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네 일을 진지하게(seriously) 생각하지 않는 거 같은데, 매사가 그런 거 같아. 우리 관계도."
이 말과 함께 옅은 미소로 오랫동안 나의 무기력한 눈동자를 쳐다본 그는 내 얼굴을 피하더니, 그냥 다시 꼭 안았다. 그 포옹이 너무강력한 나머지 마치 심하게 야윈 나의 몸통에서 이제는 훤히 드러난 갈비뼈가 그의 건강하고 탄력있는 피부에 온전히 닿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택시를 타고 그를 공항으로 배웅해 주러 가는 그날 저녁, "우리는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잖아?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고 책임 또는 약속 같은 거 안 해도되는 그런 자유로운 사이. 우린 사이야. 관계가 아니라."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촌스럽기 그지없고 난잡하기 짝이 없는 자카르타 수디르만 거리의 형형색색 전광판을 보며, 내 얼굴을 피하기만 했을뿐. 하지만, 그의 손은 심각하게 건조해진 나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규정한 단순한 '사이'를 애써 부정하려 한 듯 어쨌든 유의미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임을 무언의 동작으로 주입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고, 그날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나조차도 어쩔 수 없는 변덕인데, 충동적이고 무질서한 이 감정 불구는 어김없이 혼자 있는 밤, 특히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 그 증세가 심해진다. 그래서 그에게 무턱대고 인스타그램 릴스에 무작위로 소개되는 감정을 호소하는 동영상을 DM으로 보냈다. 아주 여러 번. 그리고 보고 싶다고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다가, 다음 날 아침 그가 읽지 않으면 서둘러 지우기 일수였다. 이렇게 내가 발광적 감정 추태를 부리는 것이 지겨웠는지 그는 단 한 번의 '반응'을 보였을 뿐 나의 이상 행동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를 실제로 보면 나는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이고,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네가 날 좋아할 리 없잖아? 너는 이미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만큼 부서지지 않아서, 그래서 나를 가끔 찾는 거니깐. 매일 안정적이면 재미없으니.'란 요지로 이야기하며 그가 나에게 좋아하는 표현을 여러 방식으로 할 때마다 부정한다. 너랑 나 사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그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이제 우린 서로를 잊지 못하는 나약한 로맨스에 굴복되고 말 것이며, 그건 내가 그리고 너도 원하는 바가 아니란 점을 수차례 상기시킨다. 마치 가스라이팅을 하듯.
그런데, 그의 얼굴을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날들이 다가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를 기억하는 행동에 집착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보낸 이기적인 독백과도 같은 메시지에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고, 나는 이 무반응에 금방 시무룩해진다. 그러다가 이성을 챙겨할 상황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그를 철저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채 순간의 일에 매진한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되었건, 예컨데 청소가 되었건, 요리가 되었건, 러닝머신에게 미친 듯이 오르막 길을 오르건, 나는 그 행동 하나에 온전히 집중한 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의 잔상을 서서히 지운다. 미친 듯 노력하고 다짐해도 도무지 되지 않았던 그 일이 이상하게 나의 손발 그리고 몸통이 움직이는 어떤 일을 할 때 자연스레 사라진다. 심하게 엄살을 부렸지만 아무것도 아닌 꾀병으로 판명 난 것처럼 말이다. 그냥 나 자신이 우스울 뿐이다.
그에게 DM과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지 일주일이 넘었다. 충동장애를 안고 있는 나로선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자제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나마 사회적이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는 나같은 시커먼 영혼은 애써 모른척한 채 그렇게 지낼 거라 생각한다. 나 따위는 기억 한편에 묻어놓고.
나의 충동적 성향이 나이가 갈수록 고요함 속에서 짙어지는데, 이성적으로는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조화로운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런 기질들은 내가 안간힘을 써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충동적인 마음 때문에 시작된 나와 그의 관계적 사이를 미련 없이 떠나보내지도 못할 거면서 진흙탕 속에 계속 허우적 되는 이 감정이 얼마나 나를 갉아먹는 행위인지 매일같이 느끼면서도 자유롭게 손을 놓지 못한다. 그게 나의 숙명인가 보다. 충동적인 자아와 감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미천한 한 인간의 집착이 이렇게 파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