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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새만금 세계 잼버리가 끝이 났다. 수많은 논란으로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일이 지나가고 나니 왠지 허전하다. 동시에 계속되는 대대적인 감찰 소식이나 네 탓 공방 뉴스를 보면서 혼자 묻는다.


'부정적인 뉴스는 왜 이렇게 많을까?'


최근에 읽은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에서 그 답을 찾았다.


우리는 부정적인 정보에 주의가 집중되고 뇌가 활성화된다. 그 이유는 나쁜 정보를 처리해야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생존 확률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언론의 입장에서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와 뉴스를 보도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앞다퉈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고 문제를 파헤치고 비리를 밝혀내려고 한다. 


사람이나 언론 모두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뉴스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문제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정확한 식별과 판단을 어떻게 하는가다.


사람은 모두 '불안'에 의해 움직인다. 시험을 앞둔 학생은 불안 때문에 하기 싫은 공부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뉴스를 통해 불안이라는 기폭제를 활성화시키고 그 동력으로 안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다. 


결국 세상은 불안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회시스템이 생기고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도 불안 때문이다. 이런 불안의 근간은 인간만이 지닌 생각하는 능력 때문이다.


문제는 생각이 지나치면 불안이 커져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시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 해를 끼치는데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걱정하는 일의 9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허상일 뿐이다.


또 다른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에는 생각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가르쳐 준다.


전도유망한 다국적 기업에서 스물여섯에 임원으로 임명된 스웨덴 사람 비욘 린데블라드는 홀연히 모든 것을 버리고 태국 밀림으로 들어가 숲속 승려(Forest Monk)가 된다. 전통 불교에 실망한 승려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더 엄격한 규율에 따라 살고자 만든 숲속 승려가 된 그는 '지혜가 자라는 자', 곧 '나티코(Natthiko)'라는 법명으로 17년을 수행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들려준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생각을 굳게 믿는다. 잠에서 방금 깨어나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떠오른 생각을 붙들고 오전을 보내고,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서 떠오른 부정적인 감정으로 아파하고, 어제한 실수를 떠올리며 자책하고 다가올 일을 걱정한다.


나티코는 내 생각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서는 통제할 수 없는 내외부 상황에 목메지 말고 시도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불안이나 외로움,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는 진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을 살게하고 성장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우리 마음은 가만히 두면 제 마음대로 설친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게 하여 행복하게도 하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게도 만든다. 느낌도 마찬가지다. 매순간 변하는 감정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친구이지만 그것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내 마음을 쥐었다 폈다 제 마음대로 한다. 


나티코는 우리가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만큼 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 저 사람은 왜 저럴까?' 같은 생각 앞에서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튼다. 이어 그는 지혜의 말을 들려준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마법의)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I may be wrong).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I may be wrong).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I may be wrong).


이 마법의 주문은 단순히 근심을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바보같은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현 정치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맞고, 내가 다 아니 내 말을 들어라'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넘어서는 역사와 시간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존재일 뿐인데 그런 진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역사와 시간을 지배하듯 말하고 행동하면 보는 이는 불신하게 된다.


나티코는 말한다.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뇌는 불안을 불러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느낌이 나를 휘두르게 하지 않도록 현재 나의 몸에 집중한다. 그때 아인슈타인의 말을 이해한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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