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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세상은 왜 이렇습니까?

가짜 하느님과 잘못된 세상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경, 저는 대구 중앙로역에 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구대교구 학생회 총무였는데 앞산 청소년수련원에서 있을 신학생 연수를 준비하기 위해 상인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아침 일찍 나섰던 것입니다. 깨끗한 중앙로역으로 반짝거리며 들어오는 지하철을 보며 '참 멋지게 잘 만들었네!'하고 감탄하며 지하철에 올랐습니다.


그날 오전 9시 50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구지하철 참사가 중앙로역에서 발생해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신학생 연수는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던터라 신학생 가운데에서는 아무런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과 가족과 친구를 잃은 대구 시민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만한 일도 있지만 참사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저조차도 그날의 사건은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대구 중앙로역 근처를 지날 때면 항상 그날 그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대구 지하철 참사를 다룬 2019년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를 보며 다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힘을 내요, 미스터 리> 포스터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해 158명의 안타까운 생명들을 잃었습니다. 10대-20대 사망자가 118명으로 그들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도 10대 20대 조카들이 경기도에 있는데 만일 조카를 그 사고로 잃었다고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친척, 지인들까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적어도 50-60명의 사람들이 극도의 혼란과 슬픔, 절망에 빠질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로 인해 적어도 1만여명의 우리 국민들이 극도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텐데 우리는 현실 앞에서 참담함과 무기력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사과와 위로조차 못하는 정부와 이해득실에 따라 막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기성세대로서 부끄럽고, 또 한편으론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세상은 왜 이렇습니까?


딸을 잃은 아빠는 절규하고 아들을 잃은 엄마는 쓰러져 실신하며, 친구를 잃고 희망없는 나날을 탄식과 슬픔으로 견디는 젊은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버거워 파업했다가 범죄자로 취급받고, 죽어라고 공부만해야 하는 학생들은 웃음을 잃은 세상에서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우리는 어떤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세상의 권력자인가요, 아니면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부자인가요, 그도 아니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인가요?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사람들이 사는 곳, 사람들이 만든 모든 것입니까? 욕망의 덩어리, 혹은 구원받아야 할 사악한 곳입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이 오실 우리의 세상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기다려야 할 하느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분이십니다. 권력, 재물, 능력이 아니라 오직 사랑만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꺼이 무능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살핌을 요구하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에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세상은 건물이나 돈이나 사람들의 모임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입니다. 세상은 내가 포함된 곳이며 내가 만들어 가는 곳이기에 우리 자신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에 가장 연약한 하느님을 모실 자리가 있습니까? 더럽고 냄새나고 누추한 우리 가슴 한구석을 내어드릴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찾는 하느님을 찾을 수 없으며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실 자리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하느님을 잘못된 세상에 모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도 사람들을 잊거나 버린 적이 없으신 하느님을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찾거나 모신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매년 다가오는 성탄절은 새롭지 않고 기쁘지 않고 그저 반복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는 이에게 하느님은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도대체 없는 곳이 어디냐? 네가 고통속에 신음할 때에도, 환희속에 기뻐할 때에도, 심지어 죽을 때에도 내가 그곳에 있거늘 내가 너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언제더냐?'


마지막 대림 주일, 곧 오실 하느님을 어디에서 찾을까 묻기 전에, 어쩌면 이미 와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을 맞이할 작은 구유 하나 서둘러 마련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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