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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이불

무료한 고양이

토요일 아침, 할 일이 없다.


적당히 무료하고 살짝 따분하고 미묘한 염려가 일어난다. 그래도 할 일이 없다.


음악의 볼륨을 높이면서 다음 주 수업과 일정을 살피고 다가올 마라톤 계획을 점검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다시 심심하다.


지리멸렬한 시간 앞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방에 갇혀 있는 신세다. 실제로 벌써 일주일째 밀접접촉자로 자가격리 중인 아래층 신부는 얼마나 힘들까. 방에서 먹고 자고 싸고 가끔 걷고 책 읽고 온라인 수업하면서 버티고 있겠지.


'존버정신'이 필요하다. 


인생의 대부분은 별 일 없고 할 일 없어 존나게 버텨야 하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을. 우리는 어디서 영화나 드라마같은 인생을 꿈꾸게 된 것일까. 영화 주인공도 드라마의 악녀도 연기 시간 외에는 존버하고 있을텐데.


바쁘게 사는 것, 할 일이 늘 쌓여 있는 것,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것이 미덕인 세상에서 할 일 없이 무료하게 혼자 있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에 옅은 파도가 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구는 전속력으로 돌고 있지만 인간은 느끼지 못한다. 너무 거대하고 확실한 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The Earth is turning at high speed but we cannot feel it. Anything extremely large and confident is imperceptible. (박노해의 <걷는 독서> 중에서)


어쩌면 너무 거대하고 확실한 것 앞에서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 쓰잘머리 없는 일이 없으니 조용히 가만히 앉아 있음으로 생각하게 되는 어떤 거대한 주제 앞에서 느끼는 감각은 아닐까.


굳이 자전거를 타러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아무 책이나 잡고 읽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을 인내해 보리라 마음 먹는다. 마음은 제 멋대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하고, 갑자기 미움에 부르르 떨기도 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불러일으키며 주인의 눈치를 살피지만 그도 그대로 두기로 한다.


할 일 없음은 덕(德)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 감정의 찌꺼기나 열량 소비로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남을 힘들게 하지도 않으므로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혼자 있어도 말과 행동에 흐트러짐이 없으면 '신독(愼獨)'을 실천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용은 말한다. "숨겨져 있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고(莫見乎隱), 아주 작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莫顯乎微). 그러기에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故君子愼其獨也).”


신독이라 해서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어떤 성현의 말처럼,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충분하다.


이불은 제대로 개었는지, 책상 위는 잘 정돈이 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지만 토요일 아침 아닌가. 


신독도 조금 느슨하게, 이불도 너무 부끄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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