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8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이 8부는 포기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을 붙들 것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는지를 묻는다. 이 부를 읽으며 자신이 손에 쥔 것들, 특히 꼭 쥐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점검해 보도록 해야 한다.
25장. 예수는 왜 부자에게 불편한 말을 했는가
앞의 장들에서 우리는 반복해서 확인해 왔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속해 있느냐, 떠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제도 안에 있든, 밖에 서 있든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의 문제다. 기도와 성경 읽기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고, 윤리적 판단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으며, 관계를 맺는 태도 자체가 새로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 반드시 피할 수 없는 질문 하나에 도달한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많은 탈교회 담론은 이 질문을 조심스럽게 피해 간다. 기존의 제도 교회 안에서 반복적으로 강요되었던 헌신, 희생, 자기부정의 언어에 대한 피로와 반발 때문이다. 그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실제로 교회는 ‘포기’를 신앙의 미덕처럼 미화하며, 개인의 삶을 소진시키는 데 사용해 왔다. 그리고 그 소진은 극소수의 자칭 성직자들의 부유하고 안락한 삶의 유지에 이용되어 왔다. 그런 성직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보임에도 관성적으로 그렇게 ‘강제 포기’를 당해 온 것이다. 결국 그런 그들을 위해 ‘내 것’을 빼앗기는 삶을 강제로 살아왔다는 자각으로 교회에 대한 혐오가 발생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따르는 길에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 예수의 길은 결코 무해하지 않았고,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요구한 것은 무작정의 자기부정이나 종교적 자기학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의 중심축을 옮기는 선택, 다시 말해 무엇을 기준으로 살 것인가를 재정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포기’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려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도덕적 금욕이나 고행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붙들 것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말 가운데 오늘날 가장 자주 완화되거나 은유로 처리되는 말들이 등장한다. 바로 부와 관련된 발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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