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스스로 만든 ‘Neo-골품제’가 유감이다?

타인은 나를 소중하게 만들어 준다.

by Francis Lee

교육방송에서 SKY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이 농어촌 특례로 들어온 동급생을 차별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SKY 대학 안에서도 자기들 스스로 서열을 정하여 강남 정시가 성골이고 농어촌 특례로 들어온 이들은 육두품으로 갈라치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찰해 보니 MZ세대는 학력만이 아니라 재산, 외모, 능력을 기준으로 골품제를 만들고 있다. 어찌 된 일인가? 차별은 이기주의만큼이나 인간의 본능에 속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차별당하기 싫어서 차별하는 것인가?


신라시대의 골품제는 지배층이 권력을 공고화 하기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제도이다. 그리고 그 척도는 전적으로 부모의 ‘수저’다. 그런데 21세기 MZ세대들은 지배층도 아닌데도 외적 강요 없이 스스로 새로운 골품제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적용하고 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부모의 영향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많은 부모는 임대주택에 사는 애들과 놀지 말아라. 공부 못하는 애들과 놀지 말아라. 못생긴 애들과 놀지 말아라 하며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물론 정의로운 부모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 스스로가 패거리 문화와 왕따 문화를 만들어 자기 집단에 적용한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가치관의 영향은 아동의 정서와 가치관의 발달에 제한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곧 초기에만 강력한 영향을 미칠 뿐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7살 정도 이후에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지 못한다.


비유를 해보자. 인간의 몸에는 매일 암세포가 생성된다. 그러나 그것이 질병 수준으로 발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체의 방어 기제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암세포가 생기는가? 인간의 세포 자체가 증식을 하기 때문이다. 이 증식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세포가 분열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살기 위해 증식을 하는데 문제는 이 증식이 무한대로 이루어지면 질병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세포 안에는 무한 증식을 막는 메커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 내적 외적 요인으로 이 메커니즘의 작동에 문제가 생기면 세포가 무한 증식을 하는데 우리는 이를 암세포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별의식은 이기주의와 마찬가지로 내재하고 있는 인간의 속성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외적인 요인으로 촉발되어 겉으로 드러나는 것 뿐이다. 성선설을 신봉하는 이들은 반대하겠지만 20세기 이후 고도로 발달한 심리학 연구의 결과를 볼 때 인간은 결코 본래 선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의 실험이 중요한 참고가 된다. 평범한 사람이 폭력 구조 안에서 얼마나 쉽게 권력에 복종하는지를 알려준 이 실험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의 근원적으로 사악함은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 실험의 결과를 놓고 특히 윤리학자들이 격렬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실험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지만 이후에 많은 단체와 학자들이 비슷한 실험을 되풀이 한 결과 밀그램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특히 유명한 것이 2011년 discovery channel에서 방영한 ‘How Evil are You?’라는 제목의 다큐이다.


한 때 로크(John Locke, 1632~1704)가 정리한 이론 ‘tabla rasa’, 곧 인간의 마음이 선도 악도 아닌 무지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닌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 영혼과 지성이 순수한 백지의 상태로 있기에 후천적인 교육으로 ‘좋은 것’을 주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입식’ 교육이 득세를 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에게는 타고난 자유의지와 더불어 선천적, 나아가 선험적인 ‘성향’이 처음부터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말하는 선험적 인식능력이 인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컴퓨터 시스템에 비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데스크탑 컴퓨터에는 Microsoft사의 Windows 시리즈의 OS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작동되기 전에 컴퓨터를 켜면 가장 먼저 BIOS가 작동한다. 아무리 훌륭한 Windows나 화려한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도 컴퓨터 하드웨어에 처음부터 고정적으로 장착된 ROM 안에 들어있는 BIOS가 없으면 부팅 자체가 안 된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두뇌는 단순히 외적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범주와 같은 것이 처음부터 들어있어서 그 감각을 해석하고 궁극적으로 개념화한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가 외적 감각 소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지식만이 아니라 가치관도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그런 컴퓨터의 BIOS와 같은 인간의 선험적 능력이 고장날 경우 ‘정상적’인 사유와 판단은 당연히 불가능해진다. 결국 인간의 사유도 인간의 몸안의 ROM과 같이 뼈속에 새겨진 선천적인 기질로부터 시작된다. 거기에서 모든 input과 output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가치중립(value-free), 곧 불편부당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력을 타고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사유를 규정하게 되어 있다. 마치 언어가 사유를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시 MZ세대의 Neo-골품제로 돌아가 보자. 21세기의 MZ세대가 천년도 훨씬 전의신라시대 때에 못지않게 골품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근원적으로는 생존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에서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MZ세대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신라 시대 왕족들이 골품제도를 만든 근본적인 이유와 동일하다. 그들도 운이 좋아 왕족이 되었지만 자신의 ‘실력’만으로는 그 권력과 영화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불교의 승려들이 주장하는 대로 절도 짓고 탑도 세우고 하면서 영적 세계의 도움을 간구하였다. 사실 불교는 세속의 영화와 전혀 무관한 종교라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 잘 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영적인 도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것만 바라고 버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정치사회적 제도를 구축하여 기득권의 ‘유지’를 위하여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제도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 선덕여왕의 후사가 없자 성골이 독차지한 왕의 자리가 진골에게도 허용되고 선덕왕 이후로는 진골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이 질서도 흔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신라가 망할 때까지 1,000년 동안 골품제의 근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신라의 이벌찬에서 시작하여 조위에 이르는 17등급의 관직 가운데 금수저 출신이 아니지만 ‘능력’이 있는 경우에도 아찬인 6두품의 지위가 끝이었다. 타고난 뼈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하의 두품들은 성골과 진골을 감히 넘보지 못하였으나 6두품은 권력의 중심에 ‘실력’으로 거의 다가갔으니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왕건이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자 6두품 세력들이 그를 지지한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골품제가 단순히 관직의 차이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이도 규정했다는 사실에 있다. 성골은 자기가 원하는 평수의 집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골은 가옥의 크기가 15평 이상을 소유할 수 없었다. 심지어 4두품은 12평을 넘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담장은 2미터를 넘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장신구도 금, 은, 구리로 만든 것은 착용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규모가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1품에서 9품까지의 관직 등급과 서민을 포함하여 모두 10등급으로 신분을 나누고, 1품 35負로부터 서인은 2負까지 신분별로 집터의 크기를 제한하였다. 1負는 40평(133㎡ ) 정도이다. 그러니 1품은 1,400평(4,600㎡), 서민의 경우 80평(266㎡) 정도의 집터를 소유할 수 있었다. 역시 통이 큰 조선이었다. 그런데 사치를 참지 못하는 세종대왕이 1431년부터 집의 間도 제한하였다. 왕의 형제인 대군의 집은 60間, 왕자와 공주는 50간,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어기지 못하도록 經國大典과 大典會通에 법제화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권문세도가는 100間 넘는 집을 소유하면서 위세를 떨었다. 사실 그 당시 우주의 중심인 明을 ‘섬기는’ 조선에서는 100間 넘는 집을 소유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이런 짓을 한 것이다. 답답한 조상님들이었다. 그 많은 방을 다 돌아다닐 시간이나 있었을까?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리 넓은 집에 자기와 식구들만 모여 알콩달콩 살아서 행복했을까?


또한 신라에서는 남자들이 신분을 과시하느라고 옷의 색깔 구분과 더불어 장신구를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기에 이는 자존심과 연결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농업과 교통의 중요한 수단인 말도 2마리 이상 소유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도 별다르지 않았다. 엄격한 복식 제도로 겉모습만 보아도 사회적 계급이 분명히 구분되었다. 군대에서 계급장이 선명하게 노출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바로 가장 천한 기생이었다. 이들은 천민임에도 사치가 허용되었다. 고관대작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니 보기에 좋아야 했나 보다. 화려한 장신구와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난한 집의 여자들이 차라리 기생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일 수도 있겠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증상을 보이는 여자들 보인다. 법으로 엄연히 금지되어 있지만 창녀 생활을 하면서 명품으로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니 말이다.


골품제와 계급제도의 ‘유구한 전통’이 있는 21세기 한국에서는 여전히 유치원 때부터 임대주택에 사는 아이들, 곧 4두품의 아이들이 50평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아이들, 곧 성골의 아이들과 섞이면 안 된다. 그리고 강남의 ‘요지’에 한 채에 수십억 원, 수백억 원 하는 문자 그대로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위세를 떠는 이들의 모습은 조선 시대에 100間 집을 자랑하는 조상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국민의 40%가 집이 없어서 절절매는 것은 이들에게 ‘타인’의 일이다. 능력이 있으면 ‘플렉스’ 해도 되고, 아니면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물론 아버지의 직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군대나 다방만이 아니라 사회 어디서나 자동적으로 나오는 질문 아닌가? ‘아버지 뭐하시니?’ 이는 ‘어디 사니?’와 ‘무슨 대학 나왔니?’와 더불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유효한 금수저 판별법이다.


신라가 935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하였으니 철저한 신분에 따른 계급 사회가 1,000년 동안 확고히 구축되었고 그 이후 다시 1,000년 정도 세월이 흘렀다. 사실 신라시대의 계급주의를 극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게다가 고려와 조선 또한 철저한 계급주의 사회 아니었나? 한반도에서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대에도 구시대적인 계급주의는 무늬만 민주주의 제도인 사회 안에서 지속되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1998년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당선 이후로 한국에서 계급주의 타파와 더불은 평등사상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골품제도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MZ세대가 새로운 골품제를 스스로 만드는 모습을 보면 놀랍지도 않다. 선천적으로는 뼈속에 새겨진 대로 그리고 후천적으로는 부모와 사회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것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맹모삼천지교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한반도 전체에 골품제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나타난 Neo-골품제도의 잣대는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큰 변화는 없다. 다만 과거 신라시대에는 뼈가 정치사회적 지위와 재산의 규모를 규정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역으로 지위와 재산의 규모가 사회적 계급을 규정하게 되었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것이다. 그래서 ‘개같이 벌어서라도 정승같이 사는’ 패러다임이 고착되고 있다. 그러나 골품제인 것은 변함이 없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명품’도 여전히 신분의 표지가 된다. 신라시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 명품에도 다시 계급이 있다. 그래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짝퉁’이라고 걸치고 버텨야 하는 사회이다. 신라시대에는 통용된 장신구와 복식의 차별이 21세기 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신라에서는 왕족에 의해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으나 이제는 ‘평민’들이 스스로 계급을 정한다. 에르메스, 샤넬, 반클리프 앤 아펠카, 까르띠에, 펜디, 구찌, 입생로랑, 디오르 ... 처음에는 옷, 구두, 가방 위주로 팔더니 장사가 잘 되니 이젠 이런 이름으로 발 닦는 걸레까지 만든다. 그러면 특히 중국과 한국의 ‘여성’들이 ‘정신 없이’ 구입해왔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고 있다. 이제는 남성들도 덩달아 명품을 몸에 두르고 다닌다. 신라시대 남성들의 장신구 중독 증상이 드디어 신라 멸망 후 1,000년 만에 21세기 한국 남성들 사이에서 부활하는 모양이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 법인가?


하기는 옷차림과 화장술의 유행은 돌고 돌지 않던가? 창의력이 부족한 자본가들은 기억력이 짧은 소비자가 잊을만하면 과거에 마르고 닳도록 팔아먹은 것을 ‘retro’라는 명칭으로 되팔지 않는가? 얼마나 좋은가 디자인비를 절감하고도 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으니. 아무리 비싸게 팔아도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며 사는 소비자가 널려 있으니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리고 비쌀수록 그래서 살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더 적을수록 좋다는데 이야말로 황금 시장 아니겠는가?


그런데 궁금하다. 신라시대의 골품제는 국가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MZ세대가 만드는 Neo-골품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신라시대의 골품제가 있기에 1000년 왕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MZ세대가 만드는 Neo-골품제는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저 플렉스를 위한 플렉스인가?


21세기 한국이 일단 ‘실력’으로 플렉스하는 사회이니 Neo-골품제는 분명히 실력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력이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수능 실력이다. 한국의 MZ세대가 명문대 입시를 위해 ‘사육된’ 경험밖에 없으니 이는 당연하다. 그 다음은? 직업이다. 아무리 ICT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그것도 안 되면 대학을 포함한 교사의 이른바 ‘사자 돌림’ 직업이 있어야 플렉스할 수 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돈이다. 그리고 사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 돈이 앞의 두 가지를 능가하는 ‘참 실력’이다. 한 사람의 능력은 결국 돈의 양으로 평가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이니 말이다.


그래서인가?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유독 심하게 모든 것을 돈으로 정량화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묻는 ‘얼마짜리니?’라는 질문이 개인적, 사회적 가치의 절대적인 척도가 된다. ‘집이 얼마짜리니?’, ‘연봉 얼마니?’, ‘그 차 얼마짜리니?’, ‘그 가방 얼마짜리니?’ 심지어 어떤 업적을 이루어도 돈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 사회이다. 손흥민의 ‘몸값’이 수백억이다. 어느 여배우의 다리가 수 억짜리이다 라고 돈으로 해설을 해야 이해가 잘 된다. 그리고 코로나로 홍수로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을 받았다고 하면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손해가 1,000억에 이른다고 하면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잘 이해가 된다.


이것을 철학적 용어로 수학화(Mathematisierung)라고 한다. 사실 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는 미국의 실용주의에서 나온 사유의 유물론적인 퇴행이다. 미국의 계량경제 이론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수치로 표현되어야만 올바로 이해가 된다는 과학주의의 신화가 사회 전반에 주입된 결과이다. 이러한 수학화의 근간은 물론 과학주의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수학화하려는 경향은 근대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현상학자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말하는 ‘수학화의 오류’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쌀밥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보면 쌀은 탄수화물이 주성분인 화합물이다. 탄수화물은 궁극적으로 탄소 수소 산소라는 화학적 원소로 분해된다. 그러나 그런 수준까지 분석을 하다 보면 내가 원래 알고 싶었던 쌀밥은 사라지게 된다. 그 김이 모락모락나고 아는 사람과 함께 밥상에 둘러 앉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 밥 말이다. 그런데 그런 화학 분자들의 수학적 결합은 더 이상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수준으로 분석이 되면 쌀밥의 철학적 의미도 사라지게 된다. 곧 예를 들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 더 나아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함께 나눌 따뜻한 밥이 아니라 세포의 활성화를 위한 원소가 되어 윤리적 책임과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 중심의 세계관과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 20세기 전반의 양차대전 이후로는 소위 말하는 상식적 세계관이 갈릴레이 (Galilei) 적인, 계량화된 물리학적인 종류의 것을 주된 모범으로 삼아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자연의 수학화 때문에 ‘본래의’ 자연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게 된 인간은 수학이라는 렌즈로 왜곡된 시각으로 심리주의나 마찬가지로 수학주의적인 세계관으로 인간의 본질을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학주의적 수학화는 원래의 생생한 살아있는 세계의 의미의 구조를 결코 보지 못하게 만든다. 수학적 명증성이란 단지 현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생각해 보자. ‘0’이라는 숫자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없다. 다만 있다고 가정하고 사용하는 것뿐이다. 숫자 ‘0’의 존재 증명은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후설이 말한 대로 수학적 명증이 단지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1901-1976)의 플랑크 상수(Plank constant)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어진다. 이 수식은 ΔE * ΔT ≥ ћ 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ΔE 는 가상적 입자의 에너지의 불확정성이고 ΔT 는 시간의 불확정성이다. 이 두 가지는 반비례의 관계에 있으며 이 불확정성은 플랑크 상수 ћ 보다 작을 수는 없다. 이 관계는 가상적 입자 (ΔX)의 위치와 운동량 (ΔP) 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위의 수식 자체는 명증적이지만 그 내용은 불확정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곧 엄밀하고 객관적인 수학으로 설명된 이 자연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영역을 벗어나는 현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연 현상 자체가 불확실한 것일 뿐이라는 모순된 상을 제시할 뿐인 것이다.


다시 골품제로 돌아와 보자. 세계를 과학주의를 바탕으로 수학적으로 이해하고 사회적 관계를 자본주의의 근간인 돈에 환원하여 이해하는 현상은 피상적으로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유물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현재 MZ세대의 Neo-골품제는 신라시대의 오리지널 골품제에 그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골품제의 근간에는 자기보호 본능이 있다. 그러한 외적인 제도를 만들어서 결국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생존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시대나 21세기 한국이나 이는 마찬가지이다. 요즘 MZ세대가 YOLO를 하고 FIRE족이 되고자 하며 나를 ‘위로하느라고’ 명품을 소비하는 것도 이 생존 본능과 직결된다. MZ세대가 유행어로 만든 말이 있다. “나는 소중하니까.” 그렇다. 우리 인간은 소중하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어 근원적인 존엄성을 존재를 지닌 존재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소용없는 주장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인 일반인들이 답할 수 있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냥 나는 소중하니까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본래 이기주의적인 인간에게는 “네가 왜 소중하냐?”는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나는 왜 소중한가?”이 질문에 대하여 MZ세대는 근원적인 대답을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 나오는 답은 정해져 있다: “내 부모가 나를 소중하게 키웠으니까.” “잘 생겼으니까.” “공부를 잘 하니까.” “돈을 잘 버니까.” “인기가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능력’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는 근원적인 답이 아니다. 내가 나를 아무리 소중하게 여겨도 아무 소용이 없다. 진정으로 소중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닌 남이 ‘진심으로’ 소중히 여길 때 확인된다.


그런데 근원적으로 남은 왜 나를 소중히 여기는가? 잘 생겨서? 돈이 많아서? 금수저 집안이라서? 유명해서? 인기가 많아서? 다 아니다. 이는 부러움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변수가 될 수 있기에 궁극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데에는 부족한 이유이다. 남이 진심으로 나에게 소중한 경우는 딱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에게 실존적 도움이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 의미는 타자의 존재에 규정되는 것이다. 곧 타자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나의 진정한 가치는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Neo-골품제가 아니라 참다운 소중함의 정상에 서려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가장 많아야 한다.


이러한 나와 타자의 역동적 관계는 이미 ‘타자의 철학자’로 알려진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설파하였다. 프랑스 출신 유대인인 그는 독일에서 현상학의 시조인 후설과 실존주의의 대가인 하이데거의 제자로 1930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후설 현상학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탈무드를 연구하면서 독자적인 철학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1961년 프랑스에서 <전체성과 무한>으로 또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유대교, 현상학, 실존주의를 절묘하게 결합한 그의 철학은 20세기 중반 프랑스 철학을 이끌었다.


유럽의 철학은 주로 자아가 객체화된 타자를 관찰 분석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 타자가 단순히 관찰의 대상인 객체가 아니라 나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의 전환은 서양 사상가의 시각으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타자가 나의 관심과 사랑이라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다분히 유대교 전통의 종교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도구적 이성만을 중시하고 자본주의에서 인간마저 생산 수단으로만 간주하여 인간 자체를 하나의 통일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특수한 능력, 곧 노동력만을 빼앗아 쓰고 소용이 없으면 결국 버리는 신자유주의적인 비인간적 행태에 맞서는 데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보다 돈, 외모, 학력, 능력에서 모자라는 타인은 배척이나 왕따의 대상이 아니라 관심과 배려의 대상이라는 철학은 사실 기독교 전통에서 강력하게 전해져 온 것이다. 기독교 사회윤리에서는 이를 연대성과 보조성의 원리라고 한다. 곧 내가 타인, 특히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타인을 돕는 행위는 자선이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 그러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타인의 존재 자체가 내게는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의무를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양에서 여전히 조건 없는 기부, 입양, 특히 장애아 입양과 같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화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내가 잘나거나 여유가 있어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이는 쉽지 않은 결단이다. 내가 뼈 빠지게 번 돈, 밤잠을 설쳐가며 공부하여 들어온 대학은 나의 배타적 권리이기에 남이 어려워도 ‘내 돈’을 줄 수 없고, 농어촌 특별 전형으로 ‘거저’ 들어온 애들과는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오래전 영화에 나온 유명한 대사대로 모든 것에 대하여 ‘얼마면 되니?’라고 묻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나의 소중함을 논리적으로 추론해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 MZ세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Neo-골품제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 의미를 타자에서 찾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에서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대동(大同)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정신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는 1997년의 IMF 사태, 2008년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제적 위기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인터넷 문화, 특히 2000년대에 본격화 된 스마트폰 문화가 확산되면서 의식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났다. 곧 각자도생의 분위기에서 공동체 의식이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의 시장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내다 팔아야 하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하자 모두가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내가 올라가지 않고 도태되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에 오히려 이제 타인은 지옥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Neo-골품제는 단순히 孝 사상의 강조로는 결코 해결이 안 되고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으로도 당장 실마리를 풀어나가기는 어렵다. 이런 종류의 서양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천 년 이어져 온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기독교가 보여주는 모습으로 이른바 ‘X독교’라는 비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기독교에 대한 바른 이해는 매우 난감한 일이다. 그럼에도 타자의 소중함에서 나의 소중함을 이끌어 내는 작업이 Neo-골품제 해결의 단초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더 나은 방법이 잘 보이지 않기에 말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말초적 감각과 시각적 화려함에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매혹된 MZ세대의 입맛에 맞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꼰대의 굳은 머리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help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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