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나는 항상 마무리가 어렵다. 글을 쓸 때도, 보고서를 마무리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관심없는 하찮은 대학교, 대학원 논문 쓸 때도 이상하게 마무리가 어려워서 항상 2% 모자란다는 평을 듣곤 했다. 이런 내 마무리의 무능력은 인간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마는데,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갑자기 찾아온 상대방으로부터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무기력 또는 설렘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말도 안되는 죄명을 씌워 내 싸구려 마음 탓을 애꿎은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일방적으로 인간관계를 종료하곤 했었다. - 그러나, 이 동사를 과거형으로 써야 할지 현재형으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 - 그래서, 나는 정말 공감능력이 부족한 경미한 소시오패스가 아닌가란 생각도 해보았다.
관계+마무리=무성립
이 관계라는 것은 비단 연인이라는 특수함 - 억지로라도 애정을 쏟아야 하는 상당히 피곤한- 을 부여한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들어온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를 모두 의미한다.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 갑자기 온실 같은 가족 울타리를 벗어나 잘 알지 못하는 여타 아동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초등학교라는 공간에서부터 나는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웠다. 마치 먹지 못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고 하는 마녀의 소굴같은 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마주하는 온갖 관계들이 처음엔 들뜨고 설레었지만, 유효기간이 매우 짧은 내 싸구려 마음에서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무늬만 잠적이라는 결단을 내린 채 출석일수만 겨우 채운 후 꿈을 이루겠다는 새로운 핑계거리를 만들어 도망치듯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
물론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다지 추억돋는 교우관계를 형성하여 생활한 적은 없다. 마치 친구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인식된 생활을 꽤 오래 했으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수업을 위주로 골라들을 수 있는 대학시절엔 무조건 '그룹 과제는 피하기'가 수업 선택 기준이었고,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수업은 비인기 과목이 수두룩했다. 그룹 과제가 죽기만큼 싫어서 논문을 쓰기 위해 고리타분한 언어학 수업을 자진해서 들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규모가 작은 수업에서도 일말의 상호작용은 필요했고, 일부와는 수업 시간 이외에도 공통의 목적을 달성할 일 없는 여가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이마저도 힘들어서 서서히 연락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쥐도새도 모르게 애꿎은 전화번호만 수차례 바꾸는 희한한 인간이 되어갔다. 어쨌든 다 핑계에 불과하고, 결국 되돌아보면 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리고 머릿속에 상대방을 지우며 리셋하는 습관이 생활화된 그야말로 반사회적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 주위 어른이라는 자들, 그리고 책 속에 해학과 지혜를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는 작가들은 인생에서 진정한 친구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기에,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서로 타협하고 맞춰나가는 것이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어도 내 마음과 몸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사교를 강요받는 의무교육 체재에서는 내게 너무나 힘든 고문이었다. 지금은 내 취사선택으로 관계 맺기가 가능한 법적 성인이 되었으니, 정말 홀가분 하지만, 아주 가끔 나는 왜 이런 머리통과 마음씨를 가졌는지 도통 모르겠다며 자가당착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내게 있어 혼자 지내는 시간이란 매우 소중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양이며, 이 양을 홀로 오롯이 감당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팀워크가 거의 필요 없고 거의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승진이라는 쓸데없는 굴레에 허우적댈 필요 없는 나름 타협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기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용자가 원하는 보고서를 뚝딱뚝딱 제시간에 양껏 만들어내면 그만인 이 직업은 나 같은 인간에게 있어 천직임에 분명하고, 이제 이 짓을 거의 10년째 하는 중이다.
아동적 성인
영어로 Superficial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표면적인’이라는 다소 애매한 뜻이지만, 나는 이 말을 ‘성숙하게 가식적인’으로 나는 해석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34살이 되도록 포커페이스를 할 수 없는 얄팍하고 얄궅은 아동의 이기적이고 고집불통의 마음씨가 지배하며, 중력의 힘에 거스르지 못한 내 몸뚱이만 늙어버린 무늬만 법적 성인이다. 내 다음 세대의 안녕을 생각하고 고민할 정도로 성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 인생 후배들에게 조언이랍시고 지혜나 덕담을 나눌 수 있는 어른이랑은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며, 심지어 상상만해도 오글거린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어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설익은 노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 마음씨를 먼 훗날까지 계속해서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내 생각에 사회가 정한 어른, 아니 기득권층이 정해놓은 이미지의 멋져 보이는 성인이 되려면 우선 superficial이 얼굴과 자세에 드리워져야 그 다음 단계가 가능하다. 빈말도 할 줄 알고, 상황에 대해 슈가코팅도 할 줄 알며, 상대방의 공격적 발언도 빈정대지 않고 웃으며 돌려 깔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Kill with smile 이란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 그들을 사람들은 출세했다고 표현하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인이라고 하지 않나? 거기에다가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완벽한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인간상이 만들어진다.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어울릴 수 없는 남루함과 어색함을 디폴드로 가진 자이며, 빈말은 뭔지도 잘 모르기에 입 발린 소리는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마음은 없고, 한국이 해줄 수 없다면 보편적 소득(Universal Income) 제공이 가능한 국가로 이민 가서 아주 기본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보금자리에서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확보해 간간히 채집생활을 할 수 있는 숲이나 산속 마을에서 거처를 마련한 후, 하루 종일 책과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먹고 싶은 거 기분에 따라 만들어 먹고살다가 생과의 이별을 꿈꾼다. 북적거리는 도시의 뽐내는 일원이 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가 죽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 자신을 묘사할 수 있는 완벽한 한 마디 또는 한 단어만 빈 공책에 적어놓고 세상을 뜨는 것,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대지로 돌아가 거름이 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자 하루하루 불만 투성인 날들을 나름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동력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했던/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방법, 베스퍼
물론, 나도 사랑했던 사람이 있고,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이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우정을 함께 가꾸어가는 친구들이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직장 동료들과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지인들이 주변에 있다. - 내가 완전한 소시오패스라면 사실 이런 글을 브런치와 같은 대중에 공개된 공간에 남기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매일’을 같이 하기에는 조금 힘들다. 그러기에 이 ‘매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들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30대 중반이 되도록 동창회 같은 일부 자랑이 필요한 Superficial 한 사교모임은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내가 즐길 수 있는 동창회란 혼자 있는 시간들을 가끔 할애하여 내가 시기별로 좋아했던 친구들과 연인들을 떠올리고 그들과 보냈던 시간들, 그들의 얼굴과 말소리를 떠올리는 생각하는 그런 시간인 것 같다.
동행인 없이 혼자서 아주 조용한 비밀스러운 바에 앉아 혼자서 이 모든 생각 작업을 하기에 적절한 칵테일은 바로 베스퍼(Vesper)다.
베스퍼는 내가 이안 플레밍의 007 소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 등장하는 매우 유명한 칵테일이다. 영국 재무부 직원으로 위장한 또다른 여성 비밀 요원 베스퍼 린드(Vesper Lynd)와 함께 카지노 로얄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007가 포커를 두며,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바텐더를 아주 거만한 자세로 불러 즉흥적으로 주문한 칵테일이 바로 베스퍼. 진 마티니 편에도 짤막하게 소개된 바 있는 그 칵테일이 바로 베스퍼다. 상당히 드라이한 (달콤함이 적으면 적을수록 드라이하다고 표현) 칵테일이기에 남성적이고, 이 칵테일은 마티니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진과, 릴렛(숙성 와인 주 재료인 식전 주)가 주 재료이며, 레몬 껍질로 잔을 꼼꼼하게 코팅하는 것이 관건이다.
베스퍼는 마티니 베리에이션이고, 제임스 본드 또는 더블 오 세븐(007)의 창작 소설가 이안 플레밍(Ian Flemming)이 만들었다고 했다고 과언이 아닌 플레밍에 의해 플레밍를 위한 플레밍의 마티니이다. 베스퍼는 다부진 하관이 퍽이나 매력적인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 주연의 카지노 로얄(2006년)에 등장하는데, 상대방의 심리를 제압하는 것이 게임의 전부인 포커 게임에서 속된 말로 뻐기기 위해 바텐더를 불러 이렇게 주문한다.
베스퍼를 마시는 007 (출처: Business Insider)
고든 (진) 3샷, 보드카 1샷, 키나 릴렛(Kina Lillet)1/2샷, 얼음처럼 차갑게 될 때까지 흔든 후, 길고 날씬한 레몬 껍질로 장식하도록, 알겠나?
하지만 몇몇 프로들은 007의 재수없는 잘난체가 허풍 이상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케니 선생님은 흔들게 되면, 그 과정 속에서 얼음이 깨져 술의 고유한 맛을 흐리듯 희석되기 때문에, 흔들지 않고 섞는 게 (stir) 더욱 더 감미로운 한 잔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캐스터넷츠와 같은 경쾌한 소리와 현란한 손동작을 요구하는 셰이킹보다 다도 하듯 섞는 칵테일 제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이 섞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휙휙 돌리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얼음의 양, 온도, 그리고 속도 등 고난도의 테크닉 그리고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비교 차 두 잔을 마셔보았는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셰이커로 만든 칵테일이 더욱더 차갑다고 해야 할까. 흔드는 과정에서 얼음이 조각나기 때문에 술과 섞이면서 제 마음대로 희석되는듯한 느낌이다. 반면, 스털링을 하니 조금 더 마티니와 유사한 형태의 투명하고 고급스러운 칵테일이 한 잔같았다.
독주(spirit)를 두 종류나 넣어서 만드는 베스퍼에는 감초 같은 맛을 구현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007은 사람들 앞에서 폼 좀 잡아볼 겸 조금은 생소한 릴렛(lillet)을 1/2샷 넣어달라고 요구하는데, 이 릴렛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의 뽀덴삭(Podensac)이 원산지인 식전주(aperitif)다. 보르도 지역의 여러 동네에도 나온 와인 85%을 오크통에 넣어 증류하는 술로, 풍미가 흡사 와인과 비슷한다. 그리고 이 술의 원래 이름이 키나(kina) 릴렛(Lillet)인데, 여기서 키나는 퀴닌(Quinine)이라는 쌉싸름한 향신료를 넣었다는 의미이다. 이 퀴닌은 토닉워터의 주 재료이기도 한다. 하지만 릴렛이 가격도 제법 나가고 구하기 어려울 때는 코키 아메리카노(CoCchi Americano)라는 비슷한 식전주 와인을 사용하는데, 자카르타에서는 수입하는 것들 그리고 그 물건이 술이면 뭐든 비싸기에 릴렛이나 코끼나 비싸긴 매 한 가지다.
베스퍼(ABV: 39-40%)는 마티니보다 훨씬 도수가 높은 칵테일이기 때문에 벌컥벌컥 목을 제끼면서 마실 수 없다.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알코올 분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동양 여자인 내가 감히 베스퍼를 원샷한다는 것은 그 다음 날 숙취와 마주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우어(sour) 칵테일과 달리 베스만큼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마시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내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의 이별을 유도했던 친구들과 연인들을 생각하며 나름의 속죄를 구하곤 한다. 물론 그들을 다시 볼 용기는 1도 없기에 아주 비겁한 방법으로 이렇게 알코올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베스퍼는 나에게 있어 ‘마무리’를 대체할 수 있는 칵테일이다.
베스퍼 레시피
[베스퍼 재료]
진 45ml (개인적으로 Beefeater를 사용한다. 꼭 런던 드라이 진을 사용할 것.)
보드카 15ml (스미노프 또는 그레이 구스도 괜찮다.)
릴렛 또는 꼬키 아메리카노 10ml
냉동고에 넣어둔 차가운 믹싱 유리잔에 진, 보드카, 릴렛을 차례대로 넣고, 얼음을 빼곡히 넣어 바 스푼으로 10번 정도 저어주면 완성된다. 레몬 껍질 오일로 잔 전체를 코팅한 후, 트위스트 하여 장식한다.
나처럼 마무리가 서툴고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강렬한 드라이한 맛을 음미하며, 나 역시 베스퍼를 마실 때마다 미천하고 허접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도 요즘에는 더욱더 자주 하는 것 같다.
이제 칵테일 편도 슬슬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인데, 이번 글쓰기 작업만큼은 나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다짐하며, 베스퍼를 한잔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