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가 20대 대선을 결정지을 것이다.
오세훈이 당선된 서울 시장 보선부터 시작된 MZ세대의 플렉스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도 그 힘을 발휘할 모양새이다. 그런데 현재 이재명과 윤석열 누구도 이들의 마음을 얻은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쉽지 않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런 집단이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MZ세대의 성격 규명은 어느 정도 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성격이 형성된 이유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1980년 이후 태어난 MZ세대는 학령기부터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이다. 그런데 사실 인터넷을 정확히는 WWW(world wide web)이라고 불러야 한다. 인터넷의 역사를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Tim Berners-Lee가 고안한 이 hypertext와 wyswyg 시스템은 인터넷이 전문가의 영역에서 벗어나 일반 대중 안으로 확산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문 알고리즘에 대한 지식이 전혀 필요 없이 시각적인 인터페이스로 인터넷 접근이 가능해진 때문이었다. 바로 이 hypertext와 wyswyg의 생태계에서 문자 그대로 정보의 홍수에 휩쓸린 것이 Millenial이라고 한다면 Z세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Twitter와 Youtube를 플랫폼으로 하는 단문과 동영상 생태계에서 성장한 세대이다. 이제 칸트의 비판서와 같이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글이나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은 MZ세대에게는 안드로메다 너머에 있는 외계인의 것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그런 글을 읽고 숙고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인문학적 성찰의 소양이 부족하고 그 근본 이유가 고전을 읽지 않아서라고 주장하는 꼰대와 책장사들이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의 MZ세대에 대한 성찰과 소양이 부족하다. 칸트나 톨스토이의 책을 읽는 것으로 인간의 전두엽을 활성화하는 시대가 저물었다. 속담대로 한 컷의 그림이 천 개의 단어를 대신할 수 있는데 무엇하러 죽치고 앉아 글을 읽겠는가? 더구나 글로벌 시대에 매일 쏟아지는 정보의 양이 엄청난데 언제 칸트를 읽고 톨스토이를 읽을 시간이 있겠는가? MZ세대에게는 성찰이 아니라 결과가 필요하다.
한번 따져보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결국 인간의 인식능력을 분석한 인식론이 주제이다. 그렇다면 인식론을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그 두꺼운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아도 그 내용을 칸트 스스로가 잘 정리한 <프롤레고메나>가 이미 나왔다. 그마저도 길다면 그것을 요약한 위키피디아의 글을 읽으면 된다. 그것도 길면 칸트를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요약문을 받으면 된다. 물론 적당한 사례를 하고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증진을 주창한다. 그러나 이 또한 이른바 고전 몇 권을 독파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특히 유럽의 인문학적 상상력의 근원은 책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이다. 그 사회 자체가 인문학이기에 그를 바탕으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처럼 학원에 가서 세계 명저 100선을 독파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인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도 한국에서는 그저 학원 수입만 올리는 독서가 난무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독서 학원이 단 한 군데도 없고 따라서 세계 명저 100권 돌파를 목표로 열심히 독서하는 아이도 없다. 그러나 꾸준히 노벨 문학상 과학상 다 받는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미 초딩 때부터 세계 명저 100권을 읽는 작업을 수십 년 지속해 왔어도 노벨 문학상은 절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가 인문학적 상상력의 토양이 없는데 책 몇 권 읽는다고 어찌 생기겠는가?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MZ세대에게 독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지해서도 안 된다. 다만 카톡과 트위터류의 단문이나 그래픽 위주의 웹툰에 길이 들은 MZ세대의 판단이 이전 세대의 것과 그 프레임에서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MZ세대는 장편 소설을 완독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흔히 독서가 사유의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하지만 이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책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이를 이용하여 라틴어에서 각 나라의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500년 정도 밖에 안 된다. 더구나 공교육으로 일반 대중의 문맹률이 줄어들기 시작한 역사는 더욱 짧다. 그리고 그 공교육도 인본주의 차원이 아니라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그 수요가 늘어난 문자 해독과 계산 능력을 지닌 노동력 덕분이었다. 문학작품이 대중의 인기를 얻어 이른바 베스트셀러 전업 작가가 탄생한 것은 더욱 후기의 일이다.
책을 읽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정보의 습득이지 성찰이 아니다. 물론 근세 이전 철학과 문학이 상류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시절에는 독서와 성찰은 직결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공교육으로 문자를 깨친 계층은 성찰보다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배우고 책을 읽었다. 귀족들이 지적 유희, 독일어로 하자면 Gedankenspiel을 위해 독서를 했다면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독서를 한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 정확히는 WWW가 그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왔다. 독서는 더 이상 정보 습득의 최적 도구가 아닌 것이다. 시청각 자료가 문자 자료보다 정보 전달에 훨씬 더 효과적인 도구이고, 더 나아가 hypertext를 겸한 interactive 한 온라인 자료는 종래의 종이책에 비해 정확한 정보 전달 도구의 차원에서 효용성이 뛰어나다. MZ세대가 꼰대를 싫어하는 근본적 이유가 일방성에 있다. 꼰대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종이책도 마찬가지이다. 저자와의 직접 대화가 불가능한 종이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의 상상력을 극단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이런 방식은 문학적 상상력의 촉진에는 도움이 되지만 정확한 정보의 전달에는 극히 부실한 방법이다. MZ세대는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용적 지식을 더 필요로 한다. 지식, 정확히는 정보가 경제력을 좌우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런 실용성은 입시 제도를 통하여 더욱 세련화되었다. 유치원부터, 아니 어린이집에서부터 시작된 국영수 중심의 입시교육은 수능을 종점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수능은 단순히 학업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경제적 서열의 고착화를 알리는 서주에 불과하다. 대학교의 네임밸류가 나머지 삶의 대부분을 결정짓는 사회에서 수능성적, 정확히 입시 성적은 그 이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이자 상수가 된다. 이미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모의고사로 시작된 대한민국 고등학생 전체의 서열 확정 과정이 수능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김 아무개는 전국 1등의 명사가 되고 박 아무개는 전국 42만 등의 노바디가 된다. 물론 사회적 명사들은 공부가 다가 아니고 명문대가 다가 아니라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바로 그 자신이 이미 명문대 출신이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최상위 티어에 속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식도 그 티어의 반열에 올리기 위하여 내신을 위한 성적표와 표창장 위조도 서슴지 않는다. 이 분야에서는 수구 세력만이 아니라 입진보들도 별 차이가 없다. 전국적으로 정해지는 1등부터 꼴등까지 한 줄로 세우는 이 패러다임을 진심으로 초월할 멘탈의 소유자는 한국에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장한 MZ세대의 정신을 규정하는 또 다른 요소가 바로 게임이다.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성장한 온라인 게임은 근본적으로 입시와 유사한 패러다임을 지닌 도구이다. 게임의 왕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서라도 아이템을 구매해야 한다. 물론 아이템만으로 정상에 오를 수는 없지만 아이템이 비쌀수록 정상에 오를 기회가 늘어난다. 그리고 결국 최정상의 티어에 오르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자신이 지닌 물적 정신적 역량을 총동원하고 시간마저 다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입시와 명문대에 중독이 되듯이 게임에도 중독이 된다. 게임에서 1등을 하는 것이, 그리고 특히 온라인에서 리얼타임 온타임으로 진행되는 mmorpg에서 상대를 격파하는 것이 삶에 무슨 근본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조건 명문대에 들어가야 하고 무조건 게임을 이기고 봐야 한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성취 후에 얻는 것이 플렉스 밖에 없지만 말이다.
그렇다 입시와 게임의 궁극적인 보상은 플렉스다. 사회적 경제적 성공의 보상도 플렉스다. 특히 신라시대 이후 굳어 골품제가 여전히 공고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상에 오른 이에게 주어지는 플렉스의 가학적 쾌락은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강남에서 한 채에 수백억 원 한다는 집을 플렉스 할 때의 쾌감과 권력을 쥐고서 법 위에 서면서 플렉스 할 때의 쾌감에 중독되어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대학교를 못 들어간 대중가수나 서울대 법대를 나와 고위관직에 오른 자나 집단적인 플렉스 병에 걸린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MZ세대는 과거보다 더욱 계급과 서열에 민감하다. 이들에게 보편적 복지와 분배는 오히려 불공정이며 불의이다. 내가 뼈 빠지게 벌어서 이룩한 것을 무능해서 성공하지 못하고 게으른 하층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용서할 수 없는 ‘진보’, 나아가 ‘빨갱이’ 사상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보수주의자이다. 이제 더 이상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진보이고 나이 들면 보수라는 공식은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MZ세대는 한국의 네오콘이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수구 보수와는 그 결이 다르다.
이제 한국의 MZ세대가 보수화되면서 한국의 진보는 설 자리가 사라졌다. 국가 경제적의 성장과 더불어 진보 세력이 약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그러나 MZ세대가 불러일으킨 한국 네오콘의 바람은 기존의 서양의 선진 사회에서 보이는 진보와 보수의 균형을 깨뜨리는 양상으로 불고 있다. 그래서 어쩐지 불안하다.
신라 시대 때부터 공고화된 전통적 골품제 의식 위에 일본 강점기의 문화가 해방 후 도입된 미국식 서양 문물의 탈을 쓰고 유지된 데다가 군사독재정권 시절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가 가미된 기형적인 보수주의 환경에서 성장한 베이비부머들의 자녀들인 MZ세대는 이제 또 다른 보수주의, 곧 입시와 게임의 프레임으로 형성된 네오콘의 패러다임을 우리 사회에 심고 있다. 선거에 무심했던 전 세대와는 달리 정치판도 mmorpg판으로 인식하며 이데올로기보다는 플렉스에 더 몰두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문제는 MZ세대가 종래의 보수와 진보, 신세대와 구세대, 부자와 빈자, 전라도와 경상도,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모두 능가하는 새로운 질적으로 전혀 다른 진영을 형성하고 그 힘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윤석열이나 이재명이나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적절한 관심을 기울일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일시적인 바람일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정치 바닥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동물적인 정치 감각을 지닌 이들이 두 후보 주변에 운집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MZ세대에 영향을 미친 인터넷과 게임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아 보인다. 그저 MZ세대를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MZ세대는 더 이상 정치가를 추종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버릴’ 줄 아는 세대이다. 60대 이상의 세대처럼 선전선동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더욱 흥미진진하다. 문자 그대로 미래 세대인 MZ세대가 대선을 좌우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 결과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