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사랑이 사회적 질병이 된다.
국민의힘의 의원으로 잘 나가던 장재원과 곽상도가 곤욕을 치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식이다. ‘못난 자식’ 커버하느라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장재원의 아들은 ‘사소한’ 음주운전이지만 두 번이나 걸려서 사달이 났고 결국 아버지가 윤석열 선거캠프에서 물러나는 수모를 겪게 만들었다. 곽상도의 아들은 이른바 ‘지잡대’ 출신으로 중소기업에 6년 근무하고 50억 퇴직금을 받은 사달이 나서 결국 아버지가 탈당하는 수모를 겪게 했다. 못난 자식이 아버지에게 피해를 준 사례이다.
그런데 잘난 자식도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미국에서 CPA 자격을 받은 딸은 둔 박영수도 곤욕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를 뒤집어 놓고 있는 화천대유의 직원으로 일하건 그 딸은 회사가 관여한 대장동의 회사 보유분 아파트를 2021년 6월에 7억에 ‘분양’ 받았는데 9월에 15억을 호가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 사태를 놓고 “결코 특혜분양이 아니었다.”라고 딸을 변명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금수저 MZ세대들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 사례가 차고도 넘치니 말이다. 그래도 꼰대는 그 먹물 다 뒤집어쓰면서도 자식 감싸기에 바쁘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자.
과거 대선까지 노렸던 정몽준이 서울 시장 선거에 나설 무렵인 2014년 그의 막내아들이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어 결국 낙마한 때도 있다. 정몽준이 눈물을 흘리며 아들 대신 사과했지만,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한창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세월호 사태에 관하여 정몽준의 18세인 막내아들이 2014년 4월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세월호 사건이 난 지 이틀 만에 올린 글이니 아직 이 문제가 박근혜의 정치적 몰락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때였다. 정몽준의 막내아들은 그 당시 18세이니 1996년생이다. 현재 25세. 전형적인 MZ세대이다. 그것도 금수저 MZ세대다.
비슷한 시기 경기도지사를 하던 남경필의 큰아들이 군 생활 중인 2014년 4월부터 8월 사이에 후임에게 폭행과 성추행을 한 사실이 밝혀져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하여 백배사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결국 재판에 넘겨져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전과자가 되었다. 1991년생이니 현재 30살 역시 전형적인 MZ세대이다. 그런데 이 아들이 2017년 마약을 밀반입하고 투약한 혐의로 다시 법의 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보호관찰 및 약물치료 강의 80시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2심에서는 직업 훈련을 받는 사정을 참작하여 약물치료 강의를 40시간으로 대폭 감경받았다. 그래도 전과자의 낙인을 영원히 씻을 수 없게 되었다. 남경필은 이때 독일 출장 중이었으나 일정을 취소하고 아들 문제를 다시 한번 아버지로서 대신 깊이 사과하였다.
다선 의원의 관록을 지닌 정청래도 아들의 덫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2015년 당시 중학생이던 그의 아들이 성추행한 사실이 밝혀져 2016년 제한을 받고 교육을 받았던 사실이 2017년에 밝혀져 역시 백배사죄하였다. 그 당시 정청래의 변명은 “정치인으로 살아오며 아버지로서 역할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몇 가지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자식이 잘못하면 하나같이 ‘아버지’가 사과한다. 도식화하자면 MZ세대가 잘못한 것을 꼰대가 대신 책임지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이자 ICT 강국인 한국에서 말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당연히 유교적 문화 잔재의 영향이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고 군사적으로 6대 강국이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었다고 해도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의식은 2500년 된 ‘유교 Made in China’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삼강오륜을 가족 관계의 으뜸으로 삼는다. 삼강오륜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니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으니 그저 간단히 기억을 되살려본다.
三剛에서는 부자의 관계보다 군신의 관계가 앞서나 五倫에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만큼 유교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모든 사회 구조의 기초였다. 유교 국가의 기초는 가정이고 가정의 기초는 아버지와 아들이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아버지가 ‘못난’ 아들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 관례다. 아들이 마약과 음주운전을 하거나 부당한 퇴직금을 받으면 아들은 아들대로 벌을 받지만, 아버지는 도덕적 차원의 연대책임을 지는 것이 한국 정치계의 관례처럼 되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자녀는 부모의 DNA를 반씩 받아 태어나는 법이니 아버지의 분신이 아들인 것은 절반 맞는 이야기다. 그러니 아버지와 아들이 일심동체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아들이 아버지의 alter-ego나 Doppelgänger가 될 수 없고 개별적인 존엄성을 지닌 독립된 개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된 서양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한국 사회에 정착되었지만, 여전히 父爲子綱과 父子有親은 유효한 원칙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의 사회 문화가 서양처럼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asynchronic 하게 변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서양의 문학사조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로 역사변증법적인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낭만주의,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차가 거의 없이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문학사조의 역사성이라는 것이 한국에서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전주의를 텃밭으로 한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기초한 자연주의라는 해석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시차가 있는 것이 시차 없이 공존하는 것을 asynchronic하다고 말한다.
사회와 가정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사회와 가정의 제도적, 윤리적 기초가 되었던 유교가 조선 시대와 더불어 무너지고 해방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몰려든 서양 제도, 곧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 제도가 사회 곳곳에서 건재하며 양성차별, 갑질, 학연, 지연, 혈연의 폐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첨단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제도와 대의민주주의를 두 기둥으로 한 사회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사실 가부장 제도는 민주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임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존하고 있다. 이미 사라졌어야 하는 중국 유교의 폐습인 가부장 제도와 근대적 서양 사상인 민주주의가 이런 식으로 어색한 동거를 하는 사회의 모습 또한 asynchronic하다고 말한다.
asynchronic한 사회는 깔끔하지가 않다. 이미 사라졌어야 하는 구습과 폐습이 여전히 남아 그 사회 구성원의 집단의식 안에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기에 한국이 분명히 정치 경제적으로 선진국임에도 유교적 폐습인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라는 후진국의 모습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사회에서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실질적인 성인 대접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현실적으로 정신적으로 분리 독립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끈적한’ 부자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일부 한국인들은 2,500년 전의 공자가 말한 부자유친의 덕이 없는 ‘개인주의적’ 서양의 문화를 비난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한국 사회에 범람하고 있는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단어가 말해주는 대로 in+dividium, 곧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주체성과 존엄성을 지닌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이념이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유아기적인 자기중심적 자이를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는 계몽되지 못한 ego에 집착하는 자의 사상을 지칭한다. 개인주의는 평등과 민주의 정신이 구현되는 선진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기주의는 유교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혈연 가족 중심주의의 구시대적인 악습이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 또한 한국 사회의 asynchronic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서 특히 서울에는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MZ세대가 놀 거리가 넘치고 외제차가 넘치지만, 그 안에서 사는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유교가 여전히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MZ세대로 위계질서적인 관념을 맹종하여 상품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서열을 정해서 플렉스 하는 데 더 골몰한다. 그런 아들이 플렉스 하는 데 기죽을까 봐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특히 ‘어깨에 힘주는’ 꼰대들은 뼈 빠지게 돈을 벌고 그것도 모자라면 불법도 자행한다. 곧 부동산 투기, 위장 전입, 더 나아가 논문 표절, 뇌물 수수 등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장관 청문회 등에서 그런 사실이 밝혀지면 한결같이 ‘그 당시 관행’이었다고 변명한다. 심지어 아들의 부정입학, 부정 논문, 부정 졸업, 부정 취업에도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자식 사랑’이 넘치다 보니 저지른 ‘실수’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의 꼰대들의 MZ세대인 자식을 위해 체험하는 블루스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러한 블루스에 대한 책임을 한국의 꼰대들은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스스로 원한 고난이기 때문이다. 자식 사랑은 지상명령이라는 집단의식에서 벗어나기에는 한국 꼰대들의 두뇌는 유교에 지나치게 세뇌되어 있다. 그런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개인(in+dividium)인 나의 삶의 무효화와 직결되는 현상이 퍼진 현실의 모순을 보지 못하는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인가? 그 어떤 이유든 결과는 같다. 한국 꼰대의 자식 사랑, 더 나아가 집착은 여전히 치유가 불가능한 거시다. 사실 자식 사랑은 근원적으로 인간의 DNA에 새겨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는 한 거부하기가 힘든 본능과도 같다 그러나 이 사랑이 지나쳐 집착이 되고 나면 사회적인 공동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꼰대 본인에게도 현실적인 불이익이 발생하게 된다.
사실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해갈등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은 부모의 이익을 자식의 이익을 위하여 양보하는 것이 원칙인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일종의 이타주의인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자식도 주체적인 개인이기는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이미 부모의 복사판, 곧 aler-ego로, 온전한 타인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 될 수 없다. 결국 내돈내산의 논리가 자식 사랑과 연계되면서 자녀를 통한 자기애의 발로인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종 차원의 종족보존을 위한 행위로 해석되기도 어렵다. 오히려 내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다른 핏줄에 대한 무관심이 강화되어 결국 선택적 사랑으로 종 자체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꼰대의 블루스는 결국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