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칵테일 애호가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물론 그다지 완벽한 미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평범한 애송이에 불과하기에 '칵테일'을 가지고 20편의 글을 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가 무턱대고 좋아해서 건방지게 덤볐던 이 주제가 어떨 때는 힘에 겨워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꾸역꾸역 쥐어짜 내기도 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두서없이 좋아하기만 했던 '칵테일'이라는 주종에 대해 나름의 조사 그리고 관련 서적을 읽어 내가 습득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보를 축적하고 나의 언어로 이해했다는 측면이 즐거웠고,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이 칵테일 세계를 질리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2021년 5월, 2년 만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20세기 이후 인간이 거의 처음으로 겪고 있는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3주 동안 '자가격리'라는 새로운 경험을 해보았다. 매일 입버릇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던 터라 나 스스로도 과연 내가 외부와의 접촉 없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단절' 하며 협소한 공간에서 3주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란 기대서린 의문이 걱정보다 앞섰다.
콧구멍과 목구멍을 뻣뻣한 플라스틱 뭉치로 쑤셔대는 일명 PCR 검사는 유전자 증폭 검사인데, 이 행위를 한 달 동안 6번을 했다. 마치 양치를 하듯 습관성이 되어버린 이 검사방법도 처음에는 불쾌하였지만 나는 모든 변화에 금방 적응하는 편에 속하는 인간이라 그런지 이제는 괜찮고,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추가적인 행정 및 의료 절차를 마치고, 고국이라는 내 나라 한국에 2년 만에 입국했다. 2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차가운 5월 1일 새벽 6시의 차가운 아침 공기가 낯설었고, 나는 이 낯섦과 친해질 겨를도 없이 마치 캔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정체불명의 재료가 된 마냥 방호복을 입은 공항 직원분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내 생각 따위는 필요 없었고, 그냥 '하라는 대로'만 잘 따라서 하면 무사하게 검역과 입국심사를 마칠 수 있다. 그리고, '방역 택시'라는 값비싼 운송수단에 몸을 실어 자가격리 숙소로 입실하였다.
3호선 대화역 바로 앞에 있는 10평 남짓의 원룸 오피스텔. 이 곳이 내가 2주 동안 지냈던 자가격리 숙소이다. 마치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현관문도 열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통제에 갇힌채,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처럼 감시받는 생활을 하였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이 자가격리 시간이 즐거웠다. 온전하게 혼자 있는 이 시간 속에서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 책을 단 숨에 읽기도 하고, 자카르타에서 읽다만 오웰의 동물농장도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아시아 독립영화도 매일같이 보았는데, 마치 무엇이라도 좋으니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던 밑도 끝도 없는 청소년 시절의 나 자신이 문득 떠올라, 비밀스러운 행복의 공기와 분위기가 너무나 소중했다. 심지어 이 시간이 2주 이상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자가격리라는 특수한 시간이 줄 수 있는 기대감은 바로 해제되면 가고 싶은 곳 들을 미리 물색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격리 기간 동안 마실 칵테일을 가지고 가긴 했지만, 확실히 칵테일은 멋진 잔에 마시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고 나도 시각에 지배를 굉장히 많이 받는 자이기에 분위기가 빠진 칵테일을 마시면 마실수록 뭔가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서울에선 어떤 바에 가야 할 것인가란 나의 행복한 고민에 나는 제스트(Zest)와 바참(Bar Cham)을 방문해야겠단 생각을 했고, 해제 뒤 며칠 후 바 영업이 시작되자마자 이 두 곳을 차례대로 방문하여 혼술 큰 손을 자랑했다.
격리기간 동안 마신 칵테일 로제타 스톤
이 두 곳은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는데, 우선 공통점이라면 기존의 형식을 깬 상당히 캐주얼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바였고, 클래식 칵테일보다는 그들이 직접 공수한 전통주 또는 직접 만든 음료와 재료에 집중한 시그니처 칵테일 제조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지만, 제스트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고, 바참은 북쪽에 있는데, 제스트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바 전체의 분위기가 주황색과 우드톤으로 꾸며진 미니멀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소였던 반면, 바참은 서촌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한옥을 개조한 쾌활한 느낌의 바였다.
이 두 곳 모두 내가 평소에 맛보던 칵테일과는 사뭇 다른 '깔끔함'과 '부드러움'이 칵테일의 특징이었다. 제스트에서 직접 재증류하여 만든 드라이 진을 주 재료로 한 드라이 마니티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레몬밤(lemon balm)을 가니시로 하였는데, 기존 마티니와 달리 청량하고 상큼함이 코끝과 윗입술 아래를 매혹시켰고, 넘어가는 끝 맛도 고급스러웠다. 마치 허브차를 연상케하는 부드러움이 지금도 혀끝에서 맴돈다. 생각 같아서는 3잔 정도 마시고 싶었는데, 저녁에 약속도 있고,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술값으로 탕진하기 싫어서 그냥 1잔으로 스스로를 자제했다.
바 참에서는 정신 줄 놓고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서 딱히 떠오르는 한 잔이 없는데, 그래도 화이트레이디가 좋았던 것 같다. 이 곳 역시 계란 흰자 없이 꾸안트로, 드라이 진 그리고 레몬즙을 주 재료로 하기에 늦 봄의 밤과 어울리는 한 잔이었고, 화이트레이디의 차가운 온도 그리고 이 오묘한 술이 담긴 잔도 아름다웠다.
(왼) 제스트의 드라이 마티니, (오) 바참의 화이트 레이디
한국에서는 '칵테일'하면 뭔가 어렵고 비쌀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가격이 일반 한 끼 식사보다는 더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칵테일은 와인의 고상함 또는 양주(주로 위스키로 통용되는 한국의 '양주' 문화를 생각해보았을 때) 보다 친해지기 쉬운 달콤함과 친근감이 있다. 이 두 곳을 방문해보니 맛과 특성에 집중한 한국만의 '칵테일' 문화가 조성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들 한국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로 여기곤 하는데, 이 '좋아함'의 행위에는 무조건 빨리 많이 취하도록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도 용서해준다는 변태적인 관대함이 일부 내포되어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엔 '적당히' 나쁜 것들은 존재하지 않고, 의학계에서도 '적당한 음주'는 사실상 없으며, 아세트알데하이드라는 알코올에 의해 발생되는 화학성분을 사람 체질에 따라 빨리 분해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류되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라는 화학 기호 식품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건강에 전혀 이롭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많이 마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호식품이라고 볼 수 있다. '즐기는 방법'에는 물론 양껏 마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술의 주원료, 곡물, 과일, 채소, 견과류 등 다양한 맛을 혀 속에서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것도 방법이다. 나 역시 하마처럼 술을 마시는 희한한 버릇이 들어 가끔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데,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오감이 확 트이는 경험을 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면, 슬프고 기운이 없을 때 그 음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술, 정확히 말해 칵테일을 그렇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칵테일은 정말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는 그 자체로 장르에 버금간다. 비율과 술의 종류에 따라 앞으로도 탄생할 칵테일은 아마도 새롭게 태어날 아이보다도 많을 것이다. 내 간과 심장이 언제까지 술을 수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약 20편의 글을 쓰고, 글을 쓴다는 핑계로 바를 내 집처럼 수시로 드나들면서 마치 금주령 시기에 성행하던 스픽이지바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팬데믹은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제약이 주는 것은 사실이고, 내가 배부른 소리나 하는 재수 없는 부르주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동이 제약된 현재 상태에서 주변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어렴풋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대해 집중하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 칵테일이 그러했다. 글을 쓰면서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 사랑했던 감정을 깨워보기도 하고, 누군가를 자발적으로 그리워하며 온전히 그 사람만을 생각하며 매 순간을 타의가 아닌 자의로 그리고 단연 즐겁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쁨과 환희를 느끼면서 진심을 다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내가 앞으로 어떤 글을 무슨 주제로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칵테일 편과 슬슬 정리를 할 때가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