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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군위성당을 떠나며

매일 미사 강론 준비는 하루가 필요하고, 주일 미사 강론은 일주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송별 미사 강론 준비는 얼마나 필요할까요? 제게는 삼년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저와 함께 걷고 저를 가르치고 저를 위로해 주신 말씀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일 말씀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길을 잃고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외로워하고 새로운 삶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말씀이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이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베드 10,34-35).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외모나 능력, 심지어 마음 속 생각이나 죄까지도 상관없이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그분은 제게 조건없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신을 단죄하고 스스로를 차별하도록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해 주시고 기다려 주시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 덕분에 저는 겸손한 사제, 충실한 종, 모든 이의 친구가 되기 위해 애쓸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마정산을 오르는 것과 위천을 따라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습니다. 군위에서 나는 제철 과일과 채소, 싱싱한 돼지고기를 좋아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튀긴 옛날 통닭과 오뎅탕, 함께 마시던 수제맥주, 그리고 종종 등장하던 홍어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특히 내량제를 따라 달리는 길과 매일 저녁 군위성당 주변을 산책하며 묵주기도 바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사제관에서 먹는 점심만큼 시꼴집 특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늘채에서 울려 나오는 시월의 어느 저녁의 음악과 커피, 에그 타르트를 더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찾아온 별님이와 새끼들도 더 좋아했습니다.


저는 군위성당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간 울릉도가 기억에 남습니다. 본당 ME 가족들을 사랑했습니다. 필리핀 연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매일 미사에 나오는 분들, 여러 단체들에 속해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신자들, 사목위원들, 공소신자들, 봉성체 어른들, 주일 미사에 나오는 모든 신자분들을 사랑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딸, 내 마음에 드는 이들이다’(마르 1,11). 오늘 복음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세례의 은총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 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사랑과 친교의 신앙공동체로 모여 있을 때 그 소리를 마음에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인 여러분과 함께 한 삼년의 여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제가 알게 모르게 여러분에게 준 상처와 아픔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선택한 마음에 드는 종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의 종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가족, 친구, 이웃에게 다가서십시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2-3).


여러분 한분 한분을 기억합니다. 때론 부러진 갈대처럼, 꺼져 가는 심지처럼 힘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충실히 신앙의 여정을 걸어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주교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에도 여러분은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평화를 찾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이렇듯 자랑스런 여러분 모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술을 한잔 하며 회포를 풀고 싶으나 그것마저 어렵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가 갑자기 조용히 떠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보여준 신앙, 기쁨, 사랑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군위본당에서의 삼년은 제 평생의 위로이자 힘이 될 것을 압니다. 여러분 덕분에 이제는 제가 아니라 제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느껴지고 드러나고 사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죄 많은 사제가 여러분과 함께 살면서 조금 더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너그러워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종이 되는 삶, 누군가에게 다리가 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며, 주님의 은총과 평화 속에 머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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