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윤리가 기독교사회론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당연히 인간에 대한 이해도 기독교적인 것이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기독교가 신 중심의 종교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 반대이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닮았다. 성경에는 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나오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신이 인간을 닮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신은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고 자신을 섬기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죽음으로 위협까지 했으나 인간은 그런 명령을 우습게 알았고 그 대가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쫓겨난 인간을 신은 버려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번성하도록 계속 돌보아 주었다.
신약성경의 예수는 한 수 더 나간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이 신에게 지은 원죄마저 대신 용서하고자 신이 죽는다. 세계 그 어느 종교의 신도 이렇게 인간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 안에 신이 있고 신 안에 자신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자신의 형제자매라고 선언한다. 곧 인간이 신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가난한 인간, 고통받는 인간, 목마른 인간, 갇힌 인간을 신인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접할 것을 당부한다. 결국 신은 그저 인간이 인간이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 존엄의 근거가 나온다.
우리는 흔히 학교에서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배운다. 그런데 정작 그 이유는 모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학교를 떠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 원칙을 종종 잊고 산다. 아니 솔직히 많이 잊고 살면서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한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한국의 현대 교육은 해방 이후 미군정 시절에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은 미국의 것을 모방한 것이다. 사실 일제 강점기의 식민교육을 우리 스스로 극복할 시간이 없었다. 타의로 식민지가 되었듯이 우리의 노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타의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의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도 서양의 것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개념도 수입한 것이다. 다른 많은 서양에서 온 개념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자본주의, 삼권분립, 경제, 사회 등등 만이 아니라 철학, 인식론, 진리, 종교와 같은 개념도 모두 수입된 것이다. 그래서 존엄과 평등도 수입된 개념이기에 그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다. 외국에서 수입한 생활용품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전문 용어들은 일본에서 미리 번역한 개념들이고 한국에서는 깊은 생각 없이 그냥 사용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본래의 뜻에서 멀어진 용어들이 많다. 일본이 만들어 낸 철학(哲學)의 영어는 philosophy이며 이는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哲學은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라는 뜻인데 비하여 φιλοσοφία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일본 사람들의 생각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번역한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예이다. 존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로 존엄(尊嚴)의 사전적 의미는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 그리고 “예전에, 임금의 지위를 이르던 말.”(네이버 사전 참조)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말하는 dignity는 라틴어 dignitas에서 온 것으로 13세기 프랑스어 dignité를 거쳐 영어 어휘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한 마디로 어떤 인간이나 사물이 ‘가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dignity’는 근대적인 의미에서는 영어권에서는 특히 억압받거나 착취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동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개념이다. 독일어로 존엄은 Würde이다. 독일어권에서는 원래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연관을 맺은 개념이었다. 그래서 독일어에서 Würde는 반드시 Respekt 곧 존중과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 인간존엄(Menschenwürde) 개념이 확립되면서 영어권과 마찬가지로 평등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존엄은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의 인간관, 곧 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신이 직접 부여하여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의미한다.
인간존엄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학자는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이다. 원래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다가 부모가 사망한 이후 인문학에 몰입한 그는 히브리의 카발라(Kabbalah) 신비주의에도 매우 조예가 깊은 최초의 기독교권 학자였다. 그는 1496년 발표한 De hominis dignitate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인간 존엄의 의미를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의하였다.
사실 인간의 존엄은 한국과 같은 위계적인 유교 전통이 매우 강한 사회에서는 낯선 개념이다. 상하 계층이 뚜렷하고 이른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구분과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은 매우 낯선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 존엄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개념인데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위상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야 가능한 인간 존엄과 평등의 개념에 대한 이해로 나가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이미 종교가 아니라 문화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신앙과 무관하게 서양의 기독교의 가치가 사회에 녹아들게 되었다. 교회에 실제로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형편없이 줄어들었지만 기독교의 가치와 문화는 여전히 사회의 기름진 토양이 되고 있다. 이는 마치 한국의 불교와도 같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불교 신자는 전 국민의 15.5%밖에 안 되지만 불교는 한국 사회에 토대가 되는 문화로 자리 잡아 그 용어와 사상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거부감 없이 수용되고 있다.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아 불교와 더불어 여전히 한국인의 정신문화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국에 ‘수입’된 지 겨우 200여 년이 되었고 게다가 본격적인 세력 확산은 해방 이후에, 곧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한 다음에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 1950년만 해도 한국의 기독교인은 겨우 8%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전 국민의 20% 정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2000년대가 되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그 신도 숫자에서 정체될 뿐 아니라 사회적 인지도마저 하락하고 있다. 기독교가 한국의 문화로 토착화하는 데에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는 점차 그들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고 사회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집단이기주의를 상징하는 단체가 되어가고 있다. 그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매우 중요한 가치인 인간존엄을 한국인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일은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너무 강한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작업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회윤리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사회윤리의 기초 원리인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는 모두 기독교사회론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 인간존엄의 개념을 자세히 다루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