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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인생의 고비에서 정답을 찾는 그대에게

1995년 가을, 육군 만기 제대했다. 다음해 봄에 복학 예정이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십육 개월 이 일의 군생활동안 밤이면 밤마다 어두운 초소에서 보초를 서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삶을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하지만 삶이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일도 그렇지만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어긋나기 시작한 어느날, 무작정 집을 떠났다.


스물셋 나이에 가출이라니, 그것도 군대까지 다녀와서 두달만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고민과 벽에 부딪친 느낌 때문이었다. 군대를 갔다오면 좀 더 다른 인생을 살 줄 알았고, 그때를 열렬히 바라면서 군생활을 버텼는데 막상 현실에 부딪쳐보니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하는 절망감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도망쳤다.(나중에 형에게 들으니 둘째 아들이 사라져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점을 보러 갔는데 무당의 '동쪽으로 갔고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실은 서쪽으로 갔는데.) 


지리산 산청에는 과 학생회장을 했던 한해 선배가 방위로 군 복무 중이었는데 그 선배 집에서 추수를 도와주며 며칠을 묵었다. 낮에는 벼베기를 돕고 밤이면 선배 방에서 소주를 마셨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먹고는 취해서 '선배, 사랑이냐 혁명이냐, 이게 문제입니다.'하고 헛소리를 했다. 그렇게 선배 집에 있다가 추수가 끝나자 지리산을 올랐다. 산을 헤매며 풀리지 않는 삶의 숙제를 밤이면 소주로 달랬다. 과연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이십년이 지나 다시 지리산 장터목 산장에서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란 애당초 뭔지도 몰랐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는 각자 삶이란 대충 이랬으면 좋겠고 저랬으면 멋지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꾼다. 자기가 바라는 삶이란 결국 자기 중심적이고, 그래서 한없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사랑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결혼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누구나 혼자서 뱉어 본 말일 것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살고 싶은 삶을 살지 못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삶을 목표로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묻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삶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그 안에서 해내려 하고 이루려 하지만 삶은, 내가 깨달은 삶이란 그렇지 않다. 삶이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삶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묻는 질문을 받아들이며 거기에 맞춰 사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삶을 이해하고 바꿀 능력이 도무지 없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주도할 능력도 없다. 그저 삶이 요구하는 일을 다하는 것이 삶에 대한 최선이다. 


또 하나. 한번뿐인 삶에 정답이란 없다. 다른 인생을 살 수 없으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전부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좋든 싫든) 지금 나의 삶 밖에 없다. 다른 삶을 꿈꾼다면 기꺼이 지금까지의 것을 포기하고 새로 시작하면 된다. 오직 그런 경우에만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라는 질문이 유효할 뿐이다. 하지만 새로 시작하려는 삶도 결국에는 주어지는 것이다.


삶이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다. 엄청 재미있지만 두려운 것이다. 안타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탈 용기를 내고 탄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삶이란 원래 그렇다고 정해진 것이 아니다. 미리 준비하고 바라던 삶을 산다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삶이 자기 마음대로 된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삶이란 주머니 속에 부끄러운 동전이라도 꺼내 놓는 용기를 내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롤러코스터처럼 설레고 두려운.


'산다'는 뜻의 영어 live를 반대로 쓰면 evil, 곧 '악마'가 된다. 제때 제대로 살지 않고 비교하고 원망만 하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삶이란 늘 위태로운지도 모르겠다. 유혹에 빠지기 쉽고, 잘 살려하면 할수록 꼬이는, 답이 없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렇게 위태로운 삶을 주도하려다 실패하고 지리산을 올랐다. 산에서 죽든지 살든지 답을 찾고 싶었지만 결국 그냥 내려왔다. 다만 그후 말도 안되는 꿈은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질문을 마주하고자 하는 한줌의 내공이 생겼으니 스물셋의 가출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님은 물론이다. '이것이 삶이다'하고 말하는 순간, 그 삶은 이미 삶이 아닐지니.


'내가 살고 싶은 삶이란 이런게 아닌데'하고 독백처럼 말하고 싶을 때, 삶이 지금 나에게 묻는 질문에 먼저 온 몸으로 대답해야 한다. 대개 내가 먼저가 아니라 삶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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