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소기업은 독일 '미텔슈탄트'가 될 수 없는가?

같은 ‘99%’, 전혀 다른 경제적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by Francis Lee

최근 독일 주간지 <디 벨트>(Die Welt)에서 미텔슈탄트(Mittelstand)의 위기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듣자 하니 한국 기업도 독일 중소기업을 인수 했다는 소식도 더해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전체적으로는 '위기'보다는 '변화와 적응'을 논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저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 미텔슈탄트(Mittelstand), 곧 중견기업은 단순히 성공한 중소기업 집합이 아니다. 가족 소유, 경영과 소유의 일치, 장기 투자, 숙련노동의 축적이라는 질적 특징을 포함하는 경제 주체다. 다만 이러한 질적 요소는 통계로 완전히 포착되기 어렵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EU가 규정한 독일 중소기업(KMU) 정의를 통해 그 경제적 비중이 산출된다. 독일 중소기업의 위상은 수치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2023년 기준 독일의 중소기업은 약 344만 개, 전체 기업의 99.2%를 차지하며, 전체 매출의 28%, 전체 고용의 53.1%, 전체 직업훈련생의 69.4%, 수출의 20.1%, 기업 연구개발비의 8.4%를 담당하고 있다. 이 수치를 한국의 중소기업 통계와 나란히 놓아보면 표면적으로는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일단 한국 중소기업의 수와 고용 비중은 독일에 비해 한국이 더 높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중소기업 수는 약 804만 개로, 전체 기업의 99.9%에 해당한다. 고용 측면에서는 더 극적이다. 중소기업 종사자 수는 약 1,750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약 81~82%이다. 이 통계치를 보면 고용 비중에서 한국 중소기업이 독일보다 훨씬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치는 곧바로 한국 기업 생태계의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와 관련된다. 곧 왜 한국에서 부가가치와 생산성은 대기업에 집중되어 있는데, 오로지 고용만 중소기업에 과잉 집중되어 있는가 말이다.


독일의 중소기업 고용은 생산성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것에 비해, 한국 중소기업의 고용은 상당 부분이 대기업 중심의 산업 구조에서 '배제된' 더 심하게 말하자면 '패배한' 노동의 흡수라는 성격을 띤다. 그래서 한국 중소기업은 ‘경제의 허리’라기보다 일종의 ‘경제의 완충지대’로 기능해 왔다. 그러다 보니 매출은 많으나 부가가치 창출 효과는 낮게 된 것이다. 한국 중소기업의 매출 비중은 약 48~50% 수준으로 얼핏 보면 독일의 28%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한국 대기업은 소수 기업이 압도적 매출, 이익,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다수 기업이 낮은 단가와 박한 이윤을 분산 공유하는 구조적 모순 속에 겨우 생존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구조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높은 매출 비중은 자율적 시장 성과라기보다, 다층적 하도급 구조 속에서 형성된 거대한 거래 총액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의 중소기업 매출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기업당 부가가치와 기술 내재화 수준은 훨씬 높다. 여기에 더해 직업교육과 인력 재생산 구조에서 독일과 한국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독일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떠받치는 핵심은 직업교육 시스템이다. 2023년 기준, 독일 전체 직업훈련생의 약 70%가 중소기업에서 훈련받는다. 중소기업은 고용의 종착지가 아니라 숙련 형성의 출발점이다. 반면에 한국의 상황은 독일과 정반대다. 중소기업 재직자 가운데 직업훈련 참여율은 대기업 대비 현저히 낮은 것은 물론 기업 주도의 체계적인 도제나 훈련 시스템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청년층의 중소기업 기피 현상은 구조적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국 중소기업은 인재를 ‘키우는 공간’이 아니라, 대기업으로 이동하기 전의 '임시 정거장' 또는 대기업 진출 실패나 이탈 이후의 대안 공간으로만 인식된다. 이 차이가 장기적으로 기업의 기술 축적 가능성을 좌우한다.

그리고 수출 구조에서도 독일과 한국은 큰 차이를 보인다. 독일 중소기업은 수출의 20% 이상을 직접 담당한다. 특히 특정 부품, 장비, 기계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이른바 '히든 챔피언'이 중소기업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 중소기업의 수출 비중은 약 17~18% 수준이지만, 이 중 상당 부분은 대기업 공급망에 종속된 간접 수출이다. 그 결과, 해외 시장 정보는 대기업에 집중되고 브랜드와 기술 인식은 중소기업에 축적되지 않아서 한국의 중소기업은 세계 시장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이렇게 독일이 중소기업을 통해 기술 주권을 분산시켰다면, 한국은 중소기업 구조를 통해 기술 권력을 집중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연구개발과 투자에서도 독일과 한국은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중소기업 R&D 비중은 정부 지원을 포함하면 양적으로는 절대 낮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방향이다. 한국 중소기업은 대개 단기 과제형 R&D에 집중하고, 정부의 정책 변화에 좌우되는 불연속 투자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대기업 기술 로드맵의 보조적 역할에 머물고 말게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중소기업은 장기 기술 전략의 주체가 아니라, 지원금 소진의 단위로 고착된다. 이에 비해 독일 중소기업의 R&D 비중(8.4%)은 낮아 보이지만, 이는 자율적, 누적적 기술 축적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한국 중소기업의 위기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과 한국의 중소기업은 숫자만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그러나 그 사회적 지위는 전혀 다르다. 독일 중소기업은 산업 전략의 주체지만 한국 중소기업은 그저 대기업이 감당하지 못하는 분야의 고용 흡수 장치로 정부의 정책 보호 대상일 뿐이다. 이런 한국 중소기업의 문제는 생산성도 의지도 아니다.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 규정 자체가 독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의 미텔슈탄트를 이루는 중소기업은 모방할 모델이기 이전에, 하나의 질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중소기업에 과연 ‘살아남으라.’라고만 말해왔는가, 아니면 ‘함께 미래를 설계하자’라고 요청해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한국의 기업 생태계 현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분명한 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한마디로 한국의 중소기업은 독일의 미텔슈탄트가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외형만 모방한 개념으로 진정한 미텔슈탄트가 되기 위한 조건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독일식 미텔슈탄트를 육성해야 한다”라는 말을 되풀이해 왔다. 정부 보고서, 국책 연구, 중소기업 정책 문서 곳곳에서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이상적 모델로 지적되었다. 새 정부에 들어와서도 근본적인 방향 전환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여전히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구호가 여전히 울려 나오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정책 실험에도 한국에는 독일식 의미의 미텔슈탄트가 정착하지 못했다. 이 실패는 실행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에는 미텔슈탄트가 성립할 수 있는 구조적 조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정책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또한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특정 시점에 설계된 정책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소유 구조, 직업윤리, 지역 산업 생태계, 금융 관행의 총합이 만들어 낸 조화로운 산물이다. 이러한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가족 소유의 지속성, 경영과 소유의 일치, 장인 정신과 직업 자부심, 저축은행과 협동은행과 같은 지역 단위 금융기관과의 장기 거래와 같은 특징을 지닌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축적된 조건이다. 반면 한국에서 이른바 ‘한국형 미텔슈탄트’는 애초에 하향식 정책 구호로 먼저 등장했다. 이는 마치 숲이 없는 곳에서 나무의 종류부터 정하려는 시도와 같았다. 게다가 한국 특유의 재벌 중심 경제 구조는 아예 중간층에 자리 잡은 기업의 성장을 허용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사정은 같다. 미텔슈탄트의 핵심 조건은 중간 규모 기업이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독일에도 대기업이 존재하지만, 산업 전반을 독점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한국의 산업 구조는 극단적으로 수직적이다. 최상층을 차지하는 극소수의 대기업은 기획, 기술, 브랜드, 해외 시장을 독점하고 중소기업은 그러한 대기업이 주도하는 하도급, 외주, 단가 경쟁의 프레임에 갇혀 운영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곧 이른바 '글로벌 니치' 기업으로 성장할 경로가 처음부터 차단된다. 조금이라도 성장 가능성이 보이면 가치 없이 대기업이 그 중소기업의 기술과 가능성을 블랙홀처럼 흡수해 버리고 만다. 이른바 '중견기업 고사 작전'이 늘 작동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관련 기관이 앵무새처럼 되풀이 제시하는 '한국형 미텔슈탄트' 정책은 이 견고한 대기업 중심의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저 중소기업에 “독일처럼 하라”라고 요구해 온 것이다. 이는 사실 실현 불가능한 주문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 특유의 금융 시스템은 단기적 성과주의만을 강요한다.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지역 기반의 장기 금융 지원으로 지탱된다. 수익성이 일시적으로 낮아져도, 기술과 신뢰가 있다면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은행은 기업을 ‘프로젝트’가 아니라 ‘관계’로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의 금융 시스템은 전혀 다르다. 담보 중심 대출, 단기 실적 위주의 신용 평가 제도와 더불어 정부 정책자금에 주로 의존하는 구조가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조건에서 중소기업은 장기 기술 투자가 아니라 당장 살아남기 위한 선택만을 강요받는다. 그래서 독일 미텔슈탄트의 시간 감각은 ‘최소한 10년 단위’지만, 한국 중소기업의 시간은 ‘분기 단위’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장 성과를 내지 모사면 도태되고 마는 치열한 무한 경쟁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 직업과 숙련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서 독일과 격차가 크다. 독일에서 중소기업은 기술과 숙련의 중심지다. 그래서 “대기업에 못 간” 사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중소기업은 선택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력의 경로가 된다. 한국에서는 사정이 정반대다. 중소기업 취업은 대기업 취업에 실패한 '루저'가 가는 곳이라는 편견이 여전히 강하다. 그리고 중소기업에서 쌓은 경력과 숙련도는 이동의 자산이 아니라 '탈출'의 도구가 되며 기술은 축적되기보다 유출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중소기업은 숙련을 ‘쌓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잃는 곳’이 된다.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기술이 머물고 발전하는 구조이지만, 한국의 중소기업은 기술이 대기업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다.

한국 중소기업의 소유와 경영 구조의 단절도 중요한 문제다. 독일 미텔슈탄트의 지속성은 바로 소유의 연속성에서 나온다. 기업은 가문의 자산이자, 다음 세대에 넘겨야 할 책임이다. 이 구조는 단기 이익보다 기업의 존속을 우선하게 만든다. 그러나 한국의 중소기업은 다르다. 창업은 많은 경우 막다른 궁지에 몰린 사람의 마지막 생존 전략인 경우가 많고, 기업 운영 승계는 제도적, 문화적으로 불안정하며 궁극적으로 ‘엑시트’가 성공의 기준으로 설정된다. 중소기업은 탈출해야 하는 중간역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소기업이 기업가와 그 직원의 삶에서 장기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결코 미텔슈탄트가 될 수 없다.

국가의 역할에서도 독일과 한국은 큰 차이를 보인다. 독일에서 국가는 미텔슈탄트를 '관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예측 가능한 규칙과 안정적 환경을 제공한다. 반면 한국은 중소기업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철저히 통제한다. 정부의 잦은 정책 변경, 조건부 지원, 과도한 행정 보고 부담으로 한국의 중소기업은 전략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시장이 아니라 틀에 박히고 변화가 심한 정부 일정에 맞춰 그 운신의 폭을 조정하게 된다. 이는 결국 기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하여 기술 개발과 자본과 노동을 결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정 체계의 부속물로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한국 중소기업의 실패는 사실 예정되어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형 미텔슈탄트’는 사실 실패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중소기업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원래 미텔슈탄트는 장기적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투자, 분산된 경제 권력, 숙련을 존중하는 문화, 중간 규모 기업을 허용하는 산업 구조가 조화를 이룰 때만 가능하다. 한국 사회는 이 네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것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그저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해 왔다. 그래서 결론은 냉정하다. 한국에는 ‘한국형 미텔슈탄트가 없다’기보다, 그런 미텔슈탄트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기업 생태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미텔슈탄트 없는 나라’를 전제로 한 산업 전략이다. 과거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실현이 안 되고 있고 앞으로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근본적으로 역사와 문화가 다른 두 나라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한국은 왜 미텔슈탄트가 없는가?”가 아니라, “미텔슈탄트가 없는 나라, 미텔슈탄트의 형성이 불가능한 나라에서 가능한 산업 전략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대안은 대책 없는 모방의 시도가 아니라 전제의 근본적인 전환에서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제는 공염불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 버린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말부터 폐기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산업 정책의 출발점은 늘 같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중소기업을 키우자!'라는 구호가 늘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자체로 이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육성’은 그 대상이 비자율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에 따라 한국의 중소기업은 보호, 관리, 지원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자동으로 함께 따라온다. 그래서 한국의 중소기업은 정부와 대기업에 의존하는 타성에 젖은 것으로 경제 생태계에서 부차적인 존재로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상황에 맞는 대안은 단순하다. 중소기업을 ‘키우는 대상’이 아니라 대기업도 넘볼 수 없는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고유한 경제 단위로 재정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모든 중소기업이 골고루 성장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중소기업의 역할이 분화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술 집약형 소규모 기업, 지역 기반 서비스와 생활 관련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 대기업과 같은 플랫폼에 종속하는 형태가 아닌 전문 공급자, 그리고 더 나아가 단기 프로젝트형 고급 기술 집단의 특성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과 달리 체급이 작은 중소기업이 상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전략을 빠르게 수행하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토양에 이식하지 못한 미텔슈탄트의 대체물은 그 규모가 아니라 기능의 조합이어야 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지향하는 일종의 ‘성장용 사다리’가 되는 대신 ‘전환할 수 있는 정거장’을 설계해야 한다. 한국 산업 정책은 오랫동안 중소기업이 성장해서 중견기업이 되고 여기에서 더 치고 나가서 결국 대기업이 되는 단선적 성장 경로를 상정해 왔다. 구체적으로 매출 1조 원 이상이면 중견기업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다리는 대부분의 기업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중소기업은 계속 중소기업으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프레임 대신 필요한 것이 바로 전환할 수 있는 '정거장'이다. 한 기업이 성장하지 않고도 존속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고, 산업 간 이동이 가능한 구조를 형성하며, 실패가 퇴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재배치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정착해야 한다. 곧 중소기업의 목표가 ‘대기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현재 있는 위치를 지속해서 갱신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또한 기술 축적의 주체를 ‘기업’에서 ‘네트워크’로 바꿔야 한다. 독일의 미텔슈탄트는 개별 기업 내부에 기술이 지속해서 축적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축적의 단위를 아예 바꿔야 한다. 단일 기업 중심에서 산업 네트워크 중심으로 전환하고, 사내 기술 독점이 아니라 공유 인프라를 구축하고, 독점 특허를 고집하지 말고 표준과 인터페이스 프레임을 정착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한국형 중소기업의 대안은 네트워크형 기술 축적이다. 특정 기업이 사라져도 기술은 남고, 사람이 이동해도 지식은 순환해야 한다. 이때 국가의 역할은 단순한 ‘지원금 지급자’가 아니라 산업 표준, 플랫폼, 인프라 구축을 위한 동반 설계자가 된다.


다음으로 중소기업이 추구하는 숙련을 ‘기업 충성’이 아니라 ‘노동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독일의 미텔슈탄트 모델에서 숙련이 기업에 귀속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돈이 된다 싶으면 대기업이 무엇이든 다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숙련을 아예 개인에게 귀속된 자산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 공통 기술 인증 제도 정착, 기업 간 이동 가능한 숙련 체계 확립, 프리랜서와 프로젝트 노동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중요한 전환은 “회사를 떠나면 경력이 사라진다.”에서 “회사를 떠나도 숙련은 남는다.”로 바뀔 때 이루어진다.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중소기업은 개인의 ‘덫’이 아니라 ‘경유지’가 된다.

그리고 한국 특유의 재벌 중심 구조를 전제로 한 전략적 분업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 고유의 재벌 체제는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수는 있어도, 결코 쉽게 해체될 수 없는 것이다. 국제 경쟁이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현실 부정이 아니라 전략적인 현실 인정이다. 이리하여 재벌은 글로벌 자본, 브랜드, 시장 접근을 담당하고 중소기업은 기술, 속도, 유연성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업은 수직적 권력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계약 관계여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로 공정거래는 윤리가 아니라 산업 전략의 핵심 장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에서 국가의 역할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단순한 ‘후견인’이 아니라 ‘질서 설계자’이어야 한다. 과거 '한국식 미텔슈탄트' 담론에서 국가의 역할은 종종 과대평가 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와는 반대인 현실이다. 한국의 기업 생태계에서 국가는 너무 많이 개입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설계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적 국가 역할은 명확하다. 예측 가능한 규칙의 수립, 장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산업 질서 확립, 실패 비용을 최소화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다. 그리고 국가는 기업을 '돌보지' 말고, 기업이 서로를 해치지 않도록 '질서를 설계해야' 한다.

사실 한국의 중소기업이 처한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 오로지 선택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한국식 미텔슈탄트'는 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실패는 오히려 한국 사회에 하나의 자유를 준다. 곧 더 이상 남의 모델을 흉내 내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말이다. 한국의 산업 전략은 그동안 뭐든지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바꾸고, 빠르게 이동하는 사회에 맞추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성은 기업 하나가 아니라 구조 전체가 감당해야 한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저 여전히 ‘독일이 부럽다’라고 말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이 가진 조건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것인지다.

한국은 이미 만성적인 저성장 국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저성장 시대의 새로운 성공 기준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성공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저 무한정 더 크게, 더 빠르게,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었다. 기업도, 개인도, 국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성장률은 성취의 증거였고, 확장은 능력의 증명이었다. 그러나 이 공식은 이미 작동을 멈췄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멈춘 엔진을 가지고 억지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아니다. “얼마나 오래,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 된다. 한국에서 성장 신화가 붕괴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저 시대의 변화일 뿐이다. 저성장은 단순한 정책 실패의 결과가 아니다. 이는 인구 구조의 변화, 느린 기술 성숙, 글로벌 수요 둔화가 동시에 작동한 구조적 전환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고성장기의 성공 기준을 현재 상황에 적용한다. 기업은 매출 증가가 멈추면 실패로 간주하고, 개인은 사회적 지위의 상승 이동과 수입 증가가 없으면 정체로 평가되며, 국가는 성장률 하락을 무조건 총체적 위기로만 해석한다. 그러나 한국이 당면한 저성장 사회에서 이러한 기준은 현실을 왜곡한다. 성장이 멈췄다고 해서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한국 사회에 적용되는 성공의 정의가 시대에 뒤처졌을 뿐이다. 이제 무한한 성공이 아니라 존속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른바 '버티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존속은 무능이 아니라 능력이다. 성장 없는 상태에서 기업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더 중요한 능력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비용과 수익의 정밀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할 줄 알아야 한다. 정체를 두려워하여 무리한 과잉 투자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인력과 기술을 쓸데없는 일에 소진하지 않는 운영 능력도 필요하다. 고성장기에는 확장이 능력이었지만, 저성장기에는 지속 자체만으로도 능력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생존에 성공한 존속 기업이 “정체된 기업”, “발전 없는 조직”으로 폄하된다. 바로 이러한 성장주의적 인식이 바로 한국 중소기업의 기초 체력을 깎아 먹는다.

이제는 성공의 기준을 ‘증가’에서 ‘유지’로 옮겨야 한다. 저성장 시대의 성공은 더 이상 플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마이너스를 얼마나 피했는가가 핵심이다. 고용 유지, 기술 존속, 관계 지속, 파괴적 경쟁의 현명한 회피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소극적 목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성공의 기준을 ‘얼마나 늘렸는가?’에서 ‘얼마나 무너지지 않았는가?’로 옮길 때, 비로소 저성장 사회에 맞는 평가가 가능해진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업 성공의 최종형이 코스피 상장 또는 M&A를 통한 이익을 남긴 매각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기업을 일시적 프로젝트로 만든다. 그러나 저성장 사회에서 이 모델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대신 새로운 성공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최소한 20년, 나아가 30년 존속하는 기업, 규모는 작지만, 안정적인 기업, 소유 구조가 급변하지 않는 기업, 지역사회와 더불어 같이 늙어가는 기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업은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하지만, 기업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의 안정성을 떠받친다. 성장은 세간의 관심을 끄는 이벤트이지만, 존속은 조용히 사회를 지지하는 굳건한 인프라다.

이러한 존속은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시대정신에 따른 전환이다. 이제 사회적 신분 상승 이동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과거와는 세상이 달라졌다. 성공이 전부가 아닌 시대가 된 것이다. 더 높은 자리로 이동하지 않아도, 더 많은 소득을 얻지 않아도, 더 큰 조직에 속하지 않아도 삶이 유지되고, 인간 존엄이 보장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 수 있다면 이는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개인에게 ‘계속 올라가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솔직히 이러한 압박은 무한 경쟁으로 개인을 내몰고 많은 이들의 탈락과 좌절을 양산할 뿐, 전체적 생산성을 무한히 높이지 않는다. 오히려 저성장 시대에는 안정된 위치를 지키는 삶이 사회 전체의 효율을 높인다. 이러한 인식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국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이렇게 성장을 멈춘 사회에서 경제윤리도 달라져야 한다. 무한 경쟁보다 과잉 파괴를 자제하고, 시장 점유율 확대보다는 생태계 유지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약자의 퇴출을 강요하고 그들의 곤경에 무심해지기보다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공존 가능성을 추구하는 사회가 참다운 의미의 선진국이다. 이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합리성의 문제다. 어차피 모두 다 성장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성장을 강요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기보다는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이제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다시 정의하지 않으면, 실패가 일상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저성장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은 성공의 정의를 바꾸지 않는 것이다. 무한 경쟁을 벌여 승리하고, 더 큰 집으로 이주하고, 더 높은 소득을 얻고, 더 많은 소비를 하는 것을 성공으로 여기는 한 단순히 생존하는 다수는 실패자로 낙인 찍히며 결국 사회는 다수의 좌절을 무한히 재생산한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성공은 다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크지 않아도, 더 빠르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 그저 무너지지 않고 계속 생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장은 더 이상 모두의 과제가 아니다. 뛰어난 소수의 성장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생존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 의식을 성장에 성공한 자와 생존에 성공한 자가 공유하는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이라고 할 것이다. 정부가 바뀌었으니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은 심정으로 중소기업 정책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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