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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14. 2021

파리 떼에 둘러싸인 윤석열?

파리는 아무 데나 모이지 않는 법이다.

김종인이 ‘선후포럼’이라는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윤석열이 파리 떼에 둘러싸여 5개월 동안 헤맸다. 국민의힘 입당을 후회할 것이다.’     


선후포럼이 뭔가 보니 금태섭, 진중권, 권경애가 급조한 유튜브 채널이다. 윤석열이 말한 메이저 언론은 아니니 별 것 없어 보이기는 한다. 그래도 언론이 인용하는 것을 보니 들을 말이 있나 보다.     


각설하고..     


파리 떼... 집파리들은 신선한 음식에도 모이지만 냄새가 강력히 나는 부패한 유기물, 심지어 배설물에 그것도 떼로 더 잘 모여든다. 그 이유는 유충, 곧 구더기의 성장에 유리한 것이 부패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유기물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싱싱한 음식보다는 오히려 썩은 음식에 더 최적화된 것이 파리이다.  

   

파리의 학명은 diptera이다. 이는 그리스어에서 2를 의미하는 δι와 날개를 의미하는 πτερόν이 결합된 단어이다. 원래 두 쌍을 날개가 있었으나 뒷날개가 퇴화하여 운동 감각기관으로 변형되었다. 그래서 파리는 이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매우 민첩하게 이곳저곳으로 잘 옮겨 다닐 수 있다. 파리는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이면 어디든 쫓아다니는 것이다.     


실제로 윤석열 주변을 보면 정치판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냄새’를 맡고 돌아다니던 인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파리’의 속성을 간파해낸 김종인의 시각이 혜안이라고 경탄할 것까지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윤석열의 주변에는 파리들만 득시글거릴까?      


예나 지금이나 ‘치국’을 원하는 ‘군주’의 주변에는 책사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유비에게는 제갈공명과 방통, 조조에게는 가후, 곽가, 사마의, 손권에게는 주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군주의 주변에는 책사만이 아니라 용장들도 모여들었다. 유비에게는 관우, 장비, 조자룡, 조조에게는 방덕, 서황, 전위, 하후돈, 허저, 손권에게는 육손과 주유가 있었다. 이러한 탁월한 책사와 용장들이 있으니 능히 치국만이 아니라 평천하를 꿈꿀 만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20대 대선 정국은 어떤가? 이준석이 윤석열을 위하여 제갈공명이 조자룡에게 주었다는 錦囊妙計, 곧 비단 주머니에 든 3개의 계책을 마련했다는 데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현재 윤석열이 지지율이 떨어지고 안팎으로 곤경을 당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대선이 끝나고 나서야 열릴 모양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비책은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삼국지를 읽고 기억나서 그냥 인용해 본 것이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윤석열이 이런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열어볼 수가 없는 주머니라면 말이다.     


사실 윤석열이 덜컥 국민의힘에 입당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김종인이 말 한대로 당에서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러다 보니 자기 캠프의 사람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캠프에 김종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15년 전에 ‘설치던 사람’이 들어와 있는 형국이니 파리로 보일 수밖에. 또 그 가운데에는 얼마 전만 해도 윤석열과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던 이들도 보인다. 그들이 ‘파리’라는 것을 인식한 김종인의 시각은 남다를 것도 없다. 누가 봐도 파리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윤석열이 지금이라도 파리들을 털어버리고 유비나 조조와 같이 책사와 용장들을 주변에 끌어모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먼저 자신의 냄새를 없애야 할 것이다. 파리들이 만만히 보고 모이지 않도록, 더러운 냄새가 나지 않도록 沐浴齋戒하고 스스로 덕의 향기를 낸다면 천하의 영재들이 어찌 아니 몰려들겠는가? 공자가 말 한대로 德不孤 必有隣, 곧 덕을 갖춘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그 격조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이다.


그런데 덕을 갖춘 사람은 누구인가?      


<中庸> 14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     


과거 군주 시대의 중국의 귀족들은 활쏘기를 단순히 무술이 아니라 심신 수양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런데 활이 과녁의 가운데에 명중하지 못하면 군자는 주변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는 법이다. 그런 덕을 갖춘 자가 군주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소인은 바람이나 주변 사람들의 소음을 핑계로 삼고 자신의 실수나 능력 부족은 인정하지 않는다. 초록은 동색인 법이니 그런 자 주변에는 파리 같은 인간이 들끓기 마련 아니겠는가?     


<論語> 衛靈公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남이 나에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내가 먼저 남에게 하지 마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 아닌가?   


이는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황금률과 비슷한 논조이다.      


Πάντα οὖν ὅσα ἐὰν θέλητε ἵνα ποιῶσιν ὑμῖν οἱ ἄνθρωποι, οὕτως καὶ ὑμεῖς ποιεῖτε αὐτοῖς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 군자이다. 특히 남의 집에 들어와서 기거하게 되는 경우 예절을 먼저 갖추고 자신이 할 일을 먼저 찾는 것이 군자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이다. 그런데도 적반하장 격으로 집안사람들이 자신을 섬기라고 나선다면 누가 돕겠는가? 정치판도 인간 일반의 삶의 이치와 다른 원리가 적용될 수가 없다. 내 주변에 사람이 아니라 파리가 꼬이거든 그 원인을 밖에서 찾지 말고 나 자신에게서 먼저 찾아야 할 노릇이다.     


혹시 윤석열은 조조의 책사였다가 나중에 그의 후손을 배신하고 진나라를 세운 사마의와 같은 자가 자신의 주변에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러나 그 정도의 일은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 사람의 일, 특히 치국을 도모하는 일에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천운이라는 것이 작용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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