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Dec 22. 2022
젤렌스키가 슈퍼 히어로라고?
그는 미국에 '기쁨 주고 사랑받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길고 긴 ‘스탠딩 오베이션’이 이어졌다. 한 성질 하는 하원의장 낸시도 젤렌스키의 손을 어루만지며 어쩔 줄 몰라한다. 젤렌스키가 미 의회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오랫동안 이쁨을 받으며 수줍어하는 모습이 전 세계의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미국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200억 달러, 약 25조 원을 지출하였다. 한국이 2022년에 지출한 국방비가 55조다. 그 절반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게 퍼주었고 앞으로도 더 퍼줄 예정이다. 얼마나 이쁘면 그럴까 싶다.
젤렌스키는 타고난 배우다.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잡기 전에 대통령 연기를 하는 코미디에서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국민은 그의 연기에 취해 아예 진짜 대통령을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현재의 상황이 벌어졌다. 코미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비극이 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 Περὶ ποιητικῆς)에서 비극이 희극보다 더 위대하다고 설파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비극은 이른바 비극적 쾌감. 곧 카타르시스를 가져와서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 비해 희극은 결코 그런 정신적 고양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까지 서양에서 코미디는 환영받지 못한 저질로 여겨졌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비극에서는 영웅적인 주인공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여 관객들의 마음에 비극적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현실의 비극에서는 주인공은 질기게 살아남고 조연들만 죽어나간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전쟁에서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 곧 각 국가의 지도자들은 질기게 살아남았지만 그 국민들은 대부분 ‘개죽음’을 했다. 희생자들을 위한 정치가들의 립서비스는 그들의 생명을 되살리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영토를 빼앗긴 우크라이나가 저항하면서 양국의 희생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국제연합 UNICEF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2년 12월 5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측의 사망자는 6,702명, 부상자는 10,479명이다. 살아남은 이들 가운데 1,400만 명이 피란민으로 집을 떠났다. 이들 대부분, 90%가 여자와 어린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어린이 50%가 피난길에 나섰다. 사실 전쟁이 날 경우 죽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고통이 없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슬픔은 죽음보다 심한 경우가 많다. 우크라이나 인구는 4,400만 명 정도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31%가 피난 행렬에 나섰다는 말이다. 위에 나온 숫자는 민간인만 계산한 것이다. 전선에서 군인이 실제로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는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군사 비밀이니 말이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은 2022년 12월 9일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각각 10만 명의 사상자를 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전쟁으로 군인만 20만 명이 죽거나 다친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멈출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젤렌스키가 미군 수송기를 타고 워싱턴에 도착하여 내뱉은 첫 말은 민간인 구호도 평화 협상도 아닌 ‘more arms’였다. 그리고 현재 우크라이나 여자들이 죽은 아들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한다는 말도 알뜰하게 전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이미 판단력이 상실되어 버렸다.
민족주의와 이데올로기에 감염된 정신은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코미디로 시작한 일이 비극이 되어 버리고 그 비극이 이제 희극이 되려고 한다. 아무런 감동도 없는 살육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명분은 이미 사라졌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치가들의 명분 싸움에 국민만 희생당하고 있다. 민족주의에 애국주의가 더해지면 집단 광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경우 십중팔구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광기는 전쟁의 참상 앞에서 얼마 못 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광기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전시 체제다. 일단 체제가 수립되고 돌아가기 시작하면 개인은 그 체제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부품이 전쟁 참여를 거부할 경우 반역자의 굴레를 쓰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 체제의 최정상에 있는 푸틴과 젤렌스키는 각 나라의 영웅이 된다. 국민의 피를 많이 흘릴수록 영웅은 더욱 빛을 발한다. 젤렌스키는 이미 <TIME>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되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수천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해야 했다는 사실은 잊히고 말이다.
젤렌스키는 한국의 어느 방송국의 로고송처럼 미국에 ‘기쁨 주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도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피난길에 나서는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평화다. 그러나 현재 푸틴과 젤렌스키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평화다. 그래서 현실의 비극은 코미디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고,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진실도 전쟁은 쉽게 비틀어 버린다. 나라의 지도자가 기쁨을 주고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국민이라는 진실 말이다. 미국에 기쁨 주고 사랑받는 젤렌스키를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 국민도 정말 사랑할까? 만약 사랑한다면 정말 비극적 쾌감을 주는 역설적인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