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는 이미 ‘오징어 게임’에 익숙하다.
지독히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한 청년만 살아야 하나?
by Francis Lee Sep 28. 2021
세간에 인기가 있다고 해서 나도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정재가 주인공 아닌가 말이다.
특히 2편이 흥미로웠다. (결국 후반에 가서 나오는 반전의 주인공이기도 한) 뇌종양에 걸린 할아버지가 마지막 표를 행사하여 게임을 중단하게 된 장면까지 진행된 인간의 내적 갈등. 결국 모두 게임을 그만두기로 한 결정에 따라 참가자들은 다시 각자의 길을 간다. 그러나 모두 엄청난 빚을 진 이들이기에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영감님’의 말 대로 여기가 더 지옥이다. 경찰을 찾아간 이정재는 범죄 행위를 고발해보지만 당연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목숨이 아까워 게임을 중단했지만 세상은 이들을 더 극단적인 죽음으로 몰고 간다. 결국 스스로 원해서 죽음을 각오한 게임을 다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영화에 나오는 ‘엄마’들은 다 착하다. 아들들은 다 실패한 인생이다. 서울대 경영학과 수재든 무능력자든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일단 빚의 수렁에 빠지면 남녀노소의 차별도 사라진다. 사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빚쟁이로 만든다. 그래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빚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Zeitgeist>라는 다큐에 나온 대로 달러가 기축통화인 이 세상에서 돈은 빚일 뿐이다. 세계 통화의 지위를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달러는 차용 증서에 불과하다.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 내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과 부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여 정부가 통제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리 결정과 통화 정책은 완전히 FRB의 독립적 권한이다. 결국 이 FRB의 이사들이 전 세계 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개별 국가가 국내 경제 정책을 아무리 잘 운영해도 세계 거대 자본가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FRB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세계 경제다. 경제 규모가 여전히 작고 취약한 아시아 국가들은 언제든지 제2의 IMF 사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FRB, World Bank, IMF, WTO는 하나 같이 미국 경제, 더 정확히 말해서 미국의 거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궁극적인 결정을 내릴 뿐이다. 그 여파에 따른 경제적 문제는 고스란히 미국의 서민들과 미국 이외의 나라의 국민들이 ‘고통 분담’의 차원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FRB와 마찬가지로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IMF도 마찬가지로 활동해 왔다.
중국이 자국의 규모의 경제를 믿고 이런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모양이지만 서양의 거대 자본이 이미 상당히 침투한 상황에서 쉽지 않을 것이다. 자본은 인간의 정신마저 세뇌시키는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시진핑은 expert보다는 red를 강화하는 노선을 택하여 중국의 사상이 불순한 ‘자본가’들은 물론 연예인들도 사회적 처형을 시키고 있다. 과연 중국이 서양의 수백 년의 노하우를 쌓은 거대 자본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을 수 있을지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중이다. 만약에 중국이 이 거대한 실험에 성공한다면 많은 학자들의 논쟁거리였던 post-capitalism, 곧 자본주의 다음에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실마리가 보일 법도 하다. 인류의 근세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실험을 하는 중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배짱의 근거는 물론 인구와 경제 규모이다. 14억 인구와 12조 달러의 명목 GDP는 전 세계 그 어떤 경제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물론 중국과 맞서고 있는 미국은 3억 3천만 명의 인구와 21조 달러의 GDP의 강국인 데다 우군도 있다. 서유럽 국가 중심의 EU는 5억 인구와 19조 달러의 GDP로 미국과 힘을 합치면 중국이 상대하기 버겁다. 그러나 단일 국가로 일치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에서는 그 어느 나라도 중국을 능가하지 못한다.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말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이지만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한다고 해도 중국이 일방적으로 깨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post-capitalism 더 나아가 post-socialism을 기대해 보는 것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변증법적 발전을 이루어 Synthesis를 이룬다면 인류의 진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그 여정에서 thesis와 antithesis의 무시무시한 충돌로 여러 나라가 그 파편에 다칠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시 한국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7년 특히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강타한 이른바 IMF 사태는 이 서양 자본 세력과 관련 기관들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2008년을 전후해 벌어진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미국 거대 자본가들의 돈놀이로 야기된 사건이지만 그 후유증에 따른 문제는 전 세계가 ‘고통 분담’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코로나 사태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천재지변이지만 그 후유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거대 제약사들은 역사적인 이익을 거두고 있다. 각 국가의 세금이 사기업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반면에 주로 서민들인 중소기업이니 자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다. 이들이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빚쟁이들처럼 개인의 욕심으로 능력에 넘치는 소비를 한 개인 윤리적인 차원의 부도덕을 더 문제 삼는다. 개인이 어쩔 수 없는 제도의 문제로 경제적 문제가 야기된 것인데 결국은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물론 개인의 욕심이 문제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을 빚쟁이로 몰아가는 구조적 모순 안에서 개인의 잘못은 사실 종속 변수일뿐이다.
당장 오징어 게임이라는 영화도 미국의 대자본으로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상품이다. 이 작품의 제작비용은 엄청나다. 한국 최고의 배우라고 하는 이들이 주인공들이니 당연히 비용이 엄청날밖에. 이정재와 공유, 거기에 이병헌까지. 이들의 출연료만도 수십억 원이었을 것이다. 총제작비가 200억 원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인기로 봐서는 쉽게 수익을 낼 것으로 보인다. 수익이 영화에 나오는 456억 상금을 넘어설 것 같다. 그런데 그 자본가의 수익 창출에 이바지하는 것은 한 달 회비 14,000원을 내는 대다수의 서민이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마저도 실질적으로 거대 자본가가 만들어 현실에서 당하는 것은 결국 서민인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어 ‘대박’을 친 것만을 강조하고 있다. 아니면 현실적인 서민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감상적인 논평만 늘어놓는다. 영화의 성공 비결은 일단 게임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이 대세가 된 현실에서 인생은 가상세계의 게임과 거의 차이가 없으니 쉽게 다가올 법도 하다. 그리고 그 게임이라는 것이 초딩이면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고민할 필요 없이 볼만한 것이다. 그리고 잔인하다. 컴퓨터와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롤게임과 다를 것이 없다. 너무 익숙한 것이다. 이 영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희희낙락하는 한국 언론의 경박함이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 사회인 것을.
현대인들은 ‘상품 소비’에 최적화되어 있다. 쓰고 버리는 사회. 기뻐도 소비하고 우울해도 소비한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숨만 쉬어도 소비자가 된다. 자본가가 심어 놓은 덫은 거리만이 아니라 안방에도 놓여 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자신의 결단으로 소비한다는 환상으로 그 덫에 스스로 걸린다. 그러면서 결국은 빚의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게 된 빚에 더해 살아가면서 스스로 진 빚에 빠져 평생 허우적거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체적으로 상품을 소비하고 버리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사실은 거대한 매트릭스 안에 갇혀서 사는 주제에 말이다. 상품과 영화만이 아니라 사상도 이념도 고민도 다 ‘쓰고 버리고’ 만다. 사실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몇 달 지나면 다 잊고 또 다른 게임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정부 비판의 선봉에 서고 윤석열의 앞잡이가 된 장재원의 벤츠 몰면서 음주 운전하는 것이 취미인 아들은 아무리 범법행위를 되풀이해도 여전히 대낮에 활개치고 다닌다. 월급 233~383만 원으로 6년 근무한 아들이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어도 아무 부담이 없고 그 모든 책임은 이재명에게 있다고 큰소리치는 곽상도는 이름 그대로 상도에서 태어나 상도의 중심인 대구를 지역구로 했으니 다음 총선에서도 무사히 당선될 것이다. 국민의힘 간판이라면 빨갱이 출신도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판 아니던가?
왜 한국의 정치판이 이리 더러워졌을까? 아니 원래 더러웠다. 그러니 더 더러워진 것인가? 과거에는 이리 뻔뻔하고 내로남불인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다. 곽상도는 전직이 검사. 장재원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상도에서 국회의원을 하는 잘 나가는 집안이다. 아버지가 금수저이니 2002년 30대 중반부터 아버지가 설립한 부산을 거점으로 한 동서학원의 간부로 재직하였다. 그러니 무서울 것이 무엇이랴. 동서학원은 족벌경영, 총장 세습, 공금 유용으로 악명을 떨치던 무늬만 ‘교육재단’이었던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경상도에는 이런 인간도 3번이나 국회의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MZ세대의 선택적 분노는 이 사건에도 적용된다. 아무도 화내지 않는다. 물론 불만을 터뜨리지만, 그 불만이 2016년과 2017년에 타오른 촛불로 승화되지는 못한다. 사회적 공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인데 MZ세대는 그러한 필수적인 것, 이른바 사회적 공동선에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는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유교 국가의 집단주의에서 선진국의 개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출현한 한국의 MZ세대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를 대체할만한 윤리 교육, 특히 사회윤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이런 사달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교 윤리가 외적인 통제를 통한 인격 수양을 강조한 데 비해 서양 선진국의 사회윤리는 윤리적 결단에서 나오는 권리와 의무의 행사를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의 MZ세대는 그런 윤리를 배운 적이 없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해서 잘 먹고 잘살라는 말만 듣고 자란 세대이다. 그러니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게임들은 초딩들도 다 아는 규칙만 따르면 된다. 그렇게 순종하면 456억도 벌 수 있다. 한국 사회에 태어난 MZ세대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규칙, 곧 국영수 만점을 받고 명문대학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대기업 총수가 제시한 원칙, 곧 최고의 수익 창출이라는 원칙에 따라 충성스러운 직원으로서 살면 먹고살게는 해주겠다는 규칙에 충실하는 것 이상을 배운 적이 없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총을 맞게 되었으니 양보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살아남으면 보상 액수가 점점 더 커지니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욕심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1억을 모으면 10억을 모으고 싶고 10억을 모으면 100억을 모으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그래서 이를 적절한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절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작금 한국의 이른바 엘리트들, 곧 정부 고위 공무원, 국회의원, 판사, 검사, 의사, 변호사, 교수를 가리지 않고 비윤리적인 일에 손대는 것을 경쟁하다시피 한다. 법을 잘 아는 법꾸라지답게 법의 경계선에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매우 뻔뻔하다. 장재원과 곽상도는 ‘재수 없이’ 걸린 케이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 죄의식도 없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이유는 MZ세대가 이들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정의와 법에 위배되어서가 아니라 질투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노엘이 음주운전 한 위법 행위보다는 그가 탄 벤츠에 더 관심이 있고, 곽병채가 수상한 경로로 취업한 것보다는 50억을 받았다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MZ세대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모가 금수저가 아닌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꼰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이 곽상도가 아니어 미안하고 장재원이 아니어 미안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윤리도덕이 사라진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에서 버티고 싶은 속성이 어디 가겠는가?
한국이 경제 규모로 세계에서 이제는 상위 10위에 들고 K-pop 문화가 세계적으로 잘 팔리는 모습을 보고 저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되지만, 과연 이런 나라가 선진국인가? 그런 질문을 한 번쯤은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한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용어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다. 한국의 사회적 상황이 개선되지도 않았음에도 요즘은 ‘플렉스’가 사회적 화두이다. 연예인들은 방송에 차례로 나와 화려한 집 자랑에 몰두하고 고가의 외제 자동차를 자랑하며 ‘플렉스’ 한다. 억울하면 너희들도 돈 벌어보라는 듯이.
이럴 때 자주 등장하는 ‘외국’은 어떤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외국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 누구와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느끼는 것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한국 사회에 퍼진 집단의식이 ‘합리적인’ 비교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국 사례를 들 경우 가장 많이 나오는 반응은 그런 나라에 너나 가서 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그런 나라처럼 개선하자는 생각은 안 한다. 그래서 노엘이 벤츠 몰고 음주 운전해도, 30대 초반의 곽병채가 50억의 퇴직금을 받아도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아야 할 MZ세대가 특히 조용한 것이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 사회에 널리 퍼진 그 오징어 게임 말이다. 강호동이 과거 게임 중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행시킨 말. ‘나만 아니면 돼.’ 벤츠 몰고 음주 운전하고, 50억 퇴직금 받고, 다량의 마약을 밀수해도 금수저 아빠의 찬스를 살려 나만 안 걸리면 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회를 MZ세대는 꼰대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한 사회의 윤리적 건전성과 발전은 전적으로 MZ세대와 같은 청년들이 살아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살아 있는 청년이 꼰대들과 맞서 투쟁하며 변증법적인 사회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취업 전부터 이미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한국의 MZ세대에게는 바라기 힘든 참된 ‘플렉스’다. 그래서 한국에는 이제 거짓 ‘플렉스’만 난무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많은 책임은 MZ세대에게 있다. 분노하지 않는 MZ세대는 더 이상 사회 발전의 역동성의 근본인 청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꼰대인 내 눈에도 온통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MZ세대만 보인다. 2,500여 년 전 디오게네스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헤매며 ‘인간’을 찾았듯이 나도 이 나라에서 ‘청년’을 찾아 나서야 하나? 씁쓸한 일이다. 그러나 어쩐지 가망이 없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지극히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하는 MZ세대만 보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