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희망고문은 사기인가?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by Francis Lee

종교에서 바라보는 삶 자체는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를 흔히 종교에서는 진리와 연계하지만 사실 득도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생물학을 잘만 배워도 그런 ‘진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생성 소멸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생로병사로 규정하는 데 결국 같은 말이다. 한 생명체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내린 '쉬운' 결론이다.


그런데 누구나 살다 보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커다란 고난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생각한다. 사실 죽으면 모든 주관적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이는 고통의 극복이 아니라 도피일 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극복이나 도피나 결과는 동일하다. 결국 고통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으니 말이다. 그 고통 중에 기묘한 것이 바로 이른바 '희망고문'이다. 그리고 요즘 한국의 MZ세대가 특히 이 희망고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들인다. 그러나 사실 희망고문은 MZ세대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에서는 희망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서양에서 원래 희망은 매우 불길한 것에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로 알려진 것에서 희망이 나왔기 때문이다.


‘판도라’(Πανδώρα)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그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기 전 신들에게 유명한 ‘판도라의 상자’를 받았다. 판도라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것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판도라의 상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건 담는 상자가 아니라 도자기로 만든 병이다. 그런데 16세기 유명한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도자기로 만든 병, 곧 피토스(πίθος)를 픽시스(πυξίς)로 착각하여 상자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워터하우스와 같은 유명한 화가조차도 판도라가 도자기 병이 아닌 나무로 된 상자를 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뭐 그러나 병이면 어떻고 상자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신들이 그 상자를 열어보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호기심 넘치는 판도라는 결국 열었고 그 안에서 인간이 당하는 온갖 고통이 나오게 되었다. 판도라가 놀라 급히 상자의 뚜껑을 닫았으나 다 나가버리고 희망만 남아 있었다. 판도라는 그마저도 막을 수 없었다.


도대체 판도라는 왜 그런 선물을 받고 더 나아가 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온 것일까? 그리고 희망은 정말 희망일까? 그리스어로 희망은 정확히 ‘희망고문’으로 번역되는 의미를 지닌다. 곧 그리스 신화에서 원래 희망은 인간에게 기쁨보다는 고통스러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사상에서 왜 희망은 고통일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는 기원전 8세기경에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 헤시오드(Hesiod)의 1,022행에 이르는 서사시인 <테오고니아>(Θεογονί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번역된 제목은 <神統記>인데 일본 아이들이 번역한 것을 그냥 그대로 가져가 쓴 것이다. 마치 미국의 President를 일본이 大統領이라고 번역한 것을 우리나라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神谱>로 번역하여 사용하는데 차라리 이것이 원뜻에 더 가깝다. 그리스어로 Θεογονία는 신을 의미하는 θεός와 생성을 의미하는 γίγνεσθαι의 합성어이다. 그러니 직역을 한다면 신들의 족보쯤 되겠다.


다시 판도라로 넘어와 보자. 물론 <테오고니아>에 판도라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인 800편의 시로 이루어진 <일과 날>(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과 직접 관련된 두 인물인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를 묘사한 것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시에서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죄에 대한 징벌로 신이 인간에게 보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런 신의 간계를 파악한 프로메테우스는 동생인 에미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맞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실 판도라가 이 지상에 오기 전까지는 인간에게는 늙고 병들어 고통을 당하다 죽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고통이 심한 경우 죽는 것이 나은 일인데 희망이 인간의 그 고통을 연장시켜서 고통이 극에 이르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희망은 고문이 되는 것이다.


물론 판도라의 전설에 대한 해설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기독교가 유럽의 모든 것을 지배하던 중세에 희망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판도라의 희망은 고대 그리스어 ἐλπίς로 가망이 없이 기대하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단어를 예수의 구원과 연결시켜서 전혀 다른 해석을 이끌어 냈다.


신약성경 로마서 8장 24절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τῇ γὰρ ἐλπίδι ἐσώθημεν: ἐλπὶς δὲ βλεπομένη οὐκ ἔστιν ἐλπίς: ὃ γὰρ βλέπει τίς ἐλπίζει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희망은 전혀 희망이 아니다. 이미 가진 것을 누가 희망하겠는가?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이 어차피 힘들 수밖에 없기에 희망을 오로지 예수의 구원에 두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결국 절망에 이르는 희망고문으로 머문 인간 실존의 상황을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개입하여 반전의 역사를 이끌어낸 것이다. 바울이 이러한 확신을 가진 것은 그 자신의 삶이 개종 이전에도 쉽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키가 작고 구부정하며 대머리에 빨간 머리를 한 바울은 여성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여자에게 인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유대인 남자는 16세 정도에 혼인을 한다. 그런데 바울은 평생 독신이었다. 그러니 인생이 재미없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혼인을 해서 후손을 보는 것을 신의 최고의 계명으로 여기는 유대인이 말이다. 그런 그가 개종 이후 예수에게서 희망을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곧 천국을 기다리는 자가 품는 그런 희망 말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물리적인 하늘에 있는, 죽어서나 가는 나라는 아니다. 예수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 실현되는 것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는 예수의 강생으로 이미 시작되었으나 완성이 되지 않은 것뿐이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가 말하는 하늘나라는 신이 통치하는 세상을 의미한다. 그것이 꼭 물리적인 하늘 위에 있는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통치는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에 나오는 대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인간이 죽고 나서 가는 하늘나라를 묘사한 내용이 없다. 다만 신이 하늘로 들어 올린 에녹과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이야기는 나오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이고 신화적인 내용일 뿐이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늘나라는 복음서에 따라 다른 언어로 묘사된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신국(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이, 마태복음에서는 천국(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이 더 흔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 개념은 완전히 일치하는 의미를 지녔다. 철저한 유대교 분위기에 있던 마태는 경건한 유대인답게 신의 이름, 곧 '야훼'(יהוה)를 직접 이으로 발언하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었기에 '신' 대신 '하늘'을 사용한 것뿐이다. 예수 생존 당시 유대인들은 하늘을 다스리는 신이 궁극적으로 지상도 다스리게 될 것으로 믿었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신의 뜻을 받들어 불의한 로마제국의 통치를 물리치고 유대인 지역에 신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학수고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 신화 차원의 희망에 불과하였고 오히려 예수가 죽은 지 40여 년 만인 77년 유대인들의 마을과 도성은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유대인이 다시 그 땅에 모여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으로 유대 국가를 새로 건설하기까지 1871년이나 걸렸다.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데에는 이렇게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이 긴 시간 동안 유대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구원을 받은 것인가? 물론 과거에도 유대인 왕국은 멸망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례가 있었다.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멸망시켜서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지 200여 년 만에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신의 통치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초토화시킨 유대 국가가 다시 서는 데는 그보다 10배나 긴 세월이 필요했다. 유대교의 희망은 인간에게 거의 초인적인 인내심을 요구한다. 기독교의 희망은 아직 진행 중이니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예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 200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독교의 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신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좀 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러니 판도라의 희망이나 기독교의 희망이나 현대인이 보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어 보인다. 특히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말이다. 더구나 집값, 갑질, 상대적 박탈감, 경제적 곤궁, 불확실성으로 매일 전전긍긍해야 하는 한국의 MZ세대에게는 미래의 희망이 아예 없어 보인다. 그래서 40대 이전에 30억을 모아 시작하는 YOLO의 삶을 궁극적 대안으로 찾는 것은 아닐까?


사실 조선 시대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최근세사, 곧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오히려 기독교적인 희망이 있었다. 언젠가 이 독재가 무너지는 날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해방된 천국이 되리라는 희망 말이다. 그러한 희망으로 반독재 투쟁은 힘을 얻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이 땅이 천국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독재보다 더 사악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무한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서로에게 적이 되었다. 그래서 독재가 사라진 땅이 되었지만 행복의 나라가 되지는 못하였다. 희망 고문이 계속되어야 하지만 지쳤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는 않는다는 심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희망을 꿈꾸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희망을 버리고 대신 현실을 택한 MZ세대는 어찌 보면 더 현명한 결단을 내린 것일 수도 있다. FIRE족이 되든 큰 욕심 없이 소확행을 꿈꾸는 YOLO족이 되든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나은 일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자본가의 영원한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탈출이 나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MZ세대는 희망고문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삶을 즐기되 경제력 확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꼰대의 눈에는 계획이 없고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프레임에 갇혀버린 MZ세대가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이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고용인은 무한 책임의 노예다. 자본가와 일방적 계약을 맺은 임금노동 노예인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 곧 자본이 아니라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 된 시대에 노예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노예가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아프면 병을 치료해 주었다. 농업 시대의 주인이 반드시 인본주의적이기보다는 생산 도구의 유지가 궁극적으로 주인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주인’은 더 이상 노예의 복지에 직접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 부담을 모두 국가에 떠넘기고 자본가는 이익만을 거두어 간다. 그리고 만약 노동자가 병들거나 능력을 상실하여 생산성이 떨어질 경우에는 가차 없이 해고하게 된다. 과거 농노들과는 달리 현대의 노동자들을 고용주가 보호해야 할 법적 책임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병들고 무능해진 노동자는 제도적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지만 이마저도 한국의 상황에서는 생존 자체도 위협하는 수준이다. 아직 선진국 수준의 사회적 안전망이 확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에서도 경제력이 상위 10위 안에 드는 국가가 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 수립된 신생국 가운데 유일하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이다. 그러나 국가의 부가 증가한 것에 비례하여 개인의 삶이 윤택해지지는 못했다. 2019년 기준 빈곤율이 16.7%로 OECD 국가 가운데 하위 8위를 차지했다. 여기에 비정규직, 실업률에서도 OECD 평균보다 모두 열악한 상황이다. 흔히 비교되는 일본에 비하여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특히 15~29세의 청년실업률은 OECD 국가 가운데 7위나 된다. 이 또한 독일과 함께 청년 실업률이 10% 미만인 일본에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이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이 OECD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70대 중반까지 노동을 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저임금, 비정규직에라도 종사해야 겨우 생계가 유지되는 나라이다. 그리고 일을 완전히 손을 놓은 이후의 여생은 15년 정도로 OECD 평균인 22년보다 현저히 낮다. 이 수치에서 한국이 최악이다. 한국 다음으로 열악한 일본의 경우도 60대 후반까지만 일하고 20년 정도를 '쉬면서' 더 살아간다.


결국 죽는 날까지 노동에 그것도 실질 임금이 줄어든 사회에서의 노동에 ‘시달리는’ 삶은 희망이 없다. 그러니 기운이 남을 때 살 기회를 찾아 나서는 것은 '희망고문'에서 고문을 떼어내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과연 MZ세대를 중심으로 문자 그대로 들불처럼 번지는 이 FIRE족과 YOLO족 되기 붐이 얼마나 진행될 것인지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당분간은 한국 사회의 집단의식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자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오는 경우 대부분 기존의 임금 수준보다 낮은 수입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로또와 같은 주식이나 코인 시장을 기웃거려 봐도 사실 희망이 크지 않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자금이 마련되면 미련 없이 시장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일정 수준의 자금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조선일보가 2021년 9월에 SM C&C 설문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하여 조사한 결과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30~60대 남녀 1,206명에게 한 ‘주택을 제외한 현금 자산이 얼마나 있으면 당장 은퇴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전체 응답자 가운데 가장 많은 25.1%가 10억 원이라고 답하였다. 그런데 30대의 26%는 50억 원이라고 답하였는데 비하여 60대의 30%는 10억 원만 있어도 은퇴한다고 답하였다. 100억 원이라고 대답한 연령층도 30대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60대의 꼰대가 되어보면 집을 제외한 순수 유동 자산으로 10억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하나은행이 2021년 4월에 발표한 ‘대한민국 40대가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40대의 총자산은 평균 4억 1천만 원이다. 이 가운데 순수 금융 자산은 7천만 원이다. 그런데 여기에 평균 가계대출 잔액은 8천만 원이다. 결국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나 다름없는 것이다. 결국 40대의 52%는 총자산이 3억 원 미만이고 10억 원 이상은 12%에 머물렀다. 게다가 44%는 무주택자였다. 안심하고 FIRE족이나 YOLO족이 되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는 재산이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노동에 시달릴 밖에 도리가 없다.


한국인 전체의 경우는 어떤가?


크레디트 스위스 투자은행이 2021년 6월에 발표한 ‘글로벌 웰스 리포트 2021’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 성인 1인당 평균 순자산은 79,952달러(90,889,433원)이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약 2억 원도 안 된다. 순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사람은 한국에 105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인구의 50분의 1, 곧 2%도 안 된다. 그런데 이 정도라도 해도 한국은 세계적으로 보면 19위에 해당된다.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100만 달러의 순자산을 지닌 이들은 56,084,000명에 불과하다. 한국 인구보다 약간 많다. 그런데 이는 전 세계 인구의 1%도 안 되는 숫자이다.


이런 통계를 보면 순자산이 10억 원 정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30~40대에 FIRE족을 꿈꾸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재산이 많은 연령층은 50대 이상이다. 특히 50대의 경우 상위 1%는 36억 원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0.1%는 100억 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결국 무작정 빨리 은퇴한다고 해서 무조건 희망 고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FIRE를 해야지, 일정한 나이를 정해서 돈을 모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산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거나 확실한 수입원을 마련하지 않고 은퇴를 하는 경우 오히려 자산이 줄어들어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통계적으로도 2억 6천만 원 미만의 순자산을 가진 사람은 은퇴 후에 자산이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희망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FIRE족이 되고자 했지만 희망마저 사라지고 냉정한 현실의 고문만 남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FIRE족과 YOLO족이 되기 전에 치밀한 계획과 투자 지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미 FIRE족이 된 이들의 책을 참고로 하는 것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그들은 FIRE족이 된 상태에서 그를 동경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이윤 창출을 하는 프레임을 만들어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FIRE족이 되었다면 그런 책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특히 30~40대에 일찍 FIRE족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로또에 당선된 것이 아닌 이상 대부분 상당히 오랫동안 자본으로 투자를 해서 성공을 거둔 매우 소수의 선택된 이들이다. 이들의 노하우가 쉽게 습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참다운 FIRE족이 되려는 꿈 자체가 희망고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민이 많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프로메테우스처럼 영원한 형벌의 고문을 당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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