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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의 힐링

by 문영

나의 쉼은 단순하다. 렌즈를 끼지 않고 화장을 하지 않고 좋아하는 책을 보며 맛있는 것을 먹는 것.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때로는 혼자인 것도 좋다.


오늘, 개학 전 유일하게 여유를 부려볼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이 떠올랐고 가고 싶은 곳도 여럿 떠올랐으며 읽고 싶은 책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고요였다. 며칠 전에는 짧고 굵게 아팠다. 쏟아지는 혈뇨에 겁을 잔뜩 먹었고 이미 머릿속에는 큰 병원에 입원하는 스케줄이 짜이고 있었다. 너무나 다행히도, 놀랍게도 동네 병원에서 받은 약으로 효과를 보면서 증상이 나아졌다. 그런데 혈뇨와 함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마치 아이를 출산한 직후 모든 근육이 빠졌을 때처럼 나는 좀처럼 맥을 추지 못한 채 기운 없음에 시달렸었다. 그 컨디션이 아직 올라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궂다. 겁과 엄살이 많은 나는 이런 조건에서 멀리는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뭐라도 하긴 해야겠다.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 시간이다. 이 날을 놓치면 몇 달은 또 수업 준비와 학교 업무, 회의에 치이며 나는 나의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다. 무조건 집을 나섰다. 친한 언니로부터 괜찮은 카페까지 알아놓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 카페에서 죽치고 책을 보고 오랜만에 글을 쓸 심산이었다.


악천후를 뚫고 20분 거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대형 베이커리 카페였다. 차에서 대기했다가 오픈 시간에 딱 맞춰 들어갔다. 따뜻한 조명과 통창에 기분이 좋아졌다. 시그니처 메뉴를 시키고 2층으로 올라가서 콘센트가 있는, 눈 내리는 밖이 잘 보이는 통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오래오래 있을 예정이다.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는데 갑자기 테이블에 뚝뚝 듣는 소리가 난다. 뭐지, 하는 마음에 쳐다보니 천장에서 물이 떨어진다. 놀라 일어났더니 머리 위로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리를 옮겼다. 비록 통창 옆은 아니지만 조명은 좀 더 따뜻했고 안쪽이라 아늑함이 있었다. 그래, 괜찮아. 진동벨이 울리고 커피를 받으며 와이파이 비번을 물어봤다. 이층 와이파이는 고장이란다. 1층 자리에 앉거나 2층에서 1층의 와이파이 신호를 약하게 받을 수 있을 거란다. 하하하. 그냥 웃으며 음료를 받아 올라갔다. 나는 책을 읽을 거니까 괜찮다. 무한 긍정을 발휘하였다.


실제로 보고 싶었던 청소년 소설을 뚝딱, 다 읽었다. 가볍고 재밌는,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작품을 읽고 싶어서 선택했던 책이다. 동료 선생님이 재밌다고 해 주셔서 어제 내가 담당하는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업어 왔다. 가볍고 흥미진진하여 눈을 뗄 수 없었지만 마음은 심란함으로 가득 차 버렸다. 이꽃님 작가의 작품은 어쩜 이렇게 사실적이고 그녀가 그려내는 청소년의 심리가 어떻게 그렇게 진실돼 보이는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튼,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을 두 시간 만에 뚝딱 읽어내고 짐을 챙겨 일 층으로 내려왔다.


아직 내게 준 휴가를 더 즐길 예정이다. 브런치 메뉴를 하나 더 시키고 인터넷을 연결하여 글을 쓰기로 했다. 오늘 읽은 책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쓰고 싶은 에세이를 하나 써야지.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다른 책을 한 권 더 봐야지. 그러고 난 후 오늘 하루 잘 보냈다 토닥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단순한 고요가 요즘은 좋다. 이런 날 무조건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거창한 데를 가지 않아도 힐링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이고 앞으로가 그려지지 않는다. 이미 개학 후에 줄줄이 일어날, 예정되어 있는 산적한 일이 새 학기의 설렘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그 시간에 편승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삶은 그럭저럭 괜찮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몸이 회복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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