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여성 혐오는 부머랭이다

한국 사회의 성대결의 원인은 결국 신자유주의적 천민 자본주의 아닌가?

by Francis Lee

현대 한국의 MZ세대는 여러 측면에서 꼰대 세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꼰대 어른들을 비판하기보다는 비난한다. 비판에는 합리적 이론적 근거가 있지만, 비난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주택 문제도 그렇다. MZ세대는 꼰대 세대들은 ‘쉽게’ 집을 사고 가격을 올려 저절로 부자가 되었지만, 자신들은 그 꼰대들의 수작으로 본의 아닌 피해자가 되어 집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혼인도 힘들어지고 가정을 꾸려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꿈꾸기도 어렵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이 사악한 가격을 책정하여 소비자들을 착취하고자 만든 사치품을 ‘명품’이라며 ‘나를 위로한다’는 논리로 소비하며 그것이 플렉스란다. 집과 혼인,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보상이란다. 그러면서 제기하는 논리가 어차피 집 사기는 글렀으니 즐기면서 살겠단다. 꼰대인 나의 시각에서는 정말 한심한 논리다.


MZ세대가 비난하는 꼰대들은 평생 그 잘난 '나'를 위로할 시간조차 없이 피땀 흘려 살면서 겨우 장만한 집을 그렇게 플렉스 하며 '쿨하게' 구매하겠다고? 그것도 서울에 있는 번듯한 10억 이상 되는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마련하기 바란다고? 그러면서 그런 집 장만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는 흙수저라고? 자신의 흙수저 집에 태어난 것이 서러우면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후손에게만큼은 금수저가 되고자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꼰대의 충고는 극도로 싫어하면서 그 꼰대의 돈을 바라는 모순된 논리는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고생은 싫고 열매만 따 먹겠다는 심산인데 그게 요즘 MZ세대의 플렉스 논리라면 아서라. 아직 더 쓰라린 맛을 보아야 해야겠다. 피와 땀과 눈물을 거의 평생 흘려야 얻을까 말까 한 것을 합당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만 나열하는 나약한 MZ세대의 논리는 더 이상 존중받을 이유가 없다.

MZ가 비난하는 꼰대에 속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체험으로는 20년 넘게 쥐꼬리 월급으로 극도의 내핍 생활을 하고 월세 전세를 전전하며 알뜰살뜰히 모아 겨우 식구가 기거할 만한 작은 집 한 칸 장만한 것이 전부이다. 투기는 꿈도 못 꾸었다. 그동안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했다. 외식도 월급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귀한' 행사였다. 그것도 주로 동네 '짜장면집'에서 말이다. 요즘 MZ세대처럼 과도한 소비로 플렉스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MZ세대는 지금 월급은 적고 쓸데는 많다고 하는데 사실 ‘라때’는 더했다. 대부분의 꼰대들은 입사 초기에는 문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에 바빴다.


도대체 언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넉넉한’ 임금을 보장한 적이 있었다는 말인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68년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합과 혁명을 재촉한 것은 분명히 그 당시 자본가들의 탐욕으로 자행된 인간성과 인류에 대한 범죄에 대한 반발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증오와 대립은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립의 중심에는 늘 임금이 있었다. 지금 MZ세대만 임금이 모자란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미 자본주의 역사 수백 년에 걸쳐 임금은 늘 낮았고 물가는 늘 높았다. 집을 사는 것은 모든 노동자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저임금의 근본 원인인 자본가들의 탐욕에 정면 도전하여 투쟁과 희생으로 정당한 임금을 쟁취하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로 노력해 온 것이다. MZ세대가 경멸하는 한국의 꼰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본가와 결탁한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민주 투쟁은 궁극적으로 정당한 임금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복지제도가 이나마 수립된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의 투쟁 없이 쟁취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사회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꼰대들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MZ세대에게도 늘 투쟁을 요구한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작금의 MZ세대는 투쟁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설사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도 자본주의의 악의 근원인 사악한 자본과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악랄한 착취구조에 맞서기보다는 만만한 그리고 약해 보이는 대상에게 감정 배설하는 데 급급하다. 그 대상 가운데 물론 꼰대도 있지만, 더 집중포화를 당하는 것이 바로 여성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는 사실 이란성 쌍둥이와 같다. 근원적으로 인간 혐오에 기원을 둔 여성 혐오는 사실 그 역사가 길지 않다. 물론 Jack Holland가 자신의 저서 <A Brief History of Misogyny The World's Oldest Prejudice>에서 여성 혐오를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인 판도라에서 찾는 용기를 보이기도 하지만 웃기는 얘기다. 그는 여성 혐오와 여성차별을 혼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성을 ‘혐오’하는 인간들은 모든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에나 있어왔다. 대부분 정신병자나 사회적 부적응자들이었다. 여성만을 극도로 증오한 연쇄살인범은 현대 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사회적인 여성 혐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세기 여성해방 운동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여성 혐오라는 용어인 'misogyny'는 1950년대에 비로소 처음 등장하였다. 판도라 신화가 여성 혐오의 역사의 시작이라고? 책을 팔고자 하는 의욕은 가상하나 역사를 짜깁기하여 혹세무민하면 안 된다.

한반도에서 여성차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시대의 여성차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그 여파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여성차별은 한국 사회만의 고질병은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 퍼져 있는 병리 현상이다. 그러나 특히 임진왜란 이후 확산된 유교를 빙자한 병든 가부장제도는 조선 만이 아니라 그 이후 한반도의 사회 전체에 구조적인 남녀차별을 고착화하였다. 장자 상속과 아들 선호 사상, 여성의 가정에서의 종속적 역할 강요는 남녀차별을 넘어서서 여성 혐오의 풍토를 조장하였다. 가부장제도의 강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실추된 조선 왕조가 통치를 강화하려는 조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유교 자체가 공자 때부터 남녀 차별적인 사상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그의 제자 가운데에는 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교에서는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의무만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연장자와 권력자에 대한 충효만을 강조한다. 원래 유교에서는 충효 이전에 지도자와 어른의 자애와 시혜를 앞세운 것을 몰래 감추면서 말이다.


사실, 이 충효 사상은 일본 강점기 군국주의 일제의 식민 교육의 일환으로 확산된 것인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인성교육의 덕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친일 청산이 그토록 힘든 일이다. 권력자와 연장자의 베풂이 없는 일방적 충효의 강요는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삼강오륜은 일방적 착취가 아니라 상호 증진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교는 함석헌 선생이 말한 대로 본래 유교 정신의 뼈다귀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사골 국물을 우려먹는 세력이 남아 있는 탓이다. 여기에 더해 제국주의 일제의 군사 정권이 식민지 조선의 국민에게 盡忠報國과 忠孝一本을 강요한 것을 박정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이 오늘날 한국 학교의 효 교육이다. 당장 폐지해야 마땅한 것이나 토착 왜구들로 이루어진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오늘도 붙들고 있는 것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법적으로 과부도 다시 재가할 수 있게 되었지만, 관습이 하루아침에 여성 중심으로 바뀔 수는 없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에도 여성의 권리에 관한 내용은 없다. 갑오경장 이후 130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의 재혼은 껄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제사에서는 여전히 남성들만 예식을 진행할 수 있다. 명절이면 아직도 주로 여자들만 일한다. 가정에서의 남녀평등은 갈 길이 멀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의 남녀 임금 차별은 OECD 국가 가운데 최악에 가깝다. 물론 여성들 상당수가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여 통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여성이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을 ‘즐겨’ 할 리는 만무한 일이다. 가부장적 착취구조를 남성들이 만들고 그 구조 안에서 여성들이 착취를 당하도록 한 것도 남성들이다. 저임금 육체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을 정면으로 모독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일임에도 대부분 남성이 장악하고 있는 국회에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남녀차별은 사회정의와 공정에 관한 관심과 제도 개선을 촉진하는 동기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모순적 제도에서 ‘당하는’ 남성들이 역설적으로 여성 혐오의 선봉에 서고 있다. 그 근거는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적 기여를 덜 하기에 차별받아 마땅하다는 심리에서 나온다. 군대도 안 가고, 회사에서도 힘든 일은 남자가 하고 여성이 더 편한 일을 하며 생리 휴가, 출산 휴가 등 남성이 누리지 못하는 ‘특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등한 임금과 처우라는 남성이 보기에는 지극히 ‘부당한’ 요구를 한다고 여겨진다. 이는 자본주의의 그 '신성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정의란 무엇인가? 능력과 업적대로 받는 것이 정의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정의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회윤리의 차원에서 정의에는 적어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여기에서는 Walter Kerber의 <사회윤리>에 나온 개념을 정리해 본다. 먼저 고전적으로 정의란 suum cuique로 정의된다. 각자의 직분에 따른 공로와 대접은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언급되어 있지만, 오늘날 이해하는 정의인 suum cuique를 정확히 언급한 것은 키케로이다. iustitia suum cuique distribuit. 곧 정의란 각자가 받아야 할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질문이 제기된다. 각자가 받아 마땅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바지한 만큼 받는 것, give and take의 원칙 말고 무엇이 있는가 말이다. 군대 다녀온 사람이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아 마땅한 일 아닌가? 생리 휴가와 출산 휴가를 하지 못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또한 받아 마땅한 것 아닌가? 단순히 여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군대도 안 가고 휴가는 더 받는 ‘불의’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 있어야 정의로운 사회 아닌가? 이런 단순한 논리에서 여성 혐오가 촉발된다.


그러나 이 단순 논리는 정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성 혐오와는 결이 다르지만, 금수저 논쟁도 정의의 정의와 연관되는 문제이다. 흔히 자신의 노력이 아닌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 덕분에 '뼈 빠지게' 노력을 하지 않고도 비싼 집을 쉽게 장만하고 연봉이 높은 직업에 종사하며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흙수저 출신으로 뼈 빠지게 일하는 청년의 입장에서는 불의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업적에 따라 마땅히 받는 것만이 정의가 아니다. 금수저의 특전을 누리는 것도 정의이다.


물론 흙수저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이 평생 노력을 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을 금수저 청년이 부모를 잘 둔 덕분에 ‘쉽게’ 소유하는 것을 보고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회 안에서 이미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지위와 재산은 ‘각자의 것’에 속하는 정의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려받은 것이기에 현재의 금수저 청년의 능력과 소질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특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정당한 권리이다. 그래서 이들이 흙수저 청년들이 평생 획득할 수 없는 주택, 자동차, 사치품을 구매하고 즐기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이를 불의하다고 여기며 이러한 권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더 나아가 박탈하려는 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이에 시비를 거는 일은 당연히 저항을 받게 된다. 일단 보장된 권리는 빼앗기가 무척 어려운 법이다.


금수저 부모를 두지 못한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바로 업적 정의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부모가 흙수저였으나 유치원 때부터 밤새워 공부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명문대에 취업이 잘 되는 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졸업 후에 군대를 당당히 현역으로 마치고 일류 기업에 입사하여 능력을 발휘하며 인정받는 사원이 되어 고임금 직업군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규정한 틀 안에서 자본가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능력을 발휘한 결과 얻게 되는 성과일 뿐이다. 매우 특화된 업적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제도에서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에는 최적화되지 못한 인재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사회에서 능력이 뛰어나 많은 보상을 받는 이들은 금수저 청년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회적 불평등을 촉발한다. 능력이 없는 이들은 비정규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흙수저 출신으로 능력을 발휘하여 성공한 청년은 당당히 말한다. '네가 능력이 없어 못 받는 주제에 왜 말이 많은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그대로 금수저 청년에게도 적용된다. 네가 흙수저 부모 집에 태어난 주제에 왜 말이 많냐는 말이다.


그런데 업적 정의에 최적화된 청년은 그런 질문에 바로 반박한다. '금수저 부모를 만나 잘 나가는 것은 너의 능력을 압니다 운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능력을 발휘하여 인정을 받아 고임금 직군에 속하게 되는 것도 운이다. 물론 흙수저로 ‘성공한’ 청년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능력이 최고인 사회에서 자기처럼 명문대도 못 가고 일류 기업도 못 들어가고 회사에서 뛰어난 실력도 발휘 못 한 자가 연봉 수십억을 받는 것은 불의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견에 불과하다. 이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사회의 주도 세력 곧 자본가들이 요구하는 특정한 능력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능력 외에 다른 능력은 없으면서 말이다. 비록 지본가들이 원하는 능력이 없어 고임금 직군에 속하지 않지만 자본가들의 노예로 사는 ‘능력자’가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능력을 지닌 이들이 많다. 다만 자본가들이 그 능력에 기꺼이 보상할 마음이 없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이들이 이 사회에서 ‘루저’로 사는 것이 정의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세 가지 정의 가운데 마지막의 것인 사회정의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업적 정의는 한 사회에 남아 있는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 업적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실 유리한 출발 조건과 사회적 권력의 지위일 뿐인 경우가 흔하다. 또한 업적 정의는 사회적 결속보다는 와해를 조장한다. 업적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의 경쟁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쟁은 자본가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경쟁을 할 때에 자본가들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이익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로섬인 사회에서 한 사람의 성공은 다른 사람의 패배를 의미한다. 능력주의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처음부터 모자라는 명문대 정원, 고임금 직업을 둘러싼 경쟁은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적 싸움을 야기하며, 연대성, 사회적 안정, 생존 보장과 같은 인간적 가치들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잘살자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결국 남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야기하는 데에 자본가들과 공범이 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잉여 이익이 지상 목표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성취동기와 경쟁이라는 시장의 법칙만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으로 매우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이에 비해 ‘사회정의’의 두 가지 형태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동등한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이 사회에 결부된 존재임을 근거로 하여 사회정의는 모든 사람이 한 국가의 사회적, 제도적 규정에 종속되는 한 그들의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는 평등해야 할 것을 요청한다.


기회의 정의는 법적, 사회적 차별을 척결할 것을 요청한다. 국제연합의 ‘세계 인권선언’ 제2조에 나오는 인종, 피부색, 성차, 언어, 종교, 정치, 기타 신념, 민족적, 사회적 출신, 재산, 가문 등을 근거로 한 모든 차별의 금지가 여기에서 기본 원리가 된다. 차이가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회의 정의는 법적 제한을 형식적으로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법으로 보장된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이에 필요한 금전적 자원도 사회가 마련해야 한다. 인간은 외모, 능력,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서 반드시 불평등하게 태어나기에 기회도 불평등하게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금수저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능력도 모자라는 사람은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자질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기회의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회의 정의는 업적 정의와 대립한다. 그래서 군대 다녀온 남성들이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특혜’를 누리는 것에 분노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기회의 정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정당성이 없다.


이 기회의 정의를 보장하는 가운데 물론 사회적 효율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곧 능력을 아무리 발휘해봐야 그 열매는 나만큼 노력도 안 하는 무능한 여성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일을 ‘적당히’, 곧 받은 만큼만 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성취동기가 사라지면 생산성이 줄어들고 이는 자본가들에게 치명타가 된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사회정의의 실현에 매우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본가들은 분노하는 남성 청년들, 이른바 MZ세대의 질투심을 더욱 자극하여 양성 대결의 장을 조장하는 것이다. 수익률 제고를 지상 목표로 삼은 자본가들에게 여성의 권리 보장에 드는 사회적 비용의 부담은 사실 매우 견디기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페미니즘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요 소비계층인 여성을 적대시할 수는 없기에 자본가는 뒤로 빠지고 남성 MZ세대를 전면에 내세워 대리전쟁을 시키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이러한 술수에 넘어가는 남성 MZ세대는 그들대로 자신들의 감정 배설의 대상으로 만만한 여성을 적으로 삼는다. 그들이 보기에 부당한 특혜를 받는 여성이 직업 전선에서 사라져 주면 상대적으로 자신의 경쟁력이 올라기는 일이니 손해 날 일도 아니다. 이처럼 자본가들의 탐욕과 남성 MZ세대의 이기주의에서 나온 분노가 결합하여 현재 대한민국의 기형적인 여성 혐오 사조가 등장한 것이다.


사실 사회정의의 원칙에서 나온 성장의 평준화는 일반적인 성취 의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 큰 사회적 부담이 따르는 더 많은 수입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하는 자극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사회 전체적 체계의 효율도 떨어지고 결국 전체에게 나누어 줄 것이 더 줄어든다. 또한 경제적 효율과 사회적 평등 사이에서 긴장 관계가 나타나고 이는 사회적 갈등의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국가의 사회 정책은 극단적인 경우 경제적 풍요라는 ‘파이’의 확대와 ‘정의로운 분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더 복잡한 문제는 사회정의의 하나인 욕구 정의의 실현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능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근원적인 욕구, 곧 먹고 휴식을 취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가 존재한다. 이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원칙에서 나온다. 그래서 실업자, 무능력자, 장애인, 사회적 약자들이 비록 사회 전체적 재화가 부족한 상황에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인간적 생존은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재화를 분배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보장 제도의 수립과 실천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권, 곧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의 보장도 요구한다.


여성해방을 단순히 남성 중심의 물리적 제도적 ‘폭력’에서 자유로운 삶의 추구라는 소극적인 목표를 넘어선 인간 존엄성의 원칙에 입각한 인권 수호의 차원에서 이해할 때 비로소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여성 혐오의 추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경제적 발전의 열매를 소수의 자본가들이 독식하게 되는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지 않는 한 여성 혐오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나누어 먹을 파이가 적은 상황에서 그것을 두고 노동자인 남성과 여성이 서로 대척을 하게 되면 노동자 전체가 피해를 보게 될 뿐이다. 적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불공정한 이익 분배라는 구조적 모순을 고착화 지키고자 하는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착취 체계가 타파해야 할 제도적 악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 대립할 것이 아니라 공동의 적, 곧 모순된 착취 제도의 개혁을 위해 협력을 해도 모자랄 것이다.


제도 개혁은 어찌 시작하는가? 당연히 정의로운 분배를 위한 법 제도의 수립과 실천이다. 구체적으로 자본가들이 독식하다시피 하는 경제활동의 열매가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원칙에 따라 분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여성 혐오에만 골몰한다면 결국은 노동자인 남성과 여성이 공멸할 것이다. 여성을 자본주의의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에서 몰아내면 결국 나누어 먹을 파이는 더 줄어든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생리이다. 사냥꾼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잡아먹는 법이기 때문이다. 토사구팽 아니던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여성 혐오에 골몰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남성 MZ세대가 답답할 뿐이다. 목표는 여성이 아니라 현재 대선에 후보로 나선 이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작은 파이를 놓고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내라고 닦달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재명도 윤석열도 이낙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홍준표는? 아예 말을 말자. 여성해방 문제에서 그는 해결책 제시보다 자기반성이 선행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기대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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