리번거리던 *숙의 자는 그렇게 내 것이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뒤, 반장 선거가 있었다. 당연히 내 친구 *수가 계속 반장을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숙이 반장 추천으로 출마를 했고 투표 결과 두 사람 다 똑같이 31표를 얻었다. 누가 봐도 남자 31명, 여자 31명이 각 후보에게 몰표를 준 것이 뻔했다. 교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반을 맡았던 김*숙 선생님은 당황하며 두 후보에게 다시 한번 연설의 기회를 주었다. 재투표 결과 역시 31대 31이었다. 더 당황한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성별을 떠나 정말 반을 위해 봉사할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내용의 일장 연설을 하셨다. 그러고나서 다시 투표를 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반장 선거는 5학년 남자 대 여자의 자존심 싸움이 되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여러번 우여곡절 끝에 32대 30으로 정*숙이 2학기 반장으로 당선되었다. *수를 비롯한 남자 아이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누군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35년이 더 지나 이제 말할 수 있다. 그때 정*숙에게 표를 던진 유일한 남자, 나의 절친인 *수를 배신하고 남자들의 자존심 마저도 포기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게 정*숙을 향한 내 사랑의 결단인지, 아니면 김*숙 선생님을 돕고자 했던 마음인지, 그도 아니면 남자 대 여자의 대결 구도를 깨고 싶었던 바램이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나는 5학년 남자로서 하기 어려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고 그 때문에 오랜 시간 나름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5학년 소풍 중에(오른쪽 OB 모자 쓴 *수, 그 앞에 *창, 중간에 과자를 들고 있는 *웅, 선생님 앞에 빨간 옷을 입은 *왕)


그때 도대체 왜 그랬을까? 지금에 와서 이 이야기를 왜 할까? 모르겠다. 그냥 글로 남기지 않으면 그 즐겁고 흥분된 시절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일 것 같다. 아니면 어디선가 이 글을 읽을 정*숙이나 김*숙 선생님을 위함인지도, 그것도 아니면 내 절친들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변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6학년이 되어 학년이 바뀌자 친구들과도 흩어졌다. 그런데 어느날 정*숙이 사라졌다. 아버지가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자 전학을 갔다는 말만 들었다. 그때 나는 반장에다가 전교부회장이 되었지만 별로 재미없었다. 확 타오르던 장작불에 누군가 물을 뿌려 끈 듯 뿌연 연기만 매케할 뿐이었다. 별로 기억에 남을 게 없는 6학년이 된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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