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는 한국의 신보수가 될 수 있는가?

참 보수의 희망이 보인다.

by Francis Lee

한국의 MZ세대 특히 20대의 보수화는 여러 조사에서 확인되는 현상이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던 계층에서 특히 20대가 떨어져 나오면서 보수화 된 것에 대하여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나의 개인적 분석으로 이들은 이제 한국의 Neo-Con의 선두가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철저히 미국적 개념인 네오콘이 온전한 형태로 한국에 완전히 토착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MZ세대 특히 20대의 미국에 경도된 문화 안에서 네오콘의 특징이 많이 보이기에 이러한 추론을 해보는 것이다.

네오콘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1970년대 미국에서 등장하여 1980년대 이후 레이건과 부시 정권에서 통치 이념으로 활용된 사상이다. 자본주의와 맞선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자본주의 진영의 맏형을 자임하던 미국이 세계질서 재편의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neo-conservatism이다. 근본주의 기독교와 미국 중심주의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네오콘은 무엇보다 국수주의적 정신을 바탕으로 윤리적으로도 매우 극우적인 경향을 보인다. 명분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극보수적인 가치관으로 이른바 ‘비정상’에 대하여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그래서 군사력 강화에 열광하면서 동시에 낙태, 동성애, 페미니즘에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이는 것이다.

영국으로 건너간 네오콘은 1980년대 대처 수상이 취한 극보수 정책을 지칭하는 이른바 '대처리즘'으로 나타난 바가 있다. 이른바 앵글로색슨의 축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서 이 미국 중심주의의 다른 말인 네오콘의 사조가 뉴라이트 전국연합,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을 주축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좌파 정부에 맞서는 데모에는 반드시 태극기와 더불어 성조기가 등장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런 미국 네오콘의 짝퉁인 한국의 뉴라이트와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의 꼰대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최근 그 진영에 20대도 참여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 제일주의의 네오콘에 뿌리를 둔 뉴라이트는 통상적인 보수주의와 결이 매우 다르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보수주의는 민족주의와 결을 같이 한다. 그러나 한국의 뉴라이트 계열의 보수주의는 미국 제일주의와 그 미국의 근본 이데올로기인 반공주의를 두 기둥으로 삼는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한국의 20대의 새로운 보수주의는 이 뉴라이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의 20대가 보수주의로 기울고 있는가? 일견에는 그리 보인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최근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압축적으로 진행되어 온 정치 지형의 변동 이전에, 세대차이에서 1차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세대차이는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부모의 사상에 맞서는 자녀들의 언행은 인류 진화의 차원에서 볼 때 긍정적인 기제이다. 세대 갈등은 인류의 변증법적 발전의 동력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재 MZ세대의 부모는 베이비부머와 X세대이다. 그리고 이들은 잘 알려진 대로 한국 특유의 반독재투쟁의 문화 안에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박정희와 박근혜 부녀 정권을 무너뜨린 성공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끝자락에 있는 이 40-50대가 진보 정부를 지지하는 계 주류를 이루고 있다. 60대에도 진보 성향을 보이는 숫자가 만만치 않다. 대다수가 보수적인 70대 이상의 연령층과도 결을 달리한다.


그런데 이들의 자녀들인 MZ세대는 부모의 생각과 다르다. 진보적인 부모에 맞서니 당연히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론 조사로 보면 특히 20대가 70대 이상의 연령층과 유사하게 보수 정당과 후보에 대한 지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MZ세대는 이른바 ‘선택적 보수주의자’다. 그래서 이들은 보수주의자인 60~70대와 연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플렉스’에 오히려 재미를 붙인 것이다.


그래서 보수적인 가치를 이 한국의 MZ세대, 특히 20대 남자들이 지지하지만 선택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극도로 증오하면서도 여성의 권리와 중요한 관련이 있는 낙태에는 관대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윤리를 지지하지만 반면에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는 극도의 혐오감을 보인다. 그리고 물론 꼰대에 대한 적대감도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정치적으로 국수적이지만 미국에 호감을 보이면서 중국과 일본에는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다. 적대적이다.

그런데 한국의 MZ세대는 다른 나라 특히 서양의 동년배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돈에 매우 민감하다.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돈이라고(66%) 여기는 가치 태도를 지닌 경우가 세계 평균(51%)보다 15%p나 높다. 이는 조사 대상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 팽배한 배금주의의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돈에 비해 행복의 요인으로서의 가족의 중요성은 18%에 머물러 세계 평균(27%)에서 많이 내려가 있다. 일단 이른바 IMF 사태 이후 격화된 가족 해체의 추세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가족은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서양의 전통 보수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20~30대에서 가족이 개인의 행복에 결정적 변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족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20대가 보수화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보 세력의 ‘타락’에 염증을 느낀 것인가? 아니면 이른바 ‘입진보’들의 문자 그대로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것도 충분히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인 ‘아버지상’(father figure)에 대한 동경이다.


1960년대 서양에서 히피 문화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절에 청년 세대는 부모의 가치를 거부하고 문자 그대로 집을 떠났다. 히피(hippi)라는 단어가 말해주는 대로 이 세대는 전통적인 꼰대의 ‘억압적’ 가치관에 반기를 들며 개성을 추구하고 개인주의적인 가치와 인생관을 추구하였다. 이 문화는 이른바 WASP, 곧 앵글로색슨 기독교 신자 백인 중산층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전통보다는 개성, 사회보다는 자아. 이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폭력과 다양성을 신봉하였다. 반전운동과 세계평화주의가 다양한 히피문화를 관통하는 이념이 되었다. 당시 소련과 대립하는 미국의 보수적인 정치세대는 히피의 ‘비애국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치 태도로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미국을 침략할 것에 대하여 극히 경계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히피 문화에서 독특한 현상이 나타났다. 가부장적인 생물학적 아버지와 타락한 기성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혐오가 오히려 이상적인 아버지상에 대한 염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전통 기독교에서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상징하는 신과 예수의 자리를 꿰찬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록 가수들이 히피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신흥종교 교주들이 이른바 참 스승을 자처하고 나서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주로 인도에서 온 Guru들이 이 대열의 선봉에 섰다. 지성을 강조하는 크리슈나무르티는 유럽에서 인기를 얻은 반면에, 영적인 각성을 내세운 라즈니슈는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기성 종교에 반발하고 성에 대하여 개방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것이 당시 히피들의 코드를 정확히 맞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의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이 무렵 미국으로 진출한 한국 통일교의 문선명도 대성공을 거두어 추종자들에게는 ‘참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월남전을 피해 유럽으로 진출한 팃낫한도 자두마을 건설로 나름 성공을 거두었다. 모두 서양에서 기성 권위가 무너진 틈을 타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경우이다. 이렇게 생물학적 부모와 기성 정치지도자가 싫어서 히피의 길을 걸었지만 결국 록가수나 신흥종교 교주, 또는 오순절 교파를 중심으로 한 신흥 기독교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히피 세대가 보여주었다.


이러한 주로 미국에 범람한 히피문화의 물결이 결국 한국에도 몰려와서 1970~80년대에 밥 딜런(Bob Dilan, 1941~)과 존 바에즈(Joan Baez, 1941~)를 모방한 이른바 ‘통기타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히피의 전유물인 장발과 청바지 통기타는 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군사독재의 현실을 청년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흥종교나 뉴에이지적인 사상에 심취하는 청년층이 폭발적으로 늘기도 하였다. 그래서 라즈니슈의 책이 큰 인기를 얻고, 토종으로는 ‘단학’이 한국 사회를 휩쓸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도를 아십니까?’가 시작된 시기였다.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점은 자신과 직접 관련 있는 꼰대의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이 권위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거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집을 나간 아들이 결국 신흥종교 교주의 충실한 제자가 되는 극단적인 경우가 미국과 한국에서 얼마든지 발생했던 것이다. 이는 자신의 의지와 거의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꼰대, 곧 생물학적 부모나 교사는 거부하지만, 실질적 접촉이 거의 없지만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가수, 정치지도자, 나아가 종교지도자는 설사 나중에 ‘찐 꼰대’로 밝혀져도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마음대로 선택한 것이라는 확신에서 말이다.

그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은 홀로 생존하기에는 매우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집단을 이루고 살아간다. 이는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들만이 아니라 많은 초식동물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인간이 ‘정치적 생명체’(ζῷον πολιτικόν)라고 규정한 것이다. 오늘날 이 말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두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초온(ζῷον)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지칭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정치도 결국 인간이 사회를 이룰 때 실천되는 것이니 사회가 정치이고 정치가 사회인 것이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인간은 자연계의 그 어떤 동물보다 육체적 능력에서 모자라는 것이 많은 존재이다. 근력과 악력으로는 대부분의 육식 동물을 이기지 못한다. 청각에서는 개를 이기지 못하고 시각에서는 새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지성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를 만큼 탁월한 존재이기도 하다. 현재 인간의 힘은 지구 환경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조차 그의 <국가론>에서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세속적이고 악마적이지만 그 영적 차원에서는 형이상학적이고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어차피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단독으로 생존하기 힘든 존재이기에 집단을 이루고 부족한 육체적 힘을 지성으로 보완해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집단에는 필연적으로 우두머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우두머리에 사실 상 한 집단의 생존이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1만 년 전 농경문화의 시작으로 정착 생활을 하기 전인 수렵 채집 생활 시대에도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인간의 지혜로 육체의 부족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지식의 축적과 전수가 결정적 변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어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100명 이하의 소집단이 주류였던 원시 시대에는 족장의 지혜가 거의 신성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DNA에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찾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본능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두머리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어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한국 사회에 이미 그 어른이 사라진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과거에 무리를 이끌던 그 지혜롭고 용감한 우두머리가 이 사회에서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전혀 어른답지 못한 꼰대들만 ‘설쳐대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는 한국 사회만의 일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서양에서는 이미 1960년대의 ‘학생운동’ 시기에 그런 꼰대들의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는 좀 늦었지만 ‘꼰대’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 투쟁이 ‘구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MZ세대의 꼰대 혐오 문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 한국의 청년들은 과거와 달리 꼰대에 무조건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꼰대 문화의 특정한 보수주의적 부분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MZ세대가 선택적 분노를 하는 것을 바로 이러한 선택적 보수주의의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왜 이들은 자신의 부모세대처럼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 복종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과거 꼰대는 가부장제도의 가장이나 군사독재자처럼 절대 권력을 휘둘러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MZ세대의 부모인 오늘날의 꼰대는 만만해서이다. 지금 MZ세대의 꼰대들은 그들을 위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을 한 세대였다. 베이비부머나 X세대나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더 헌신적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군사독재 시대에 가정과 학교 안에서마저도 폭력적인 가부장제도가 당연시되던 분위기에서 자란 베이비부머와 X세대는 MZ세대를 기르면서 자신의 부모세대와 같은 권위주의를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가정생활의 모든 것을 자녀 중심으로 운영하도록 가정의 프레임을 세팅하였다. 그래서 이 세대에서 한 가정의 주인공은 가장이 아니라 자녀였다. 물론 이런 변증법적 전환은 정치사인 배경도 있지만, 두 자녀 더 나아가 한 자녀만 기르는 가정환경의 물리적 변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4명 이상의 자녀를 낳아 기르던 이전 세대와 달리 이들에게는 1~2명의 자녀를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키워내는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현재 MZ세대는 권위주의가 아니라 권위를 지닌, 더 정확히 말해서 권위를 위임받은 ‘어른’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꾸면서 보수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 권위와 군사독재 시대의 권위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이를 <사회윤리>에서 케르버(Walter Kerber)가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주고 있다.


“권위는 우선 타인들의 동의를 얻고, 타인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타인들을 이끄는 능력이라고 간단히 정의해 볼 수 있다. 모든 권위 관계는 최소한 다음의 네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한다.

1) 영향을 행사하는 권위의 보유자.

2) 영향을 받으며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

3) 행위의 특정 부분과 연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

4) 영향력을 정당화하는 권위의 합법화.”


그리고 이 권위는 가정에서 행사되는 양육 권위와 사회 차원의 사회적 권위가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케르버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양육 권위(Erziehungsautorität)는 다음을 근거로 성립된다.


1) 복종하는 사람이 미성년이다.

2) 권위 보유자가 복종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안녕을 결정한다.

3) 양육 권위는 통제받는 이를 성년으로 양육하는 가운데 그 자체가 지양(止揚, aufheben)되도록 추구해야 한다.


식견이나 판단력이 모자라서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내린 결정을 스스로 완전하게 책임질 수 없기에 관련 사항에 대한 타인의 판단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필요성은 그 자신이 성년이 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에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종속 자체가 나쁜 것이므로 통제받는 사람이 성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 권위 보유자의 도덕적 의무가 된다.


이에 비하여 사회적 권위는 다음을 근거로 하여 성립한다.


1) 사회 구성원의 모든 행위를 공동 목적을 지향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2) 여기서는 권위 보유자가 타인에 비하여 개인적으로 우수함이 인정되지 않는다.

3) 그래서 권위에게 지시를 받는 이들이 완전히 성숙하였다고 하여도 사회적 권위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권위는 다음과 같이 행사될 수 있다.


1) 전체 구성원의 모든 결정이 합의된 절차 규정을 따르는 사회적 협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근본적 민주주의적 형태). 그런데 투표를 통하여 패배한 이들도 이 결정의 권위를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2) 특정한 사람(인격체)에게 완전한 결정권을 위임한다(군주적 나아가 독재적 형태).

3) 여러 가지 다양한 중간 형태가 있다. 여기에서 공적 권위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한마디로 온전한 권위는 그 권위 행사의 대상이 되는 이의 자발적 동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수립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권위주의는 그러한 동의가 전혀 없는 가운데 강압적으로 행사되는 권위를 말한다.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의 사회, 학교, 가정에서 흔히 목격한 가부장제도가 대표적인 권위주의적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에 출생하여 군사독재의 잔재가 희미해진 1990년대에 성장한 MZ세대는 그러한 권위주의 프레임에 직접 갇혀있지는 않았지만, 그 잔재인 ‘갑질’에 더하여 능력주의 사회 안에서 무한 경쟁에서 도태된 자가 흔히 체험하는 ‘차별’과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또 다른 변수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곧 MZ의 부모 세대는 궁핍한 가운데 다 같이 핍박을 받고 고생하는 가운데 일종의 ‘연대감’을 키울 수 있었지만 MZ세대는 일찍이 없었던 풍요를 누리면서도 유치원 때부터 서로를 경쟁 상대로 삼아야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풍요 속에서 불행과 불안을 느끼고 자랐다. 그래서 통계적으로도 한국의 청년이 세계의 다른 동년배와 비교하여 가장 불행하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의 10~30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수치에 잘 반영되고 있다. 이미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전체 자살률 1위인 데다, 10~30대 자살률이 특히 더 높은 상황은 이들이 의지하고 또 위로받을 수 있는 ‘어른스러운 권위’가 부재하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MZ세대는 IMF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무너지는 가정 경제를 직접 목격하며 가정의 안정에 대한 신뢰도 상실하게 되었다. 경제적 여건이 악화된 상황에서 직접 목격한 자녀를 위한 부모의 전적인 ‘희생’을 막상 자신이 반복할 정당한 동기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출생률이 세계 최저를 기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한국 청년들의 최대의 관심사인 돈, 곧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결과가 뻔한 무모한 객기라는 인식에 이르게 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확신과 지혜를 가지고 MZ세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사회적 권위는 한국 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나이만 많지 하는 ‘짓’이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꼰대들만 설쳐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거철만 되면 MZ세대의 마음을 얻겠다고 어설픈 소셜미디어 쇼나 하는 것이 한국의 꼰대다. 그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한 MZ세대가 스스로 나서서 입맛에 맞는 인물을 선택하여 권위를 위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인물의 됨됨이는 부차적인 관심사이다. 내 주관적 판단에 맞으면 그만이다. 마치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들의 참정권 행사가 과거에 비하여 높아지고 표를 몰아주는 정치 행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MZ세대가 원하는 권위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답게 국내적으로는 사회적, 경제적 안정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국력의 강화이다. 그래서 군사력 강화에 MZ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다. 항공모함은 물론 원자력 잠수함의 건조에 적극적인 찬성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MZ세대이다. 강력한 군사력은 단순히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안정된 생존에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MZ세대의 자기 생존이라는 다분히 이기주의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새로운 보수주의는 미국의 네오콘과도 다르고 전통적인 보수주의와도 다르다.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위하여, 그리고 특정한 이념을 위하여 나의 행복을 희생할 각오는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MZ세대의 보수주의는 ‘선택적’이다. 이에 따라 내게 필요한 것만 취하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리는 취사선택의 정의가 바로 이 세대의 특징이다. 과거의 보수주의와 같은 헌신과 희생의 정신은 이들에게 낯선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사회적 불의의 문제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무지해서나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직접 필요 없는 것이면 택하지 않는 이기적인 성향 때문이다.


또한 이 MZ세대는 매우 세속적인 물질 가지를 소중히 여긴다. Flex와 Yolo가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념은 물론 초월적인 종교 가치나 cosmopolitanism에도 큰 관심이 없다. 그저 나의 건강과 행복이 지상 가치이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저세상의 일은 저세상에 맡기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MZ세대는 이전 세대인 히피족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오로지 지상의 것이 전부이다.


이러한 MZ세대의 마음을 사는 길은 무엇인가?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고 비접촉적인 대화와 교제에 능하며, 이념과 종교에는 무관심하되, 그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선택적으로 대응하는 ‘한국적 네오콘’인 이 세대는 무엇보다 가부장제적인 꼰대를 극도로 혐오한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간섭을 안 받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이들 앞에서 군림하거나 이들을 무조건 이끌려고 들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참된’ 권위를 원하는 보수주의자이다.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권위를 위임한 자는 얼마든지 따를 준비가 되어있다. 자유롭게 살고자 하면서도 자신에게 위임받은 권위를 충분히 발휘하여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리더를 따르고자 하는 것이다.


MZ세대의 이러한 신보수주의는 그동안 한국의 보수를 자임해온 보수 언론과 뉴라이트 그리고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의 친미와 친일, 그리고 냉전시대의 산물인 미국 주도의 반공주의 프레임에 갇힌 꼰대 보수주의, 정확히 말해서 종속적 수구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될 잠재력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이 MZ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은 결코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이나 시청 앞으로 나가지 않고 근본주의 기독교 목사들과의 연대도 기피한다. 그리고 본래의 보수주의 정신의 핵심인 민족주의의 기치로 외세 의존적인 꼰대 보수주의와도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MZ세대의 이기주의적인 신보수주의는 기존의 가짜 보수주의자, 곧 친일과 친미의 종속적 수구 세력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재 나서고 있는 대선 주자 가운데 누가 이러한 신보수주의적 MZ세대의 입맛에 맞는 언행과 정책을 펼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MZ세대를 섣불리 진보 진영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하고, 사회적 문제에 분노하지 않는다고 몰아치면 역공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MZ세대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이념적 대결의 프레임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MZ세대는 참다운 의미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치가를 원한다. 어차피 Yolo이기 때문에 정치가에 대해서도 Flex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흔히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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