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윤리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왜 하필 사회윤리인가? 개인윤리에 관한 엄청난 이론들이 넘쳐나고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의 가르침도 충분히 있는데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해야겠다.
내가 윤리 공부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은 2,500여 년 전부터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부처와 예수까지 어마어마한 인물들이 인류 역사에 나타나서 엄청난 윤리적 사상을 설파하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했음에도 왜 인간은 여전히 부도덕한가 였다. 유교의 인,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은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다. 이제 진리를 알았으니 그를 실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각 종교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조차도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완벽하게 인, 자비,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그러면서 변명한 한다. 스승만한 그릇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승을 신격화해버렸다. 그래야만 자신은 어차피 인간이라서 그런 신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주장한 가르침은 모두 한 개인의 내적 변화와 그에 따른 실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곧 내성외왕이 되든, 득도하여 자비행을 하든,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든, 일단은 인간의 내면적 변화, 종교적으로는 회심, 회개가 전제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그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감탄하며 받아들인 이들조차 그 이론을 실천하는 데에는 더뎠다. 그리고 더 나아가 회심과 회개를 한 다음에 배신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행동은 고사하고 이론적 차원에서 패가 갈려 한 스승을 놓고는 해석을 달리하며 서로를 못 잡아먹아 안달하는 일까지 생겼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또한 놀라운 것은 지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인간들이 윤리 공부를 포함한 여러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의사, 변호사, 고위 관리가 되고 나서는 부도덕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지행합일설을 내세우지 않았던가? 공부를 잘해서 인간의 도리를 알면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윤리에 관한 공부를 안 한 사람들이 더 도덕적인가? 그렇지도 않았다. 배우나 안 배우나 별 차이가 없었다. 윤리 공부를 안 한 사람도 도덕적일 수 있고 윤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부도덕해질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한 말인가?
이 문제를 도저히 풀길이 없어 혹시 철학과 신학의 역사가 깊은 독일에서는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일을 저질렀다. 곧 attempto!를 한 것이다.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도덕에 있어서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먹고살자고 애쓰고 있었고, 성경에서 말한 사랑의 삶을 완전히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독일에도 강도와 사기꾼이 있었고 정치가들은 거짓말을 하고 권모술수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매우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개개인은 특별히 도덕적이지 않은데 사회는 매우 도덕적이었다. 사회학적인 여러 지표로 조사를 해보아도 독일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덜 부패한 나라였다. 그런데 독일 학교에서는 윤리 도덕 과목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아예 도덕 교사도 없었다. 그런데 사회가 도덕적이었다. 이유가 뭘까?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이고 마음의 변덕은 죽 끓듯 하며, 작심삼일인 존재이다. 그런 인간에게 고상한 도덕적 가르침을 전수해봐야 먹혀들 리가 만무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을 배웠어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으면 언제든 내팽개치는 것이 인간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다. 윤리 교육은 이성적 존재에게만 가능한 법이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곧 훌륭한 교육을 시켜 인격을 도야하도록 잘 이끌어 도덕적 인간으로 키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특히 유럽인들은 20세기의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고,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지독한 야만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게 양심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양심은 너무나 허약한 것이어서 아주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형편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재난 속에서 인간의 내며 깊이에 도사리고 있던 이기주의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이기주의는 바로 인간의 생존본능에 기인한 것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두 개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전혀 모르면서도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충실하여 모든 인간은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맹목적으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는 아무리 어마어마한 이성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하여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는 그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에서 이른바 평범하고 도덕적인 청년들이 전쟁에서 매우 비도덕적 존재가 되는 현상을 갈파했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집단적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은 개인의 양심과 윤리의식으로 극복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아니어도 사회 안에서 늘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니부어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제안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환상이다. 간디나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시민 불복종 운동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기적인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 인간이 부도덕한 경우에도 사회는 도덕적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 사회에 구성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개인의 마음은 어찌 되었든 누구나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위에서 말한 대로 독일의 사회윤리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