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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샘 Dec 09. 2023

내가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

우리는 사랑받음으로 존재를 확인한다

"지 거부터 놓는 거 봐."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엄마는 내게 수저를 좀 놔달라고 하셨고, 나는 수저통에서 보이는 대로 숟가락 젓가락을 놓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은수저를 사용했는데 아버지는 금색, 어머니는 은색 등 각자 저마다의 수저색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사용했던 빨간색 은수저가 제일 먼저 보여서 내 것을 먼저 놓은 것뿐이었는데 어머니의 이 한마디에 나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가슴이 콱 막힌 듯 억울함이 솟구쳤다. 슬펐다. 그리고 무의식 속 나의 존재는 그때 알아차린 것 같다.

'아,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구나. 그리고 내 순서가 제일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구나.'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주방에 제일 먼저 들어섰다. 숟가락이라도 놔 달라는 엄마의 요청에 수저통을 들고 수저를 놓았다. 수저의 색은 정해져 있고, 색이 곧 그 사람이다 보니 수저가 그곳에 놓여있다는 건 그 사람의 자리가 그곳이라고 가리키는 것도 된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수저를 놓았는데 무엇 때문인지 크게 혼이 났던 기억이 있다. 수저통을 뺏고 숟가락 젓가락을 휙휙 소리 나게 바꾸며 위치를 조정하셨다. 그럴 땐 뭐가 잘못된 것인지, 왜 그렇게 놔야 하는 건지 설명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존재는 알아차렸다.

'아, 자리에는 좋은 자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리도 있는데 그 좋은 자리가 내 자리는 아니구나.'

종종 그에 대한 엄마의 지적을 들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난 '자리', '위치' 이런 것이 좀 불편해졌다.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조금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난 그런 엄마의 원칙이 참 어려웠다. 그리고 조금 자라서부터는 차등을 두는 엄마의 생각에 대한 반발심으로 자세히 알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얼마 전 엄마 생신날, 친정 모임이 있었고 남편과 함께 친정에 가게 되었다. 생일 케이크를 사가지고 가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거실에 식탁과 상이 함께 놓여있었다.

"식탁엔 남자들이 앉고, 상엔 여자들이 앉아서 먹는대."

늦게 온 내가 상과 식탁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해하니 언니가 내게 말을 건넸다.

조카 둘에 어른 여덟, 10명이 모두 한 상에 앉기는 많아서 남자 넷은 식탁에, 조카 둘까지 여자 여섯은 상에 앉기로 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남자들은 술을 마시니까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상을 차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 그래?"

하고 식탁을 보는데, 어디에 앉아도 되는 건지 갑자기 막막해 왔다. 순간 어린 시절의 내가 소환되어 잊고 있었던 상처가 드러나 쓰라렸다.

"어디 앉으면 돼?"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언니에게 물었다.

"아무 데나 앉아."

"진짜 아무 데나 앉아도 되는 거야?"

언니는 새삼스레 뭘 저런 걸 묻냐는 듯한 말투로 "응. 그냥 아무 데나 앉아." 했다.

가장 적당해 보이는 오른쪽 끝에 앉아서 말없이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올라왔다. 그날 음식 맛이 어떠했는지, 갓 담아낸 겉절이 맛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언니가 잠깐 어린시절의 나를 소환했는데 괜스레 마음이 뾰족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집에 두고 온 강아지를 핑계 삼아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이유에 대한 답은 나의 어린 시절에 있다.

1남 2녀 중 둘째인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존재감'과 참으로 치열하게 싸웠다. 나는 끊임없이 이곳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언니는 첫째로서의 존재감이 확실했다. 언니는 뭐든지 잘했고, 어느 곳에서나 언니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물론 맏이로서의 언니의 애환도 있을 줄 안다. 하지만 내 눈엔 언니가 늘 그렇게 큰 존재였다.) 남동생은 우리 집안의 장손, 막둥이, 귀염둥이로서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동생은 늘 재미있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역할로서 기능하려 했던 것 같다. '숟가락 놓는 일'과 같은 엄마 일을 거들어드리면서 역할을 통해 존재를 나타내려 했다. 일을 통해 사랑받고 인정받으면서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틀렸다는 것을 확인받고 잘못했다는 것을 확인받으면서 작아졌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나의 욕구가 좌절됐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존재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 존재는 사실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웠다 (나는 이것을 '버츄프로젝트'저자이신 권영애선생님께  버츄코칭리더학교에서 배웠다. 권영애선생님께서 쓰신 표현이다.) 당연한 말이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데 어떤 증명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다만, 우리는 사랑받음으로 존재를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사랑받고 존재로서 인정받을 때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다.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는 것이 마땅하다.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존재만으로 경이롭다. 나는 오늘도 '우리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스스로가 존재로서 사랑스럽고 존재로서 경이롭고 존재로서 아름다운 것을 알게 해 주었나?'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나, 존재를 확인받고 싶었던 그 아이에게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소중한지, 그리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가만히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대신 사과하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야. 어른들이 잘 몰라서 너를 존재로 사랑해주지 못했어. 너는 충분히 존재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경이롭다. 다만 너를 무척 사랑하는데 존재 자체로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을 잘 몰랐을 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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