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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남은 자의 슬픔

늘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대학교 때 읽은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란 책이 생각난다. '젊어서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없지만 늙어서까지 사회주의자로 남는 사람도 없다.'는 주인공의 변명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젊은 시절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에 투신했고 그 때문에 감옥에 갔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열심히 살다가 먼저 떠난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살아있다는 것은 종종 부끄럽고 슬픈 일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의 '서른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한때 정의와 대의를 위해 길을 나서지 않은 젊은이가 있겠느냐만은 지금은 살아 남았다는 것만으로 슬프다. 하나 둘 떠나가는 친구와 지인, 가족을 볼 때면 그들 삶에서 빛났던 어떤 것이 사그라져 버려 그만큼 세상이 더 어두워지는 것 같다.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언젠가 그 길에 동참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하고 말할 용기가 점점 줄어든다. 삶은 그렇게 슬픔의 연속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 코로나19 때문에 불안한 사람들, 직장도 없고 결혼도 못한 상태에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젊은이들,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 투기와 주식,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여하튼 이 모든 사람들에게 '늘 행복하세요!'하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행복이 무엇인가를 얻고 누리고 가져서 남이 알아주는 것이라면 그건 참 이루기도 어렵지만 늘 그렇게 유지하기는 얼마나 더 어려울까. 그런 말도 안되는 행복을 바라며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걸까. 


한때 황홀한 인생을 꿈꾸던 사람이 나 하나 뿐이었겠는가. 그때는 황홀감(Ecstasy)을 자아도취, 혹은 최고의 자아성취로 바라고 열심히 쫓아갔지만 지금은 아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생각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같이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찾아오는 어떤 것, 비극과 희극, 죄와 기쁨, 더러움과 순수가 다 드러난 뒤에야 이해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연극의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감동, 자신의 최악의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용서받고 또 용서받은 후에야 앞으로는 조용하고 겸손하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카타르시스는 서두르지 않는다. 화려하진 않지만 따듯하고, 멋지진 않지만 위로가 된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종종 이런 감정을 안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전부다. 그래서 슬프다.


덧붙이는 말: '...그래서 슬프다.'하고 글을 마무리하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염려가 되어 사족을 달면서 피식 웃는다. 슬퍼해서도 안되고 슬프다고 말해서는 더욱 안되는 세상 때문이다. 슬픔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기쁨이 뭔지 어떻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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