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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는 없다

가을의 끝을 잡고

교정을 걷다가 소나무를 쳐다본다. 늘 변함없는 초록색의 소나무 잎이 누렇게 물들어 있다. 소나무에 따라 적게는 10%, 많게는 30%가 낙엽처럼 물들어 있다. 


상록수는 없다. 늘 녹색인 소나무도 겨울을 앞두고 제 몸을 지키기 위해 불필요한 잎은 떨어트린다. 그동안 늘 푸른 소나무로만 알고 바라봤기에 변함없다고 생각했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자연은 늘 변한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어떻게 늘 한결같을 수 있을까? 해마다 다른 몸, 계절에 따라 바뀌는 기분, 만나는 사람에 따라 흔들리는 평정심, 그도 아니면 그냥 힘들어서 제 몸의 일부가 누렇게 물들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러면 안돼! 어서 자기 색을 찾아야지. 멋진 녹색으로 서 있어야지.' 하고 자신을 몰아부치다보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은행나무 길을 걷다보면 길가에 떨어진 샛노란 은행잎이 참 곱다. 기꺼이 죽는 것은 아름답다. 


한창일때인데도 때가 되면 남김없이 떨구어내는 은행나무가 모질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나무는 겨우내 살아날 수 있다. 모진 때를 견디는 방법은 아낌없이 내어놓고 비우는 것이다. 아까워서 계속 붙들고 있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사람도 늘 한결같이 푸르고자 하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항상 좋을 수 없다. 계속 성장할 수 없다. 때론 기꺼이 죽을 수 있을 때가 더 아름답다. 


잘하고 싶은 일, 뜻대로 안되는 일, 그저 한 사람으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는 것,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사는 일이 무엇하나 쉬운게 없다. 


누가 가을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죽음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삶을 아는 자일텐데 이는, 곧 살고 죽는 일이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가을에는 기꺼이 죽는 것들을 보며 나도 하나쯤은 죽어보는 연습을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시당해주고, 실패한 일이 있다면 실패를 인정하고, 죄를 지어 미안하다면 죄인으로 고개를 숙일 수 있을 때 나에게도 가을이 올 것이다.


적어도 상록수로 서 있을 욕심이라도 내려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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