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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Apr 12. 2021

#18. 브램블 (Bramble)

자카르타에서 경험하는 春

그리운 사계절, 그리고 칵테일 과외

사계절을 느끼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365일이 여름인 이 곳, 자카르타. 그래도 나름의 계절, 우기와 건기가 있는데, 영어로 Ber(September, October와 같은)이 들어가는 달은 우기(인니어로 비오는 계절이라는뜻인 무심 후잔(Musim Hujan))이고, 나머지는 건기라는 여기만의 특별한 계절 셈법이 존재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이 지속된 지 1년이 넘었다. 세계 최악의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했던 자카르타의 잿빛 공기는 교통량이 줄어 나름 맑아지고 있는데, 그나마 우울한 팬데믹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고나 해야 할까. 코로나19가 세상을 지배하기 전 모스크 확성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는 기도소리에 깨면 눈 앞을 지배하는 뿌연 공기로 일어나자마자 불쾌지수가 고속 상승을 했었는데, 이제는 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을 볼 수 있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상쾌한 아침을 되찾은 기분이다. 그래도 사계절이라는 자연의 산물이 선사하는 경이로운 기쁨은 누리기 힘들다. 당연히 모두 핑계지만, 사계절을 느끼겠다는 억지스러운 이유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칵테일로 느껴보겠다며 나는 3월 말 칵테일 1:1 과외를 받았다. 


안녕, 케니 선생님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귀여운 스픽이지 바 Spill and Still. 이 곳은 알고 보니 발리에서 꽤나 명성을 자랑했던 바텐더 케니(Kenny)라는 자가 오너 바텐더이고, 야콥(Jacob)은 케니와 함께 발리의 한 바에서 같이 일했던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5년 동안의 자카르타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동료의 송별 파티는 2월 말 이곳에서 했는데, 그 날 케니를 처음 만났다. 피구왕 통키를 연상케 하는 헤어스타일, 그리고 왼쪽 귀에 치렁치렁 걸린 피어싱이 인상적인 사내가 갑자기 내 옆에 앉아 양파 샤워크림 맛 프링글스를 ‘서비스’라며 건네더니 사라졌다. 나의 트레이드마크 표정인 ‘띠꺼운 표정’으로 그의 호의에 미심쩍게 반응하고 말았는데, 며칠 뒤 다시 방문한 바, 바 뒤편에 그가 있었다.


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케니는 15년 넘게 바텐딩을 업으로 삼고 있었고, 2017년 발리를 벗어나 자카르타에서 Spill and Still 그리고 Bootlegger & Co라는 음료 전문 사업을 운영 중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칵테일 수업을 한다는 그의 말에 혹해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수업을 등록했다. 원래는 6일간 하루에 2잔씩 수업을 진행하는데, 나는 2잔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고, 6일 동안이나 수업을 들을 만한 인내심이 부족한 인간이기에 그냥 이틀로 몰아서 칵테일 12개를 배우기로 그와 약속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는 칵테일 과외가 시작되었다. 


귀금속 가게 못지않게 아름다운 칵테일 액세서리들의 종류부터, 셰이커 종류, 홈바에 필요한 증류주와 과일주 종류를 익인 후 휘젓는(stir) 방식의 칵테일, 흔드는(shake) 방식의 칵테일 각각 6잔씩, 각기 다른 칵테일에 관한 짧은 역사와 제조 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수업의 핵심은 절대 제조한 술을 다 마시지 말 것. 바텐더들은 맛볼 수 있는 용량은 한 잔 당 5ml 정도이고, 사우어(sour) 방식의 기본 칵테일들의 황금비율은 1:2:3이라는 점이다. 전 세계 오만가지 칵테일의 레시피를 모두 외우는 것은 사실상 보통 인간의 뇌 용량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증류주 3을 기본 비율로 하여 시럽과 레몬즙 또는 라임즙을 계산하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포자였기에 이 간단한 셈을 하는 것도 어려워서 피 같은 그의 술을 몇 번이나 낭비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술을 버릴 때마다 어두워지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지금도 눈치가 보인다. 

 

자카르타라는 고강도 스트레스 도시에 7년 넘게 살면서 그와 함께 한 칵테일 과외시간은 손에 꼽힐 정도로 재미있었다. 90도 자세로 앉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씨름하며 몇 자 꾸역꾸역 적어내며 힘들다고 칭얼대는 내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지 또 한 번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붓고 마신다는 의미의 Spill and Still, 이 곳은 크지 않은 귀여운 바인데, 구조는 길쭉하고, 바 테이블 뒤편은 상당히 좁은 편이다. 그리고 모든 술과 잔을 차갑게 만드는 거대 냉동고와 연신 얼음을 만들어 내는 아이스 머신이 하단에 있는데, 차갑게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뜨거운 열을 방출하는 것인지,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공기가 바 뒤에 서있는 바텐더들로 향하는 열악한 구조였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된 노동인지 새삼 깨달았다. '앉아있는 자세'에 익숙해진 무미건조한 회사원이라는 고리타분한 직업을 가진 나 자신이 어떻게 대학생 때 커피숍이랑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했던 건지 불현듯 내 과거가 신기하게 느껴졌을 정도니 말이다. 


바텐더인데, 술을 마시지 않는 케니 그리고 야콥. 이 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의 칵테일 수업이 끝났다. 


크렘 드 카시스 숙제, 브램블(Bramble) 

집에 돌아와 Poirot 시리즈를 보며 한량의 시간을 보내며, Poirot 형사가 가장 좋아하는 아페리티프인 크렘 드 카시스(Creme de cassis)를 얼음을 듬뿍 담은 올드 패션 잔에 담아 마시고 있었다. 나의 한량 신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관찰한 케니는 브램블(Bramble)을 만들어보라며 제안했고, 진과 코안트로(Cointreau)를 베이스로 하는 화이트 레이디에서 오렌지 맛 나는 코안트로를 크렘 드 카시스로 대체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결과를 알려달라는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마치 숙제 검사받는 학생이 된 것 마냥 말이다.


브램블은 사우어(sour) 스타일의 칵테일이고, 원래 레시피는 크렘 드 카시스가 아닌 크렘 드 뮬(Creme de mure, 블랙베리로 만든 리큐르)을 이용한다. 카시스 또는 블랙베리 열매와 설탕을 잔뜩 넣어 만든 일종의 복분자 같은 술인데, 단 맛을 상쇄하기 위해 진을 넣어서 맛의 균형을 맞추고, 여기에 레몬주스를 넣어 상큼함을 극대화한 ‘봄’에 어울리는 칵테일이다.


남이 만들어주는 브램블이나 마셔봤지, 내가 직접 만들자니 얼마나 성가신지. 얼음이 가득 담긴 잔에 리큐르가 아름답게 얼음 위에 뜨도록 흘리는 것이 관건인데, 나의 floating 스킬은 정말 볼품없는 ‘허접’ 그 자체였다. 


봄을 연상케 하는 브램블은 영국 칵테일의 대부이자 故 딕 브래드셀(Dick Bradsell)이 만든 칵테일이다. 몇 년 전 뇌종양으로 56세의 나이에 세상과 작별한 브래드셀은 잉글랜드 남동부의 조그마한 시장마을인 Bishop’s Stortford라는 곳에서 1959년에 태어났으며, 18세에 작은 마을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 하나로 런던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런던 소호 근처 피카딜리 서커스 지역(뮤지컬 극장이 즐비한 웨스트 앤드 근처)에서 삼촌이 운영하던 퇴역군인 전용 술집에서 허드렛일부터 바텐딩 일까지 온갖 일을 하던 딕. 딕은 이 곳에서 복고풍의 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술=맥주, 펍, 가끔 진토닉'이 전부라고 여겼던 80-90년대 런던의 술 문화에 혁신적인 변화를 몰고 오는 주역으로 발돋움한다. 


투박한 발음이 퍽이나 순수해 보이는 이 아저씨는 고리타분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맛’에 중점을 둔 다양한 칵테일을 탄생시키는데, 그의 대표적인 칵테일 중 하나는 브램블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에스프레소 마티니이다. 브램블은 ‘블랙베리 숲(bush of blueberries)’을 의미하는데, 딕 브래드 셀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스러운 칵테일에 대적하기 위해 다분히 영국스러운 칵테일 제조를 목표로 이 칵테일 레시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Isle of Wight, 이 평온한 섬마을에서 블루베리를 채집하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만든 브램블. 이 칵테일을 마시고 있자면 공기층이 뿌옇고 목가적인 영국의 한 시골마을이 떠오른다. 잔디밭에 드러누워 초록을 벗 삼아 따스한 햇살로 일광욕하며 마시기에 제격인 브램블. 


며칠 전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에 아쉬워서 들린 스필 앤 스틸. 고온다습한 자카르타의 도로변 주위를 1km 이상 걸었더니 책가방을 짊어진 내 어깨와 등은 땀으로 흥건했고, 바 테이블에 앉자마자 사부에게 브램블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다. 당연히 나의 허접한 플로팅 스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음 사이사이에 아름답게 스며드는 케니의 크렘 드 카시스. 블루베리와 블랙베리는 없었지만, 한 5잔 정도는 거뜬히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청량하고 상큼한 그의 브램블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케니가 만든 브램블과 낮술을 마시며 즐기는 햇살

브램블 레시피 

내가 만든 브램블

[브램블 재료]

드라이 진 45ml

크렘 드 카시스 5-10ml (마지막에 얼음 위에 띄우는 용)

레몬 주스 30ml

시럽 15ml


진, 레몬주스, 시럽을 셰이커에 넣고 흔든 후, 얼음 위에 크렘 드 카시스를 붓는다. 유리잔 높이에 맞는 빨대로 장식한다.


길고 긴 자카르타 생활. 언젠가는 종지부를 찍을 텐데, 아직 기약 없는 이 열대 생활이 지겨워질 때면 날씨에 맞는 칵테일로 지루함을 달래는 방법을 익히는 중이다. 문제는 ‘무책임한 음주(Drink Irresponsibly)”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얼마나 Spill and Still을 오랫동안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카르타에서 가장 아끼는 바로 이미 내 마음속에 등극했고, 내가 이 쾌쾌한 도시와 작별할 때까지 일주일에 한 번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들러 케니와 야콥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배우고, 이 흥미로운 과정을 반복하며 이야기 소재를 발견하고 보관할 것 같다. 


참고 문헌

1. 브램블 기원

https://en.wikipedia.org/wiki/Bramble_(cocktail)#:~:text=The%20Bramble%20was%20created%20in,the%20inspiration%20for%20the%20Bramble.


2. 딕 브레드셀 관련 기사

https://www.nytimes.com/2016/03/03/world/europe/dick-bradsell-bartender-who-helped-revive-london-cocktail-scene-dies-at-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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