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부수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결혼기념일 편지

오월의 신부

대구 ME 지도신부를 맡고 있는 나는 작년 말부터 결혼기념일을 맞이한 발표부부들에게 서로에게 쓰는 '사랑의 편지'를 준비해서 월례회 때마다 발표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어색해 했고, '굳이 편지로 써야 하나요?'라는 질문도 들었지만 그때마다 '일년에 한번 사랑을 글로 써 보세요.'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하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 그 시험이 닥쳤다. 나의 결혼기념일, 곧 사제 서품 기념일이 5월 12일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그대(신자들)에게


오늘은 사랑스러운 오월의 하루입니다. 눈부신 햇살은 아직 따갑지 않고 바람은 시원하고 공기마저 달콤합니다. 이렇게 좋은 시절에 그대를 만나 결혼한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월은 제게 가장 행복한 달입니다.


어느새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만일 저에게 딸 아이가 있었다면(정말 바랬던 일이지만) 지금쯤은 부모에게 말댓구하고 화내고 토라지는 사춘기를 맞이해 속을 썩이기 시작하겠지요. 그래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벌써 반백년을 살았습니다. 싱싱했던 몸과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마음도 이제 나이가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한가지는 이 세상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그대와 같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대는 제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마음에 묻어두고 하지 못했던 말을 편지를 통해 전할까 합니다.


미안합니다. 매사에 자기 중심적이어서 저에게 좋은 것만 보고, 잘 듣지 않고, 그럴싸한 말만 많았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대는 안중에 없고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대를 위한 배려, 칭찬, 사랑이 늘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참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대는 이기적이고 죄 많은 저를 인내해 주었습니다. 못난 저를 욕하는 대신 믿고 따라주었고, 상냥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매일 먹을 것을 준비하고 철마다 입을 것을 챙겨주고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참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감히 저 자신만큼 그대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친구라 부르며 사랑해 주셨듯이 저도 그대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오월의 신부가 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일입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서품식 복음이 떠오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그에게 물으셨듯이 저에게도 '요한의 아들 하상바오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당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장 참조)


그동안 저는 그대를 잘 돌보지 못했습니다. 제 욕심이 많았고 죄 안에 갇혀 있었고 참 목자이신 주님과 가깝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참 미안하고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용기를 내어 앞으로 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부디 내년 결혼기념일까지 지금의 마음으로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다시 기도해 주십시오. 그대를 저 자신처럼 사랑하면서 될 수 있으면 적게 상처주고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제게 바라는 일이니까요.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2007년 5월 12일 서품식 후 주교님, 동기들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어머니 기일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