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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땀

‘중은 절이 익숙해지면 떠난다.’

 

서른이 넘어 미국으로 유학갈 때 떠오른 말이었다. 신학생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장 신부님의 권유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려 하니 그제서야 안주하고 있었던 자신이 보였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공부에서도 뒤쳐지고 무엇보다 외로웠던 나에게 달리기는 해방구 같은 것이었다. 뛰지라도 않으면 몸과 마음이 천천히 녹쓸어 나중에는 못 쓰게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초원이를 만났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다섯살 지능의 스무살 청년 초원이가 2001년 춘천마라톤 대회에서 서브쓰리(3시간 이내 풀코스 완주)를 한 실제 이야기를 영화 <말아톤>으로 만났다. '초원이와 나는 닮았다' 생각하며 말아톤을 뛰기로 마음 먹었다. 나 역시 초원이처럼 ‘백만불짜리 다리’가 있었으므로.


얼마 뒤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던 집없는 한 소녀를 만났다. 길거리 생활의 고통과 배고픔의 충격 때문인지 아무 말이 없었던 그 아이에게 밥을 퍼주고 사탕을 주면서도 무력감에 힘이 빠졌다. 무엇이라도 배고픈 아이를 위해 하고 싶었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달리기뿐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위해 달렸고 성금을 모아 마다가스카로 보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달리고 있다. 그동안 943명의 사람들이 나와 함께 달리며 ‘사라’(말없던 그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마다가스카 언어로 ‘아름답다’는 뜻)를 위해 성금을 모았다. 우리는 스스로를 ‘살아있는 사람(Living Person)’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레네오 성인이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달리기는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달리기 호흡은 내가 가장 나답게 숨쉬는 방식이며 땀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다. 끈적거리며 별 볼 일 없는 땀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사람을 오늘날 사람으로 만든 것은 달릴 때 맨살에서 물기 있는 체액으로 나오는 땀이다. 더워진 몸을 땀이 증발하며 식혀주기에 사람은 어떤 동물보다도 오래 달릴 수 있었고 사냥감을 지치지 않고 좇아가 잡을 수 있었다. 사자처럼 힘이 있지도 치타처럼 빠르지도 않았지만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별 볼 일 없는 땀 때문이다.


달린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위를 통해서 나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인 살아있음을 되새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나 자신이 먼저 바로 설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달리기는 나에게 그런 것이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거친 호흡과 매력없는 땀을 동반한 달리기로 날마다 틈틈이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인생 여정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에서 말했다.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내가 달리기를 하는 이유다. 별 볼 일 없는 땀을 소중히 여기며 한 숨에 한 발자국씩 내달리는 것이 가장 나답게 사는 순간이다. 동시에 달리기를 통해 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에 계속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좀 더 나은 자신, 곧 발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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