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타인,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여기서의 사랑이란 말은 추상적이며, 정의하기 힘든 단어인 것은 물론 제아무리 존경받은 철학자라고 할지라도 누구 하나 속 시원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그래서 인류가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탐구해야 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에 대한 나름의 정의와 구분은 존재한다. 종족보존으로 생존했던 원시 시대 인간들의 육체행위가 꽤나 야만적으로 보였는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랑’을 탐구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플라토닉 러브, 현대에서는 이 말이 육체적인 욕망을 초월한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데, 플라톤은 향연(Symposium)이란 그의 저서에서 러브(love)를 개념화하면서 에로스,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라는 3가지 종류 또는 3단계의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영어로 사랑, 즉 러브는 산스크리트어 루브흐(Lubh) 즉 욕망이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고상한 플라톤이 보기엔 이 욕망이라는 날 것의 러브가 퍽이나 천박해 보였는지, 이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꽤나 머리를 쓴 것 같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사랑’에 대한 대 전제는 “매우 자연스럽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에로스에서 비롯된 사랑이라는 감정의 시작은 필리아로 그리고 더 나아가 아가페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육체적이며 욕망이 깃든 사랑을 에로스, (플라토닉의 관점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일컫는다.) 친근함과 존경 그리고 감사의 마음이 지배하는 필리아 (끈끈한 우정, 가족 간의 사랑 등이 포함), 그리고 그 이상을 초월하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는 초고차원적인 사랑, 즉 아가페가 있다고 한다.
나는 플라톤이 설명한 사랑의 개념에 대해 일부는 이해는 하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 고대 그리스는 아무래도 계급사회였기에 지금보다는 조금 더 획일화된 또는 단순한 형태의 관계들을 사랑으로 정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렵다.
생존을 위해 수렵채집 그리고 사냥 생활로 삶 전체를 살아갔던 인류의 조상들은 분명 종족번식이라는 절대 목표를 위해 마치 동물들이 교미하듯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에로스에 집중한 사랑의 행위를 나누었을 것이다. 문자가 만들어지고 계급사회가 형성되었을 때는 원시시대보다는 덜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가문의 혈통을 이어간다는 명목 하에 정략이라는 관계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운명을 받아 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고, 결국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정략이라는 짜인 틀에서 예외가 만들어지고, 계급 간의 투쟁 등을 겪으면서 인간은 또다시 기득권들이 만들어 놓은 정연한 질서를 파괴한 채 ‘좋아하는 감정’이 이끄는 상대를 계급과 신분에 상관없이 비밀스럽게 만나기 시작하여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뒤로한 채, 누군가를 좋아하다는 감정은 도대체 왜 생기는 것이며, 이 사랑이라는 큰 굴레 속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말들, 예를 들면 ‘첫눈에 반하다’ 라거나 ‘상사병’이라고 하는 것들 그리고 ‘이상형’이라고 하는 것들이 만들어졌을 테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달콤한 이런 말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오감과 연결된 상당히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말들이 다수를 이루는 것 같다.
사랑에 대한 현대철학
사랑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한 스위스 출신의 영국인 철학자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첫 저술인 Essay in Love(1993년작)이라는 픽션식 에세이를 통해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비행기 안에서 순식간에 빠지는 사랑, 그리고 헤어지는 그 과정들을 낱낱이 분석하고 있다. 마치 소심하고 찌질한 남자 주인공일 것은 보통(Botton)은 이 책으로 ‘현대의 철학가’라는 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온갖 감정들을 매우 깊이 분석하고 있지만 간단히 말해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갈구해오던 나도 알지 못한 인정과 관심을 온전히 받을 때 희열을 느끼며, 이 것이 단단히 그리고 오래가면 사랑이라는 것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통이 그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나는 그가 완전히 사랑에 대해서 분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는데, 이것을 과연 일관되게 분석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내 생각
사랑이라는 씨앗이 싹트는 것은 바로 관심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궁금해지는 대상이 있다. 상대방도 내 관심에 응해주어 그것이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그것은 쌍방 합의하에 연애 또는 그 이상의 것, 즉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짝 사랑이 되거나 관심이 풀 죽어 단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자신감이 없어서 내 마음대로 좋아하고, 갑자기 찾아온 싫증 때문에 어찌할 바 모른 채 마음대로 감정 종료 버튼을 눌렀던 어린 시절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낯 간지러울 정도의 희한한 짝사랑을 많이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상대를 좋아한 게 시작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함으로써 가능했던 온갖 상상 그리고 상상을 하면서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주는 무형적 희열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상상력이 힘들어지고 생존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면서부터는 누군가를 열심히 좋아해 본 적은 별로 없다. 과거 나는 인생에서 미래를 시제의 우선순위로 두곤 했는데, 20대 중반서부터는 과거와 미래는 카펫 아래로 밀어 넣고 ‘현재(present)’에 신경 쓰는 사람이 되면서부터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조금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며, 그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감에 며칠을 허비하는 등 상당히 성가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 행위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 그리고 인생관이 깃든 그 사람의 역사를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그야말로 대단한 다짐과 포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용기가 가상한 인간이 아니며, 관심 밖의 인물로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다 새빨간 거짓말 또는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뻥치지 마’라고 웃어넘기곤 했는데, 그러다가 자연스러웠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고 어색해지면 그 관계를 일방적으로 정리하고 도망쳤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만 가꿀 줄 알았지 이 것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쑥스럽고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불가항력적인 중력의 힘에 이끌려 쌍방의 관심 속에서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롤러코스터 같은 마음속 요동으로 어찌할 바 모르며, 하루에도 하늘과 땅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
내가 프롤로그에서 칵테일 이야기를 쓰기 시작 한 이유를 잠깐 밝힌 적이 있다. ‘자카르타에 도망치듯 오게 한’ 사연이 있었다고. 그렇다. 8년 전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에로스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가 있었는데, 그것이 갑자기 깨져버려 내 마음과 정신은 산산조각 나버린 유리병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깨진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유리병을 다시 만들지 아니면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유리병을 만들지 몇 달을 고민하던 차에 버리기로 결심하고, 유리병 따위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며 자카르타로 왔다.
결심을 내리기 전 나는 그를 잊기 위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며칠을 잠적했다. 그와 함께 읽었던 책,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날 밤 한 겨울 여행자가 (the Winter’s Night Traveller)’ 를 그에게 택배로 돌려주고,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한 채 그것도 안 되겠다 싶어 어김없이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그는 나에게 핸드릭스 진(Hendrick’s Gin)을 처음 맛보게 해 준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절대 사랑한다는 소리를 않았다. 나는 이 말을 듣지 못한 게 꽤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 역시 ‘사랑한다'는 매우 진부한 소리를 갈구하는 못난 인간이 되어갔는데, 그는 나에게 차마 ‘사랑한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에게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이 있던 것. 한국이 외국이었던 그는, 외국에서 맛 본 자유를 온전히 만끽하는 그 와중에 어쩌다 보니 내가 그 주위에 있었고, 우리는 서로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자유 속에서 파묻힌 그가 정신차린 어느 날 나에게 “내 여자 친구가 한국에 오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 그렇구나.”란 말과 함께 억지 미소를 지으며, 핸드릭스 진토닉을 단숨에 마신 후, 집에 가겠다고 자리를 떴다. 다행히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바 문을 나서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주 조용히 시끌벅적한 이태원의 이름 모를 바를 나섰다. 그렇게 동시에 서로를 좋아해서 연애로 발전했던 그 강렬했던 경험이 나에게는 큰 오명과 죄책감으로 남아있었고, 그는 나에게 그 말을 한 이후, 한 번 더 만나자고 매일같이 연락했지만 나는 대답 하지 않은 채 그냥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자체 판단과 함께 단번에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그와 다녔던 서울 시내 곳곳이 참을 수없이 힘들어서 어디론가 가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내 하루하루를 지배했고, 나는 그렇게 자카르타로 도망쳤다.
자카르타, 내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이 거대 카오스같은 도시에서 그의 얼굴과 온기 그리고 즐거웠던 시간들의 기억들은 서서히 파도에 휩쓸린 모래 위 덧없는 글씨처럼 사라졌고, 나는 이 곳에서 생각 하지도 못한 영혼의 단짝을 만나 지금 함께 지내고 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열정적인 시간들 속에서 나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잘생긴 그의 얼굴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리고 서로가 나누었던 호흡들이 내 오감을 지배한 것은 맞지만, 그를 대할 때마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내가 보여서 그와 있던 시간들은 설렘 이상 이하도 아닌 계속해서 움직이는 메트로놈과도 같았다. 분명 무언가에 씌워서 아니면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에로스의 감정을 느껴보자는 나의 이기심으로 그를 대했었을 수도 있다. 나의 이기적인 호기심이 충족되었으니 그가 미루었던 진실을 내게 힘겹게 꺼내놓았을 때 나는 아마도 ‘이때다. 이 자식이랑 헤어질 절호의 찬스’라며 내가 당시에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 한 구석에서 쾌재를 불렀던 거 같다. 더 이상 성가신 감정이 귀찮아졌는데 어찌할 바 모르다가 드디어 정리할 기회가 생겼으니.
그렇게 바에서 내 마음대로 헤어진 뒤, 아주 가끔 그가 생각났다. 그렇다고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빨리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인간인지 새삼 놀라웠고, 아마도 내 인생에서 연애는 그냥 가벼운 불장난에 그치지 않겠거니 그런 생각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분노했고, 그가 행복하지 않길 바랬지만, 나는 그렇게 못된 인간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을 내게 이야기 해준 그의 용기에 나는 비겁하게 사라지는 방법을 선택했으니, 친구라는 가능성은 내가 묵살한 것이지 그가 아니다.
내 짝꿍
영혼의 짝꿍은 사랑하는 데까지도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에게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굉장히 어색하다. 대신 내 짝꿍은 마치 잃어버린 쌍둥이를 지구 반대편에서 찾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편안한 사람이다. 사랑이라는 눈먼 달콤함이 지배하는 사이라기보다는 평생을 함께해도 지루하지 않고 편안하고 믿을 수 있는 상대라는 점, 그리고 내가 무슨 난리를 피워도 나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점이 욕망의 덫에 스스로를 옭아매어 이기적으로 로맨스를 나누는 상대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하고, 매일 아침 나의 짝꿍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해주는 것, 내 짝꿍을 위해서라면 손해 따위는 사전에 없는 단어로 삼는 것, 이것이 모두 가능한 것이 바로 내가 정의한 사랑이다.
불같은 연애는 금방 지치기 쉽다. 그 안에서는 분명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낄 수 있고, 본인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찌질함과 졸렬함을 마주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모습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지치지 않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열정적인 연애가 체질에 맞겠지만, 나는 차마 나의 찌질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애는 어느 정도의 속박 또는 소유 심리가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는 인간이다. 우리는 서로를 속박하지 않는다. 내 짝꿍이 옆에 있다면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 현재의 나, 그리고 내가 될 수 있는 사람, 이 세 박자가 매우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무엇을 하든 상대방을 믿는 것, 절대 의심하지 않는 것,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의 뮤지컬 플로로도라(FLORODORA)
이런 나의 어쭙잖은 사랑이야기의 해피엔딩.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행복한 상태를 표현하는 칵테일로는 플로라도라(Floradora)가 제격이다. 진, 진저비어, 라즈베리 시럽을 주재료로 만든 청량하고 진한 이 칵테일은 1899년 런던 Lyric 극장에서 초연된 뮤지컬 플로로도라(Florodora)의 이름을 따서 탄생한 칵테일이다. 플로로도라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흥행한 뮤지컬로, 마치 요즘 시대로 치면 천만 영화 또는 시청률 좋은 드라마처럼 뉴욕 사교계에서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뮤지컬이라고 한다.
플로로도라라는 향료 재배 원산지인 필리핀의 작은 섬 플로로도라 섬에서의 치정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대부분의 히트작이 그렇듯 수많은 우여곡절을 넘긴 남녀가 진정한 사랑을 찾고 결국 행복하게 산다는 진부한 이야기다. 줄거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필리핀에서 플로로도라 향료 공장을 운영하는 길펜(Gilfain)이라는 미국인은 영국 출신의 순진한 처녀 들로레스(Delores)를 속여 공장을 빼앗아 운영하는 자이다. 세월이 지난 후 필리핀에 도착한 프랭크(Frank)라는 영국 귀족은 들로레스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 둘의 관계를 알아챈 길펜이 서둘러 들로레스와 결혼하려고 온갖 수를 다 쓴다. 그러나 결국 프랭크와 들로레스가 서로의 사랑과 재산 그리고 명예를 되찾고 결혼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뮤지컬을 실제로 본 적은 없는데, 유튜브를 뒤적거리다 보니, 사교댄스와 콰르텟이 꽤 멋지다.
플로로도라는 1900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성황리에 초연을 마치고 그 후 500회 넘는 이상의 공연으로 흥행몰이를 한다. 당대 미국 대통령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주로 마셨던 칵테일 종류를 비롯한 칵테일에 숨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루는 Eric Felton의 How’s Your Drink? (2007년) 책에 따르면, 플로로도라가 브로드웨이에서 흥행하고 있을 당시 어느 레스토랑의 웨이터 주임 (a maitre d’ (주로 레스토랑에서는 여성이 웨이터 주임 역할을 한다.))이 손님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새로운 칵테일을 만들어 낼 것을 바텐더에게 주문해서 플로라도라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플로라도라 레시피
[플로라도라 재료]
핸드릭스 진 45ml (런던 드라이 진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데, 나는 라즈베리 시럼 또는 샴보드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로즈워터로 향료를 가미한 핸드릭스 진을 사용한다)
진저시럽 15ml (일반 시럽으로 대체 가능)
라임주스 15ml
생 라즈베리 2개
진저에일 350ml짜리 1병 (fever tree)
진저에일을 제외한 나머지 재료를 셰이커에 넣고 섞은 후, 차가운 잔에 따른다. 진저에일로 잔을 채운다.
플로라도라는 그냥 콜린스 잔에 재료들을 차례대로 넣고 진저에일로 채우는 방법이 있고, 사우어 베이스 칵테일처럼 진저에일을 뺀 나머지 재료들을 셰이커에 넣은 후 진저에일로 채우는 방법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라즈베리를 넣고 셰이커로 섞은 후 진저에일로 채우는 방법을 선호한다.
달콤하고 쓴맛 그리고 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플로라도라는 땀으로 흠뻑젖은 여름 날,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고 그 기억 속 나의 온전치 못한 모습을 떠올리며,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칵테일로 충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를 정말 싫어한다. 그래도 비포 선라이즈와 선셋은 그 분위기와 대사들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보았는데, 9년 만에 파리에서 재회한 셀린과 제시,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탄 그 둘 사이 미묘한 감정들 속에서 셀린은 제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어. 나랑 사랑을 나누었던 모든 사람들을 나는 저마다의 방법으로 기억하고 있다.”라고. 셀린의 아름다운 대사처럼, 사랑이란 획일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상당히 복잡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감정이자 개념이다. 먼 훗날 인간이 멸망할 때, 우리가 공룡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를 지배할 고차원적인 생물들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을 좋아하던' 종족으로 기억하리라 믿는다.
아직도 나는 사랑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내린 정의는 분명 시간이 흐르면서 변할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진부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나를 비롯한 모든 인간은 내가 그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결심할 때 용기를 얻고, 사랑의 시작, 과정 그리고 종료를 겪으면서 힘들지만 감히 포기할 수 없기에 사랑이란 결국 부서질듯 아름다운 것임을 그리고 절대 정복할 수 없는 거대한 명제임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