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은 하면 할수록 복잡해진다.
먼저 예수님은 머리에 화려한 금빛 후광을 두르고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그 얼굴로 오시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길가다가 만날 수 있는 그런 사람 중 한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바로 복음을 선포하실 것이다.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부분의 우리는 선포하는 그분께 잠시 눈과 귀를 주겠지만 곧 가던 길을 계속 갈 것이다. 우리는 늘 바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공동사제관에 오신다해도 나름 바쁜 신부들이 다 모이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농담처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이고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천년전 제자들처럼 그분을 만나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키신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는 사실은 복잡한 의료 과학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결국은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예수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 오셔도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혹 아주 유명한 가수나 대단한 유투버가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우리는 자주 기도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 주십사고.
오늘 그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 역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질문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쉽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바오로 사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형제 여러분,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다 아는 이야기잖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게 아니다.
먼저 우리는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한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거나 연말 보너스를 두둑히 받으면 모두 기뻐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다.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언제나 기뻐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기쁨, 곧 온갖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두번째로 우리는 종종 기도한다. 아픈 누구를 낫게 해 주십시오, 꼭 그 일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하느님께 청해야 할 필요한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사는게 한눈 팔아서는 안되는 일인데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 말로 '늘 깨어있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항상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끔 감사드린다. 바랬던 기도가 이루어졌거나 하마터면 내게 일어났을뻔한 큰 일에서 벗어났으면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하셨던 마리아의 순종을 받아들이는 것, 곧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알고 '예'하고 말하면서 미리 감사드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이 강론을 듣는(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다.
이 말씀을 정말 나를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 뜻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눈앞에 오신 예수님을 모른채 하고 심지어는 비난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따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답은 각자의 몫이니까.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