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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타고 떠나기

오랜만에 기차여행

기차를 타고 싶었다. 그것도 오래.


하양에서 무궁화를 탔다. 그렇다. 아직도 무궁화는 잘 달린다. 값은 KTX의 반값이지만 내부는 더없이 안락하다. 다만 좀 느릴 뿐이다.



우린 너무 빨리 갈려고 한다. 행복해지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즐거운 순간을 가능한한 길게 가지는 것이다. 유럽에서 아이스크림을 정성스럽게 핥아먹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서 배운 것이다.


무궁화는 천천히 간다. 그래서 풍경도 천천히 펼쳐지고 시간도 느리게 간다. 행복도 더 오래 지속된다.


기차여행은 누구나 좋아한다. 예전에 통일호나 비둘기를 타고 다닐 때는 홍익에서 파는 삶은 계란, 사이다, 호두과자 등 먹을 것이 참 많았다. 무엇보다 5-10분 역에서 정차할 때 플랫폼에서 먹는 홍익 우동의 맛은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기차로 풍기 할아버지 집에도 가고 소백산과 강릉 경포대도 갔다. 군대에서는 논산에서 6주 훈련을 받고 연무대에서 밤기차를 탔는데 선택받은 병사들은 서울에서 내렸지만 나는 종착역인 의정부까지 가기도 했었다.


군위성당에 있을 때는 국토부에 요청하여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 군위 화본역에서 정동진까지 낭만 기차 여행을 간 적도 있다. 기차 한량을 통째로 빌려 주일학교 학생들과 동네에서 기차타고 바다보러 갔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했던 기억도 새삼스럽다. 이렇듯 기차 여행은 누구에게나 추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이번 기차 여행에는 메리 올리버가 동행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놀라운 시를 읽으며 차창 밖을 보니 쭈볏거리며 서성이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여행의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잠시 멈추고 낯선 곳으로 떠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독백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동안 바쁘게 정신없이 주어진 일만 해내느라 돌보지 못해 피로해진 자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바라본 낙동강에서 자전거길이 보인다. 지난 한여름 뙤약볕에서 달렸던 바로 그 길이다! 여행에서 여행을 만나니 참 좋다.


나란히 두 줄로 뻗은 선로는 어디론가 나를 데려다 줄 것이다. 그것이 바다든 고향이든, 심지어 우주로라도 안내해 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은하철도 999를 타고 떠난다. 노을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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