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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ul 27. 2022

결국 윤석열 정권이 5년을 다 채울 것으로 보인다고?

대동정신이 사라지고 남은 패거리주의 때문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자다. 사회의 차원에서도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자보다 처음부터 갈등 자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자가 위대한 지도자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윤석열 정권에 모인 세력은 이미 남북으로 갈린 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짓만 골라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그 잘난 양반들의 특기인 권모술수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짓’이 윤석열 정권의 수명 연장에 최적의 수단인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동훈은 자신의 집에 세든 자의 보증금을 5억 원이나 올려 받고 정작 자신이 세든 집은 정확히 5%만 올렸다. 그런데 이는 다 합법적인 일이다. 김건희는 NATO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인들을 공군 1호기에 태워 스페인에서 ‘놀다’ 왔다. 그런데 이 또한 다 합법적인 일이다. 윤석열의 윤핵관 중의 핵심을 자처하고 싶어 안달이 난 권성동은 오전에 이준석을 ‘까는’ 윤석열과 주고받은 문자를 오후에 시나브로 공개했다. 그런데 전혀 법에 걸리는 일이 아니다. 무도덕한 사회에서는 ‘법’만 지키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 이 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자들은 법을 너무 잘 안다. 아니 법을 가지고 논다. 그래도 단 한 X도 잡혀가지 않는다. 다 이른바 ‘법꾸라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의 장래가 근심이 되어 경찰 몇 명이 모여도 쿠데타 주모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김건희의 과거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은 고발을 당해서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받는다. 권력을 잡은 자들은 국정을 농단을 해도 합법의 테두리 안에 늘 머무는데 권력이 없는 국민들은 자신의 근심을 토로만 해도 역적으로 몰린다. 그런데 이는 다 합법적인 일이다. 근본적으로 바로 그 법을 권력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권력만 잡으면 법을 초월해 살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사실 ‘이대남’을 등쳐먹기 위해 윤석열과 그 패거리가 이준석을 이용했다는 것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준석의 약점을 이용하여 안철수를 끌어들이면서 대선에서 문자 그대로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제 목표에 도달했으니 토사구팽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다음 타깃이 안철수라는 사실은 지나가는 개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이것이 그 잘난 대한민국 보수 진영의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한 권모술수 아닌가? 그리고 그 권모술수는 이미 이성계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 나라의 잘난 양반들이 갈고닦아 온 유구한 전통이 있는 것 아닌가?    

 

왜 그 잘난 유학자들이 권모술수를 부렸나? 결국 이 세상에서 잘 먹고 떵떵거리며 살다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 ‘청렴한’ 선비 정신을 가르치던 이황(李滉, 1502~1571)조차도 자식들에게는 수십만 평의 땅과 수백 명의 노예를 최적으로 관리하여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특히 노예들은 반드시 평민과 혼인시켜 노예수를 늘리는 것이 좋다는 재산증식의 비결까지 자식들에게 전수한 자가 바로 이황이다.


그러면서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기이원론’에 교조적으로 집착하며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죽을 때가 돼서야 자신의 주장에 흠결이 있음을 슬쩍 고백한 자가 이황이다.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하는 학자의 양심에는 그때도 이미 ‘개 사과’나 주면서 말이다. 학자라면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야 하는 법이다. 이런 것이 바로 기득권자 층에 속한 자의 전형적인 내로남불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그 반대편에 선 양반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권력다툼에서 패배해 귀양살이는 하는 중에도 자식에게는 어떻게 하든지 ‘in-서울’, 아니 ‘in-한양’할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그래야 돈을 벌 기회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이때나 서울에서 버텨야 먹고살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 당시 부패하기 이를 데 없었던 조선에서 올바른 사회 질서에 대한 장황한 이론을 천하에 호령하던 정약용도 별 수 없이 내로남불을 해야 했겠지.     


이완용은? 자기는 토착 왜구가 되어 귀족 작위까지 받다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자식에게는 친미 세력에 붙어야 잘 먹고 잘 살 것이라고 신신당부한 자가 아닌가?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완용은 내로남불을 안 했다. 내로남불이 넘치는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차라리 신선해 보일 정도였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던’ 그 잘난 ‘주둥이 선비’들과는 달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황이나 정약용보다 이완용이 더 나아 보일 정도다. 적어도 위선에 관해서는 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지극히 부패한 사회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더러운 자라고 뻔뻔하게 밝히고 어차피 세상은 더러운 곳이니 너도 같이 더러워지라고 충고하는 자가 신선해 보이기 마련인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다 그렇게 지지고 볶으며 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며 사는 ‘우리 편’에 서라고 은근히 치근대면서 말이다.  

   

문제는 이런 위선적 양반들의 정신을 2022년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이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 잘난 권력 쪼가리라도 얻어 지키기 위하여 권모술수에만 여념이 없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위기로 치닫고 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이미 내적으로 멸망에 이른 말기 조선에서 일어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를 가져올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은 조선 말기의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세계정세에는 눈과 귀를 완전히 닫고 오로지 국내 권력 쟁취를 위한 권모술수에만 골몰하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른바 백년대계를 세우는 일에는 ‘개 사과’나 주어버리면서 말이다.    

    

문제는 한국민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이른바 ‘개돼지’들이 이 술수에 늘 당한다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속고도 똑같은 트릭을 쓰는 윤석열과 그 패거리에게 기꺼이 ‘속아준다.’ 이 권력자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계속 새로운 변이를 일으켜 국민을 속인다. 우리는 과거와 다른 신종이니 안심하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국민이 현명하다면 결국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권에서 놀던 그 나물의 그 밥인 ‘바이러스’가 윤석열 정권에 잔뜩 모여 권모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결국 현재 정국이 혼란스러운 것은 윤김한 삼총사와 윤핵관에 더하여 권력과 전혀 무관한 이 ‘개돼지’들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닌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이들이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권력을 장악하도록 맞장구를 친 ‘개돼지’가 있기에 이런 사달이 나는 법 아니겠냐는 말이다.     


도대체 왜 이 ‘개돼지’는 늘 ‘빨갱이’ 타령이나 하면서 툭하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시청 앞으로 달려가 성조기 흔들기’라는 사달을 벌이는 것일까? 모두 이완용의 유언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았다는 말인가?      


결국 무명이 문제다. 이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차피 진리는 고사하고 진실을 알아 옳고 그름을 식별하고 나라와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 노력하는 고생을 하기는 싫다. 그저 떼돈을 벌어 고급 레스토랑에서 배부르게 먹고, 필드에서 골프채나 ‘뽀대 나게’ 휘두르면서, 외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면서 해외여행을 가서 사치품을 몸에 걸친 사진을 잔뜩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려 플렉스 하다 죽고 싶은 것이다. 사회정의와 공정? 그런 것은 개나 줘버리면서 말이다. 그런 ‘개돼지’가 바로 이 사회에 넘치니 그에 맞갖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전통을 잇는 권력자들이 법꾸라지가 되어 계속 법 위에서 놀아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개돼지’가 아닌 국민도 이 나라에 절반이나 있는데 이들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이들이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하면 모조리 쿠데타 세력, 국기 문란 세력, 정부 전복 세력의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낙인은 모두 합법적이다. 그 법을 권력자들이 만들었고 그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게 정교한 법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면 된다. 기득권 세력에 들어가기만 하면 플렉스 하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그 기득권자가 되려면 유치원 때부터 SKY 캐슬에 최적화된 ‘국영수 실력’을 쌓으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도 강남의 학원가에는 그 잘난 권력과 플렉스를 꿈꾸는 ‘젊은 애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니고 있다.     


과연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한국 사회의 집단의식이 유지된다면 미래는 없다.      


이러한 사달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유교적인 가족주의에서 파생된 패거리주의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버지가 범죄를 저질러도 자식은 그것을 감추어 주어야 하고, 아버지가 분명히 잘못을 저질러도 세 번 설득해보고 안 되면 그 뜻을 오히려 따라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하였다. 지독한 가족주의 사상이 아닌가? 사회에 독이 되는 일을 저질러도 가부장의 권위와 권력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천 년 전 농사가 경제의 모든 기초이던 시대에나 맞는 이런 논리가 2022년 한국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록 한 가정 안에서의 가장의 권위는 개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지만 이런 가족주의의 변형인 패거리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당당히 군림하고 있다.  

   

패거리주의는 분열을 먹고 산다. 그래서 한국이 남과 북, 전라도와 경상도, 부자와 빈자, 여자와 남자, 꼰대와 MZ, 강남과 ‘후진’ 동네, SKY와 ‘루저’대로 모래알처럼 분열될수록 패거리주의는 더욱 기세 등등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이런 분열은 이제 고질병이 되어 치유될 가망이 거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결국 이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분명히 어느 한 편에 섰고, 그 반대편에 있는 국민의 분노를 달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적지 않은 국민이 보기에 ‘내로남불’, ‘권력비리’, ‘경제실패’에서는 진보도 보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수구 찌라시에서 일하는 기레기들의 조작과 가짜 뉴스가 이러 분열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회적 분열을 극복 못한 것은 문재인 정권의 분명한 실책이다. 윤석열도 결국 그 문재인 정권이 ‘키운’ 것 아닌가?     


문재인은 이제 정치에서 은퇴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윤석열보다 지지율이 높다. 그러나 그를 저주하는 이들도 그만큼 된다. 그리고 윤석열의 지지율이 곧 30%를 하회할것 같지만 그를 ‘죽자고’ 미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소셜미디어에 특정 여성이나 남성에 관한 글이 올라오면 서로 죽자고 잡아먹는 꼬리글들이 넘쳐난다. 기득권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부 정책이 발표되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서 그 이익을 나눠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들 간에 ‘을의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면서 같은 한국인인데 서로를 ‘왜놈’이나 ‘떼 놈’보다 더 증오한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패거리주의는 바로 그런 증오를 먹고 산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의 등장 이후 그런 증오가 오히려 더 늘고만 있으니 패거리주의가 어찌 사라지겠는가? 이런 패거리주의의 분위기에서는 윤석열 정권은 충분히 5년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탄핵은 물건너 간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신냉전 시대의 도래,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에 따른 의료 체계의 붕괴, 그리고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이 뒤섞인 경제적 대혼란이 가져올 파국적 상황이 ‘퍼펙트 스톰’이 되어  한반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으나 여전히 사분오열되어 서로를 물어뜯고만 있으니 미래가 있을 리가 있나? 이대로라면 결코 없다.   

  

그렇다면 방법이 전혀 없나? 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이다. 이 나라를 구할 방법은 혁명밖에 없다. 맹자의 역성혁명도 좋겠지만,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한 식의 ‘자기로부터의 혁명’이 무엇보다 더 간절히 필요하다. 관성에 빠진 과거의 진부한 자기의식에서 벗어난 정신혁명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 제도의 개혁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증산교에서 말한 대로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이 개벽되어야 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정신의 혁명이 없으면 역성혁명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그 혁명의 길을 가보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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