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혼인과 출산 기피는 이제 시대정신인가?

혼인과 출산은 더 이상 남 따라 하는 일이 아니다

by Francis Lee

이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다. 그런데 혼인이 줄어든 비율보다 아이를 낳는 비율이 훨씬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선진국이 될수록 출산율도 줄어드는 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은 너무 급격하게 줄어들고 상황이 개선될 기미가 전혀 안 보인다. 출산 장려를 위하여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여했지만, 이 추세를 막는 데는 실패했다. 앞으로도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출생률이 세계 최저인 직접적인 이유는 DINK족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혼인율이 낮은 때문이다. 1970년 한국의 총 혼인 건수는 295,137건으로 조혼인율이 9.2였다. 그런데 2020년에는 213,502건으로 조혼인율도 4.2로 낮아졌다. 초혼 평균 연령도 1990년에는 남자 27.79세 여자 24.78세였으나 2020년에는 남자 33.23세 여자 30.78세로 늦어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IMF 사태 직전인 1996년만 해도 혼인 건수가 434,911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경기가 좋다는 착시 현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동성동본의 법적 혼인 허용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 출생아 수는 100만 명이 넘었다. 합계출산율도 4.5를 넘었다. 곧 여자 1명이 평생 아이를 4~5명을 출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1971년 1,025,000명을 정점으로 계속 하향 추세를 보이다가 2020년 출생아 수 272,300명, 합계출산율 0.84로 세계 최저의 기록을 달성했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는가?


통계조사에서는 이유가 명확하다. 경제적 여건이 미비하고, 육아를 위한 사회적 환경이 매우 미비하다는 것이다. 이런 MZ세대의 견해에 대하여 꼰대들이 흔히 제시하는 ‘라때 논리’는 간단하다. 꼰대가 젊을 때는 지금보다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훨씬 더 열악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아이를 많이 낳아 잘 키워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를 낳아 잘 기르는 것이 조상, 신, 또는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논리도 제기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단순히 조상들이 관행적으로 해온 출산과 양육을 관행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이기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MZ세대에게 전혀 설득력이 없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곧 인간은 ‘왜 출산과 양육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꼰대들에게는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나이가 차면 혼인하여 가정을 꾸미고 후손을 보아 잘 길러내는 것이 하늘이, 신이, 조상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신이 인간을 아담과 이브로 창조하여 에덴동산에서 살게 한 다음 가장 먼저 명령한 것이 바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유대교에서 신이 인간에게 십계명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모세가 출현한 이후의 역사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신이 태초에 인간에게 직접 내린 명령은 세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아이를 많이 낳아 세상을 정복하라는 것이었다. 현재 인류의 숫자가 77억이고 2050년에는 90억에 이를 전망이니 신앙과 무관하게 인류는 신의 명령에 충실해 왔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구나 지구의 생태계의 운명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려있으니 신이 명령한 대로 지구를 복속시키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וַיְבָ֣רֶךְ אֹתָם֘ אֱלֹהִים֒ וַיֹּ֨אמֶר לָהֶ֜ם אֱלֹהִ֗ים פְּר֥וּ וּרְב֛ו

וּמִלְא֥וּ אֶת־הָאָ֖רֶץ וְכִבְשֻׁ֑הָ וּרְד֞וּ בִּדְגַ֤ת הַיָּם֙ וּבְע֣וֹף הַשָּׁמַ֔יִם

וּבְכָל־חַיָּ֖ה הָֽרֹמֶ֥שֶׂת עַל־הָאָֽרֶץ


히브리어가 어렵기는 하지만 번역이 잘 되어 있으니 걱정할 것은 없다. 한글로 직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신이 그들을 축복하며 말했다. 후손을 낳고 번성하고 땅을 채워 땅을 복종시켜라. 그리고 바다의 불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지배해라.


흔히 이브가 출산을 하는 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시작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신은 이미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있을 때부터 번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래서 팔레스티나 지역의 신을 믿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는 모두 후손을 낳고 번성하는 것을 지상명령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은 2019년 기준 합계출산율이 3.1로 세계 1위이다. 대다수가 이슬람인 터키의 경우도 합계출산율이 2를 넘는다. 물론 이스라엘의 최고의 출산율은 신앙만으로 성취한 것은 아니다.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출산 장려 정책이 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도 그에 못지않은 출산장려책이 있음에도 예를 들어 독일은 합계출산율이 1.54, 프랑스가 1.87인 것을 보아서는 반드시 국가 정책만으로 출산율이 오르는 것은 또 아니다.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 평균 합계출산율이 1.55이고 OECD 회원국 전체의 평균 합계출산율은 1.65명에 불과하니 경제력과 복지가 출산율 제고의 알파요 오메가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 1970년에 출산율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나라였다. 1995년만 해도 중위권은 유지했다. 그런데 IMF 사태 이후 ‘폭락’하기 시작했고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국가가 되고 만 것이다. 일견에는 경제적 문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2020년 4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만 19~49세의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도 기혼과 미혼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이 출산을 하지 않은 주된 이유로 지적되었다. 미혼의 경우 44.7%, 기혼의 경우 37.4%가 ‘경제적 불안정’을 출산 기피의 원인으로 꼽았다. 그런데 미혼 기혼을 가리지 않고 12% 정도는 아이 없이 생활하는 것이 여유롭고 편해서 출산을 기피한다는 답을 했다. 이른바 DINK족의 사고방식이 반영되어있는 것이다. 꼰대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이기주의자라고 쉽게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 간단히 비난할 일이 아니다. ‘왜 자녀를 낳아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왜 자녀를 낳아 기르는가?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 종족보존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가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도 종족보존의 본능은 생존 본능과 더불어 지상명령과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 인간은 나이가 차면 반드시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출산과 양육을 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생명은 신의 것이거나 부모의 것이기에 스스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지상명령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런 지상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누구를 위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이며, 누구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것인가?


매우 위험해 보일 수도 있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않으면 혼인과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명령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실 종족보존의 본능과 생존 본능은 대립되는 가치이다. 자연계를 관찰해 보면 하등 동물로 갈수록 종족보존은 기존 개체의 소멸과 직결된다. 많은 곤충의 경우 알을 낳으면 성체가 죽게 된다. 연어도 알을 낳고는 죽는다. 흔히 말하는 대로 내가 죽어야 네가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산을 하도록 진화해 왔지만, 여전히 한국의 경우도 2017년 기준으로 10만 명당 11명의 임부가 사망에 이른다. 북한의 경우는 그 수치가 거의 100명에 이른다. 아프리카 지역의 국가들의 경우는 그 수치가 500명대로 올라간다. 의료 시설이 발달한 선진국의 경우는 10명 내외로 안정되어 있지만, 의료적 개입이 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 자연 상태의 경우 출산은 여성의 건강은 물론 생명에 치명적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 조선 시대는 물론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임산부의 사망이 종종 발생하였다. 출산이 ‘나’라는 개체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인 것은 여전히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으로 극적인 육체적인 변화를 겪는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되는 순간 여성의 몸은 완전히 임신과 출산에 최적화되는 상태로 전환된다. 임부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입덧이 생기고 자궁이 커지면서 장기들이 기형적인 위치 변화를 겪는다. 생물학적으로 태아는 여성의 몸에 들어온 일종의 ‘에일리언’이다. 그래서 몸이 본능적으로 그 태아를 몰아내고자 하지만 호르몬의 분비로 이를 억제하는 기제가 발동된다. 여성의 몸 안에서 그런 전투가 10개월이나 벌어지는 것이다. 임신 후기로 갈수록 몸무게가 급격히 늘고 소변이 자주 나오고, 호흡이 힘들어지고, 소화도 어려워진다. 수면도 방해된다. 이 모든 것이 태아 때문이다. 여기에서 여성의 개체로서의 주체성 완전히 상실되고 오로지 태아의 안녕이 최고의 목표와 가치가 된다.

통상 3단계로 진행되는 출산 과정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자궁구가 3cm 정도 열리기까지 9시간 정도 걸리고 진통은 5분마다 찾아온다. 태아가 나오도록 하는 호르몬이 작용한 탓이다. 다시 자궁구가 8cm 정도 열리기까지 4시간 정도 걸리고 진통 간격은 3분으로 빨라진다. 다시 2시간 정도 흐르고 진통이 1~2분 간격으로 와서 자궁구가 10cm 정도 열려야 본격적인 출산이 시작된다. 출산은 질병이 없는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강력한 통증을 수반한다. VAS:Visual Analog Scale을 기준으로 할 때 초산의 고통은 7.5에 이른다. 약물을 사용해서라도 피하고 싶은 통증이다. 그래서 요즘 많은 여성들은 무통분만을 위하여 마취제 사용을 선호한다.

그런데 여성의 골반은 남성의 골반과 구조가 다르다. 머리가 ‘매우’ 큰 homo sapiens sapiens의 출산에 용이하도록 여성의 골반은 호르몬의 주기에 따라 수축 팽창을 반복하고 치골 결합 부분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남자의 골반이 단단하고 하부가 좁은 데 비하여 여자의 골반은 상하부가 넓고 뼈가 약하다. 출산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한 결과이다. 또한, 4족 보행을 하는 대부분의 짐승들과 달리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기에 골반뼈가 무거운 태아를 지탱하느라 무리가 간다. 자궁 안에서 태아가 10개월 동안 머무는 동안 모든 영양 공급을 전적으로 임부에게 의존한다. 실질적으로 여자의 생 에너지를 태아가 빼앗아 가는 것이다.


출산의 고통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긴 육아 기간의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수월하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오래 안 걸리니 말이다. 일단 최소한 3년은 육아에 전념하느라 여성의 ‘자기 생활’이 사라진다. 선진국의 경우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비로소 여성은 자기 시간을 가지게 되지만 이어서 20살까지 이어지는 정규 교육이 기다리고 있다. 서양의 경우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육아가 종료되지만, 한국은 자녀의 혼인 때까지 육아 기간이 연장된다. 그리고 종종 혼인한 자녀가 출산할 경우 그의 양육에 다시 여성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평생 육아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여성이 임신하는 순간부터 ‘나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나의 생존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근원적인 생존 본능이 종족보존의 가치 아래 억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생존 본능은 종족보존의 본능보다 우선하는 것이기에 언제든 부모는, 특히 여성은 전쟁과 기근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자녀를 버릴 수 있다. '내'가 살아야 다음 출산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원적으로 종족보존의 본능이 생존 본능보다 강도가 낮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여성의 본능을 인류는 사회적 제재 기제로 억압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오면서 여성의 '희생'을 숭고한 '모성애'의 이데올로기로 정당화 해왔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출산은 여성에게 매우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럼에도 여성의 생존본능을 억제하기 위하여 심지어 유전자는 아기가 '이뻐 보이도록' 인간의 두뇌를 조작하기까지 하였다. 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은 동물의 경우는 호르몬만으로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문자 그대로 homo sapiens sapiens, 곧 지혜가 최고도로 발달한 존재이기에 호르몬에만 의존하기에 태부족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여성의 생존 본능을 억압하는 기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성애'는 가부장 제도의 사회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다. 흔히 자녀 양육에 '소홀한' 여성을 비난하는 쉬운 도구로 동물의 '모성애'를 들먹이지만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동물에게는 모성애가 없다. 동물은 종족보존의 본능만이 작동하는 호르몬의 기제에 충실한 행동을 할 뿐이다.


'모성애'는 인간과 같은 인격체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자발적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동물의 호르몬 작용에 따른 기계적인 새끼 양육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그리고 동물들은 그 호르몬의 분비가 종료되면 새끼를 양육하는 행위를 완전히 중단하고 새로운 종족 보존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동물들의 종족보존의 본능은 뇌의 변연계에서 나오지만 인간의 모성애는 전두엽에서 나온다. 그러나 전두엽에는 모성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에 때로는 육아에 '지친' 여성이 '모성애'와 대립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될 뿐이다. 이를 보고 가부장 제도가 고착된 사회에서는 여성의 '모성애' 결핍이라는 부당한 도덕적 비난을 서슴지 않는 만행을 저질러 왔다. 그것도 남성 가부장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말이다. 여성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이들이 자행한 구조적 폭력이다. 양성평등의 시대정신이 득세하는 현재의 선진국에서 이러한 여성 차별적 '만행'은 이제 오히려 도덕적 제재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아이의 출산과 양육은 특히 여성에게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인간 사회는 출산을 장려하고 축복하는 문화를 촉진해 왔다. 특히 수렵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하여 농경문화를 발전시키면서 확립된 가부장 제도가 1만 년 동안 유지되어 오면서 임신, 출산, 양육은 전적으로 여성의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sanction을 동원하여 이른바 ‘여성의 덕’으로 미화되었다. 이른바 '모성애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모성애의 신화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전혀 모르고 겪을 수도 없는 남자가 만들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우주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중세 시대에 그 신화는 앞에서 언급한 신의 명령과 연결시켜서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계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모성애’ 이데올로기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여성은 신성모독 죄에 버금가는 죄목으로 단죄되었다. 종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인권으로 여겨지는 시대정신의 도래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인식도 마침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 외도, 낙태 등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이 문제는 논쟁 중에 있는 것이다.

일단 결과적으로는 임신과 출산이 더 이상 지상명령은 아닌 것으로 시대정신이 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선진국의 합계출산율은 2.0 미만이다. 곧 부부가 1명의 자녀를 낳는 것이 대세인 것이다. 결국, 이대로 가면 인류의 숫자가 줄어들 것은 자명하다. 다만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출산율이 여전히 2.0을 상회하여 전체 인구 수는 당분간은 오히려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과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기원전 1만 년 전만 해도 지구 상에 인류의 인구는 400만 명 정도였다. 그리고 서기 1000년경에는 거의 2억 명으로 늘었던 인구가 1300년대에는 전쟁과 질병으로 그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700년대 이후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 1927년에 20억 명이 되었다. 이후 20세기의 양차 대전으로 촉발된 ‘베이비붐’ 덕분에 1959년에는 인구가 30억 명으로 늘고, 1999년에는 60억 명을 돌파했다. 기원전 1만 년에서 서기 1700년대까지는 인구 증가율이 0.04%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까지 1%의 증가율을 보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98년까지 2.04%로 증가했다. 유엔 인구통계학자인 사라 헤르토그는 1900년대 후반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원인으로 어린이의 사망률 감소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이비붐의 등장을 꼽았다.


최근 인구 증가율은 크게 둔화되고 있으며, 2020년 인구 증가율은 약 1.05%지만, 증가율 감소가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2020년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인구 증가율은 약 2.7%로 세계 평균을 크게 웃돌고 있다. 또한 합계출산율은 북미와 유럽은 1.7인데 반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는 4.6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명 이하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평균 1.63명)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800년 이전 세계 모든 지역의 평균 수명은 약 30세에 불과했지만 1995~2000년에는 65세로 증가했고 2019년 기준 72.6세에 달한다. 평균 수명도 지역에 따라 다르며, 2016년 기준 아프리카 평균은 61.2세, 유럽은 77.5세를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출생률은 감소해도 인구 증가율이 쉽게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21년 6월 기준 세계 인구는 약 79억 명이다. 유엔의 예측에 따르면 2057년에 인구는 100억을 돌파할 것이다. 다만 유럽은 2022년부터, 아시아는 2057년부터,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는 2059년부터 인구가 감소하지만,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의 인구 증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세속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지역일수록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자면 현재 후진국(under-developed country)을 제외하고,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의 인구도 소득 증가와 더불어 자연 감소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후진국의 인구는 늘고 선진국의 인구는 줄어드는 현상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구가 줄어드는 선진국 내부의 빈부격차와 출산의 관계를 보아도 저소득층의 출산율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2019년 기준 한국 통계청 자료를 근거로 보자면 연 소득 1억 원 이상이 되는 초혼 신혼부부의 50.9%가 자녀가 없다. 반면에 연 소득 1천만 원 미만의 부부는 57.5%가 자녀가 있다. 게다가 이들의 평균 출생아 수는 0.81로 1억 원 이상의 부부의 0.58에 비하여 30% 가까이 높다. 소득이 높을수록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추세인 것이다. 미국은 어떨까? 2017년도 통계 자료를 기준으로 연 소득 20만 달러 이상인 미국 가정의 출산율은 (1,000명당) 43.92로 연 소득 1만 달러 이하인 미국 가정의 출산율인 66.44에 비하여 30% 정도 낮다. 한국과 큰 차이가 없다.


앞에서 본 대로 양육 비용이 저출산의 가장 큰 이유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지만 막상 통계 자료를 보면 저소득층이 자녀 출산에 더 적극적이다. 그리고 빈곤 문제가 심각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출산율이 세계 평균을 훨씬 능가한다. 돈 문제가 해결되면 오히려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이다. 왜 소득이 늘면 출산율이 감소하는 것일까?

근본적으로 사회의 세속화 때문이다. 신이나 천명이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는 출산이 인간의 본능이기에 앞서 '신성한' 의무였다. 그러나 세속화 특히 1960년대의 free-sex 문화의 기폭제가 된 피임약으로 sex와 출산이 합법적으로 분리되는 사건이 출산의 역사에 전혀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생물학적으로 임신과 출산은 부모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을 그 부담되는 일에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성적 충동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DNA에 심어 놓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유혹에 더하여 성적 쾌감이라는 보상도 마련해 두었다. 이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sex에 본능적으로 이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sex는 근원적으로 임신을 위한 수단이기에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인류는 성적 쾌락과 임신의 부담을 분리시키는 데 콘돔보다 훨씬 효율이 뛰어난 피임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이후 인류의 sex에 관한 역사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다. 곧 성적 쾌락 자체가 목적인 사회가 등장한 것이다. 마치 미끼만 물고 도망가는 물고기처럼 인간은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쾌락만을 거둘 수 있는 간지를 발휘하게 되었다. 피임약과 피임 도구를 적절히 사용한 결과로 말이다. 심지어 인류는 사후피임약까지 발명해 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경제적으로 안정된 계층이 임신과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데에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허무주의이다. 이 허무주의는 일반적으로 세상을 염세적으로 보는 정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의미한다. 곧 이 세상에서의 삶 이후에 이어지는 또 다른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 것을 바로 허무주의라고 한다. nihil은 본래 인간의 우울한 정서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문자 그대로 이 세상의 삶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뒤에는 시공간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 바로 허무주의다.


과거 기독교가 서양인의 정신의 중심에 놓여 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 교화를 혐오하는 사람들조차, 피안의 세계로 나가는 인간의 부활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연장 선상에서 내세를 믿었던 것이다. 불교도 윤회를 통하여 이 세상에 다시 오거나 니르바나의 세계로 ‘건너가서’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이러한 '연장된 세계'에 대한 확신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평가에서 도덕적 잣대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20세기, 특히 양차 세계 대전의 경험 이후 사람들이 특히 서양에서 인간의 이성과 종교 기관의 도덕적 권위의 붕괴를 목격하게 되면서 허무주의가 인간의 머리에 강력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인간의 선성과 신이나 절대 원리가 보장하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신뢰도 무너졌다.


또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과 근본주의적 생태론자들의 세계관이 결합되면서 인간의 우주에서의 지위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일어났다. 그리도 이 또한 출산에 대한 거룩한 의미 부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신의 모습과 닮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 형성된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존재 자체는 지구라는 생태계에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치고 더 나아가 파괴하는 주범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소멸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도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는 상황까지 전개되었다.


여기에 더해 인간 생존의 근본적 터전인 지구도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과학적으로’ 확인되었다. 곧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인데 이미 50억 년을 지나 앞으로 50억 년 후면 태양과 더불어 지구도 소멸하는 것이 과학적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인류의 생존도 그와 함께 종말을 고할 것 또한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가 말하는 영원불멸하는 인간 영혼과 부활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종족보존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도 궁극적 결과는 hoo sapiens sapiens 종의 종말이다. 더구나 태양이 붕괴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종의 종말은 생태계의 붕괴, 혜성이나 유사한 천체와의 충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질병의 만연, 핵무기 사용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서둘러 다가올 가능성이 과학적 ‘사실’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종족보존의 본능에 충실하다는 것에 어떤 궁극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허무주의가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nihil, 곧 무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에서 혼인과 출산을 하는 것의 근본적 의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육체적 쾌락의 추구와 과학적 허무주의에 경도된 정신 자세만으로 MZ세대가 혼인과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만이 강조되는 현실에서 그 이외의 원인, 특히 인간 실존과 관련된 근본적인 원인이 사실 혼인과 출산 제고를 더욱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정부가 신혼부부의 경제적 문제, 특히 주택 문제와 육아 문제를 해결할 비책이 있다고 해도 혼인과 출산이 비약적으로 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는 특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모두 뚜렷하게 의식하고 실천하는 MZ세대에게 혼인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조치와 더불어 의식 개혁, 곧 쾌락주의와 과학적 허무주의를 극복할 방안도 동시에 마련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부와 사회가 그런 수준의 의식 개혁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MZ세대의 혼인과 출산 기피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21세기 사회에서 이런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와 성찰이 전제되고 적절한 의식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이미 상실한 혼인과 출산의 근원적 의미를 다시 찾기란 찾기 힘들 것이다. 그저 부모가 나를 낳았으니 너도 낳아야 한다라든지 생육과 번성은 신의 뜻이라는 별로 설득력 없어 보이는 말만 되풀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구나 무한 경쟁 사회에서 진정한 행복과 안정을 느끼지 못하는 MZ세대에게는 이러한 설득 작업이 더욱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대세에서 간통도 법이 제어하지 못하기에 부부의 정조 의무도 사실상 개인의 윤리적 결단에 맡겨지는 매우 취약한 것이 되고 말았으니 전망은 더욱 어둡다.


역사적으로 부부의 정조 의무의 법적 보장의 보루인 일부일처 제도는 기술적으로 볼 때 소수에 속한다. <인종 도감>(Ethnographic Atlas)의 저자 머독(George P. Murdock)이 조사한 1,231개 사회에서 186개가 엄격한 일부일처제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실질적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만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한국의 경우도 법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수립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가 최초였다. 물론 법에 따른 제재를 가하기 전부터도 일부다처제가 법적으로 허용되어도 많은 경우 일부일처의 방식을 취한 경우가 많다. 사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한집 안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이기주의와 배타적 소유욕을 고려할 때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 배타적인 것으로 진화해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시행착오를 거쳐 일부일처제가 안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일부일처제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이웃의 아내, 종, 가축을 탐하지 말라는 구절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이 간음은 오늘날 생각하는 간통보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또한, 이웃의 아내는 종과 가축과 더불어 일종의 ‘재물’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래서 정조보다는 재물 손괴를 제재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십계명의 구절들은 일부일처제도의 부부간의 배타적 정조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시절에도 유대인들은 분명히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이혼에 관하여 말한 내용도 일부일처제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여러 아내를 둔 남자는 맘에 안 드는 아내라고 하여도 법적으로 이혼하지 말고 그의 생계를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여자는 생존 자체의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에 이혼은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그래서 예수는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신에서 이혼을 금지한 것이다. 정조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의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습속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성 문제를 순전히 개인적인 자기 결정에 맡기는 경향이 보편화되면서 일부일처 제도는 물론 일부다처제도 법적 강제성을 지닌 효력을 상실하고 있다. 법적 제도적 혼인 관계와 무관한 외도 나아가 간통이 법에 따른 제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외적 통제를 하여 개인 간의 문제를 국가가 통제하는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회적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기에 아예 법적 제도를 없애는 추세에 있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가 더 존중받는 시대정신에서 종교적 제재도 부부 정조의 의무 준수에 더 이상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실 성적 관계는 남녀의 개인적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국가와 종교가 제재를 가해왔던 모순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극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성적 관계라는 것이 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왜 국가나 사회가 통제해 왔던 것인가? 근본적으로 남녀 관계에 인간의 근원적인 성욕과 종족보존의 본능과 관련된 질투와 소유욕에 대한 외적 통제로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통치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큰 이유였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 일부일처제는 유산 상속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그래서 돈이 가족 관계에 얽히면서 분쟁이 발생하면 사회 질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일부일처제로 돈의 흐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조세에도 유리했다. 특히 기독교 교회는 중세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의 혼인, 탄생, 죽음에 관련된 예식을 발달시키면서 피지배층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통제를 강화하며 권력을 강화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피지배층에 대한 통제로 유지되는 사회적 안정이 결국 종교적 권력자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정교분리가 법제화된 근세 이전까지는 종교 권력자가 정치 권력자를 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러나 혼인과 출산이 개인적 결단의 문제가 되는 시대정신에서 교회의 간섭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서양의 기독교 신자들도 자녀의 세례를 등한시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도 전혀 의무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세속화의 바람이 교회의 통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 형성된 현대 사회 제도가 한국에 ‘도입’되면서 한국 사회도 급격히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혼인율도 줄고 출산율도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양과 마찬가지로 법적 혼인보다는 동거 추세가 늘고 있다. 가볍게 만나서 서로 즐겁게 동거하다가 마음이 변하면 역시 가볍게 헤어질 준비를 하고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이른바 ‘도덕군자’의 인식을 지닌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말세’ 운운하지만 이미 세속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서양 사회에서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동거 파트너’의 모든 사회적 권리를 법적 혼인을 한 부부와 전혀 차별을 두지 않고 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서양 국가의 경우 자녀 출산율도 종종 법적 혼인을 한 부부보다 ‘동거 파트너’ 사이에서 더 높게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실 서양에서 혼인에 따른 법적 ‘굴레’가 특히 남자들에게 커다란 짐이 되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남성들이 법적 혼인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다. 여성은 출산과 육아의 부담으로 ‘안정된 가정’을 원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굴레’가 주는 자유의 통제에 대한 강박관념이 큰 것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동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동거’의 추세가 강화될 것이기에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거 파트너’의 법적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조만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집단의식이 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을 요약해 보여주는 3F 때문이다. 3F는 freedom, feminine, fortune의 첫 글자를 딴 축약어이다. 현대 사회의 최고의 정신은 자유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그에 따라 스스로 부여받은 인권을 보장받으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나 사회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방향으로 제도를 수립하고 운영하고 있다. 또한, 현대 사회의 시대정신은 여성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양성평등의 정신으로 발현된다. 과거 남성은 육체적 힘의 과시와 투쟁, 지배의 특성을 보이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현대 사회에서 갈등을 투쟁과 지배로 해결하려는 경우 법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되어 있다. 폭력적인 남성성보다는 비폭력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여성성이 더 존중받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남성미라고 하는 것도 비폭력적인 육체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상대방을 존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여성성의 가치로 대치되고 있다. 끝으로 재물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되었다. FIRE족이나 YOLO족의 삶은 재물의 확보가 전제되지 않으면 실현이 불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서양과 다름없는 선진국이 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MZ세대는 이런 변화된 시대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감지하고 혼인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가 지난 2006년부터 제1~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 계획에 따라 15조 원의 예산을 저출산 대책에 쏟아부었지만, 오히려 혼인율과 출산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해 온 것이다. 혼인과 출산 문제의 더욱 근본적인 원인인 새로운 시대정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돈으로, 그것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니 실패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볼 때 MZ세대의 의식 개혁 작업이 병행되지 않는 한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기주의적인’ MZ세대가 뭐하러 ‘힘든’ 혼인을 하고 누구 좋으라고 출산을 하겠는가? 정부의 MZ세대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고 불 수밖에 없다.


혼인과 출산과 직결되는 문제가 인구수이다. 한국은 특히 급격한 인구 감소로 2100년 정도면 1500만 명 정도만 남아 서울 경기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인구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경우 인구밀도가 2018년 기준 515에서 150으로 줄게 된다. 그러나 이 수치도 여전히 높다. 2018년 기준 유럽연합의 인구밀도는 115이고 미국은 30에 불과하다. 한국과 많이 비교되는 독일의 인구밀도도 230으로 현재 한국의 절반도 안 된다. 출산 장려에 국운이 달린 것처럼 정치가들이 요란하게 떠들고 다니면서도 정작 출산율의 근본적 제고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한국에는 인구가 많은 것이다. MZ세대의 이기주의에 환경 파괴와 경제적 불확실성이 더해져 전통적인 의미의 혼인과 출산의 문화는 더 이상 존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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