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에게 장수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닌데 어쩌나?
노인학이 필요하다
by Francis Lee Nov 29. 2021
KBS의 시사기획 프로인 ‘창’에서 ‘전두환’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보았다. 그런데 그 장면 가운데 궁지에 몰린 전두환이 백담사에서 많은 아줌마들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제 보니 이미 이때부터 치매기가 보였다. 자기가 뭔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표정이다.
그때가 1988년인데 그 이후 30여년을 더 살고 마침내 자연사했다. 악마나 다름없는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고 죽은 것이다. 그나마 정의는 살아 있어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그 유골이 갈 곳도 찾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적이 아니라 국민의 가슴에 총구를 들이민 이승만과 박정희의 ‘전통’을 계승한 전두환의 악마적 군사독재 통치라는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은 채로 쉽게 저승길을 떠났다. 적어도 이승만은 해외로 추방되었고, 박정희는 총살되어 죄에 대한 벌을 받았지만, 전두환은 사형, 무기징역, 특별 사면의 과정을 거쳤을 뿐이다. 1997년 사면이 되어 감옥에서 나온 장면에서 그의 얼굴에는 이미 검버섯이 피어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음에도 그는 당당했다. 그런 그도 노태우가 죽은 지 28일 만에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90살. 참 오래도 살았다. 그런데 그 누구도 그의 삶을 칭송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그의 집권 시기인 1983년부터 그는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의 장수는 축복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두환의 장수만이 저주가 아니다. 가열되는 세대 갈등, 급속히 도달한 초고령 사회의 저주가 대한민국 사회를 극한적인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사회 안전망의 두 기둥인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이 특히 장수하는 노인들 때문에 급속히 고갈되고 있다. 통계적으로 의료보험의 ‘수혜’가 고령자에게 ‘지나치게’ 쏠리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의료보험 재정이 2050년 무렵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적당히’ 죽지 않고 갈수록 장수하는 노인들 때문에 국민연금은 2050년 정도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건강 수명은 이미 60 이전에 종료됨에도 의료 기술의 발달로 병든 육체의 수명을 연장하는 이들이 늘어나 사회적 비용이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와 같은 60대와 그 이상의 노인들이 분기탱천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나라를 위해 ‘고생한’ 노인들에 대한 경로사상이 사라진 사회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도 60대가 되고 보니 그것은 거짓말이다. 도대체 나의 연령대 곧 베이비붐 세대가 언제 나라를 위해 고생할 시간이 있었나? 솔직히 말해서 그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몸부림치고 살아온 것뿐 아닌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생한 이들은 대부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60이 넘어 살아 있다면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에 더 심취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제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4위에 속할 정도로 높다. 그런데 문제는 은퇴 시기가 너무 빠르다. 공무원과 같은 극히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50대부터 은퇴를 한다. 법정 은퇴 연령인 60살을 채우는 직장인은 7%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50대에 은퇴하고 평균수명을 산다고 해도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아직 사회 안전망이 부족한 나라에서 30년을 더 살아야 하기에 고령에도 노동 시장에 내몰린다. 통계적으로도 한국의 노인 빈곤율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70대 중반까지 노동 시장을 기웃거리는 것이 한국의 노인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장수는 이제 축복이 아니라 고통이다.
전두환처럼 숨겨둔 재산이 넘치는 노인들도 장수가 축복이 아니다. 경로사상이 사라진 사회에서 노인은 조롱과 분노의 대상일 뿐이다. 청년층의 변명은 간단하다.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특히 정치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심각하다. 60이 넘은 윤석열이 보여주는 언행만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이른바 ‘올드보이 똥파리’들이 보여주는 ‘만행’을 보고 MZ세대 가운데 누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이 들겠는가?
그런 고관대작만이 아니다. 내 나이 또래, 곧 60대의 평범한 ‘노인’들의 언행도 젊은이들의 존경을 이끌어 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른바 나잇값을 못 하는 노인들이 대한민국에 차고도 넘쳐난다. 그러면서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청춘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탈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나이 먹는 것은 재주가 아니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늙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나이만 먹었다고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꼰대가 너무 많다. 이런 늙은 꼰대들은 MZ세대의 존경은 고사하고 증오와 분노만을 일으킬 뿐이다. 그런 젊은이들을 보면서 꼰대들은 반성과 이해보다는 잔소리만 해댄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이 씨 조선 왕조가 중국의 유교라는 수직적 패러다임을 확고히 세워 사회질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40여 년의 독재 정권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그 유교적 패러다임을 대체할만한 근대 서양의 수평적 패러다임의 정착에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늬는 현대 서양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정착시킨 사회이지만 정작 그 내면에는 함석헌의 표현대로 구질구질한 유교의 ‘뼈다귀’가 남아 가짜 패러다임의 역할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꼰대들은 여전히 경로사상을 내세우고 효 사상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약발이 전혀 없는 패러다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유교적인 계급주의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패러다임이 최소한 피상적으로는 여전히 먹히고 있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MZ세대가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이 패러다임을 깨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력은 솔직한 이기주의이다. 물론 이상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은 수직적 동양 유교 문화에서 수평적 현대 서양 인본주의 문화로 이전하는 것이다. 이 인본주의의 핵심은 개인주의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전혀 다른 범주의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인권과 직결되지만, 이기주의는 반인권적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는 없고 이기주의만 판치고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자도생을 시작한 IMF 사태가 그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IMF 사태 이후 10년 만에 발생한 이른바 월가 금융위기로 그러한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는 이제 한국 사회의 집단의식으로 고착되었다. 병든 개인주의인 이기주의가 득세하는 사회는 당연히 건전한 발전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당장 효과를 발휘할 대책은 없다.
그래서 ‘노인 문제’에 일찍부터 접근한 서양을 벤치마킹할 수밖에 없다. 인제 와서 다시 조선 시대로 돌아가 ‘경로우대’를 강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서양에서는 노인학(gerontology)이라는 학문이 20세기 초반부터 존재해 왔다. 노인학은 그리스어로 노인을 의미하는 γέρων과 학문을 의미하는 λογία의 합성어로 소련의 동물학자인 메츠니코프(Ilya Ilyich Mechnikov, 1845~1916)가 만들어 낸 용어이다. 그는 예방의학 분야의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예방과 관련하여 그는 오늘날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로 불리는 락토바실리우스(lactobacillus), 곧 유산균이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노인학은 이보다 훨씬 전에 중세 이슬람 문명에서 의학 분야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때도 노년기에 접어든 인간의 건강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오랫동안 ‘노인 문제’를 가족의 차원에서 해결하는 패러다임을 유지해 왔다. 그래서 유교에서도 효를 강조했고 유대교에서도 십계명에 부모 봉양의 의무를 명시했다. 그리고 불효에 대해서는 엄격한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효도를 강요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노인 문제’는 더 이상 후손들의 효도에 의존하는 가족 내의 책임으로만 남기기에는 너무 커다란 사회적, 경제적 부담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경제 수준의 제고와 더불어 의학의 발달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노인의 비율이 비약적으로 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 사회가 유지되려면 생산이 소비를 앞질러야 하는 데 노인들은 전형적인 소비 주체인 데다가, 질병 등으로 의료비 등 사회적 자원을 고갈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서양에서 산업혁명 이후 일찍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특히 사회 복지 차원에서 국가가 국민의 노년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근대적 형태의 노인학의 학문적 체계를 수립한 비렌(James E. Birren, 1918~2016)은 1940년대에 이미 인간의 노화를 3단계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노년의 ‘삶의 질’을 학문적으로 정의해내기도 하였다. 오늘날 노인학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장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 늙음 자체의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생물학적, 의학적 의미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로 자리 잡았다. 결국, 잘 늙고, 잘 죽는 방법을 찾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노화의 지연이나 ‘방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늙기 싫고 궁극적으로 영생을 바라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많은 사이비 과학자들이 오늘날에도 무병장수를 호언장담하는 ‘약장사’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지구나 태양조차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데도 인간들은 영원한 청춘과 영생을 꿈꾼다. 왜 그런가? 오직 인간만이 반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만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주변 상황의 변화를 인위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노화와 더불어 육체적 능력이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게다가 정신적인 훈련을 게을리하면 지혜는 고사하고 지식도 모자라는 존재가 된다. 과거 농경문화 사회에서는 농업과 관련된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이 지혜의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지만, ICT가 주도하는 지식 산업 시대에서 그러한 경험으로 축적된 지식은 더 이상 효용성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노인들은 젊은 세대에 비하여 지식이 부족해지기 쉽다. 그래서 무시를 쉽게 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가? 윤석열이 11월 28일 자신의 직속으로 설치된 ‘내일을 생각하는 청년위원회’ 출범식에서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우리 청년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머리도 별로 안 좋은 기성세대가 청년 표심 잡겠다고 한다고 그게 오는 것도 아니다.”
윤석열에 따르면 노인만이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가 머리도 별로 안 좋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나 보다. 그런데 이상하다. 윤석열도 1960년생이니 61세로 ‘노인’인데 자신도 머리가 별로 안 좋은 세대에 속한 것에 부끄러움이 없나 보다. 아니면 너무 어린 아내와 살다 보니 자신의 나이를 잊었나?
나도 60이 넘은 나이이니 윤석열만큼 머리도 별로 안 좋은 세대에 속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석열의 언행을 이해하기 힘드니 말이다. 그리고 현재 대선 정국에서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진보와 보수 진영도 이해하기 힘들다. 현재 윤석열을 지지하는 20대와 60대 이상의 국민, 그리고 이재명을 지지하는 30~50대 국민은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고 있다. 특히 MZ세대는 꼰대들이 자신의 불행의 근본 원인으로 여기고 있고, ‘기성세대’는 그런 MZ세대의 아픔과 분노에 무심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친독과 반독 진영이 갈라져 대립하는 모습을 보고 앙드레 모루아(André Maurois, 1885~1967)는 프랑스인들이 모래알과 같다고 탄식하였다. 당시 프랑스 우파는 히틀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것이 오히려 맘에 들어 다가오는 파국에 눈을 감아버렸다. 좌파는 물론 히틀러에게서 악마를 보았다. 그러나 극한 대립은 프랑스 지성의 지혜의 눈을 멀게 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는 독일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내부적으로 분열된 민족만큼 취약한 진영은 없는 법이다.
지금 대한민국도 처절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MZ세대와 중장년층이 분열되어 있고, 남자와 여자가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극한 대립을 보이고 있고, 오래된 전라도와 경상도의 동서 갈등도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게다가 남한은 여전히 북한과 적대 관계를 유지 중이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에서 말이다. 사실 ‘라때’는 이런 상황에서 사회의 어른들이 나서서 중재와 화해를 모색했다는 전설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내 기억에 나의 20대 시절에도 대한민국은 분열되어 있었다. 군사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수구세력 무리와 그에 맞서는 민주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민주 진영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만이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렸다.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또 다른 많은 젊은이가 거리에 나서서 최루탄과 곤봉을 맞아가며 나라가 바른길을 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젊은이가 안 보인다. 사회 정의, 공동선에 관심을 두고 멸사봉공하는 이들이 안 보인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자신의 사익을 ‘희생할 마음’이 있는 젊은이들이 전혀 안 보인다. 그저 자기 집을 사기 어렵고, 취업이 안 되고, 임금이 적어 분노하는 MZ들만 넘쳐나고 있다. 어차피 현대사회는 zero sum society이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강자가 독차지하면 나머지가 나누어 먹을 파이는 없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강자가 수립한 불의와 불공정의 프레임을 깨뜨려야만 집을 사고 취업을 하고 고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MZ세대는 그런 강자에게는 도전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 그저 만만한 또 다른 약자인 꼰대 세대만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열을 저 멀리 안온한 자리에서 바라보는 그 기득권 세력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데 그 기득권 세력이 대부분 노인들이다. 이 어찌 된 일일까? 윤석열이 분명히 말한 대로 중장년층은 머리가 안 좋고 노인들은 더 안 좋은데 비싼 집과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계층도 그들이니 말이다. OECD 국가 가운데 노인 빈곤층이 가장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된 계층도 노인층이다. 그런데 세대 갈등, 남녀 갈등, 동서 갈등이 남북 갈등을 능가하는 데도 그 노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만만한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이 위기 상황에서도 ‘이대로’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런 노인들의 의식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들의 늙어가는 것과 죽음에 관한 생각이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데 MZ세대 누구도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집 내놔라’, ‘돈 내놔라’ 외치며 악다구니만 벌이고 있다.
최근 14개 국가의 14,000여 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놓고 비교 연구한 자료가 있다. 주제는 당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국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족을 지적했는데 비하여 한국만이 돈을 지적했다. 원래 대한민국이 이랬나? 원래 한국이 젊으나 늙으나 돈만 밝히는 나라였나? 그리고 강남 요지에 있는 큰 집에 사는 것을 자랑하고, 비싼 외제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고, 사치품을 명품이라고 걸치고 다니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만 넘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게 플렉스 하면서 평생을 보내다가 90 넘어서 세상을 뜬 전두환은 왜 살았을까? 영화 <전우치>에서 화담이 식당 구석에 숨어 있는 13살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묻는다. 살고 싶으냐? 그러면서 이어 말한다. 살아봐야 별거 없다고.
내가 60을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정말 인생 별거 없다. 20대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40대까지 출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나서 60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열매를 거둔다. 그리고 60이 넘으면 끝이다. 혹자는 60부터 청춘이라는 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한두 가지 잔병은 달고 다니고 ‘비아그라’를 먹어도 기력이 예전만 못하다. 단순히 발기만 잘 된다고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걸음도 느려지고 판단력 순발력 모든 것이 60을 기점으로 현저히 줄어든다. 급속한 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카락이 성겨지고 색깔도 푸석해진다. 정말로 무릎에 찬 바람이 분다. 눈이 침침해서 운전할 때 교통신호 표지판이 어른거린다. 터널을 들고 날 때마다 눈앞이 어지럽다.
물론 노화에 개인차가 있다. 그러나 60살의 몸이 20이 될 수 없다. 80이 되면 몸 대부분 기능이 정지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도 죽지 않으려고 ‘발악’을 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단순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탐욕과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 탓만은 아니다. 생물학적 노인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사회적 어른이 되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결과이다. 나이는 저절로 들지만, 어른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기도 전에 서둘러 늙어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다 보니 ‘노년의 지혜’를 쌓을 겨를이 없다. 그래서 젊을 때와 똑같은 탐진치를 버리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다가 무명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내생을 부인하는 유교적 현실주의에 철저히 물들어 죽은 정승보다는 개똥밭에서 구르는 개가 되기를 바라는 인생관도 한몫하고 있다.
이런 노인들의 의식 개혁을 이제부터라도 시작해야 하나? 그래서 그들이 단순히 늙은 꼰대가 아니라 젊은이에게 지혜를 전해 줄 수 있는 어른의 길을 늦었지만 나서도록 해야 하나? 그런데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도 고집만 붙들고 있는 나 같은 노인이 배울 의지가 있을까? 그런데 지금 노인들도 노인학을 안 배우려는 데 MZ세대는 아예 관심조차 없지 않을까?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노인학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단순히 노인을 생명 연장과 복지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노인의학(geriatrics)이 아닌 학제적인 노인학(gerontology)의 차원에서 말이다. 60이 넘어도 공부할 것도 많고 할 일도 많다. 이걸 언제 다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