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 19>
은행나무가 참 곱게 물들었습니다. 단풍이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드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나무가 부끄러워서입니다. 곧 겨울이 닥치면 나뭇잎을 다 떨구어내고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야 하는 나무는 자기의 속살, 치부를 다 보여 주어야 하기에 부끄러워서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부끄러움을 감당하고 추락하는 나뭇잎, 자기의 일부를 떠나 보내야 하는 나무나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왜 하고 싶은 말이 없겠습니까.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이라고 윤동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무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화려한 색깔로 드러내 보이는 나무는 지금의 부끄러움이 나중에 자랑이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노래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별헤는 밤> 중에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부끄러움을 슬퍼하고 기꺼이 죽을 때 자랑같은 봄이 옵니다.
나무가 겨울을 앞두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부끄러워하듯이 위령성월을 시작하며 죽음을 앞둔 우리 역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 이기심, 욕망 등 부끄러운 모든 것을 숨기지 말고 조심스레 하느님 앞에 내려 놓을 때, 부끄럽지만 아름답게 봄을 맞이할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우리 신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 곧 파스카 신비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잘 죽습니까? 기 죽지 않으려고 지지 않으려고 얕보이지 않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뻣뻣해지고 차가워집니다. '너는 내 밥이다'하고 생각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타인에게 밥이 되는 일은 부끄러워합니다.
진정한 부끄러움을 모르니 붉게 물들 일도, 죽지 않으려니 사는 법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내주고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용서해주는 사람은 황금들녘의 벼처럼 겸손히 고개를 숙인채 가을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며 사람을 살리는 곡식이 됩니다.
여러분 목에 걸려있는 메달을 한번 보십시오. 먼저 앞면에 있는 '살아있는 사람'의 로고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을 가장 깊이 드러낸 십자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살아있는 사람의 한걸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뒷면을 보면, '살아있는 사람 19'의 주제인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가 적혀 있습니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남기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완주 메달은 그 자체로 쌀 한톨입니다. 별 볼일 없는 쌀 한톨이지만 모두 모으면 누군가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밥 한그릇이 됩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 쌓이면 천시만반(千匙萬飯)이 됩니다.
우리는 밥을 나누는 식탁 공동체입니다. 함께 뛰고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식구(食口)입니다. 우리가 밥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다른 이도 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을 위한 밥이 되셨습니다. 먹기 좋은 밥이 되셨습니다. 밥은 일용할 양식이며, 성체성사입니다.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밥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의 노래로 강론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김지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성체성사)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