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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Feb 24. 2023

신천지가 열리는 때가 이제 멀지 않아 보이나?

서양식 ‘무지의 장막’으로는 신천지를 막을 수 없다.

흔히 원초적 상태(original position)로 불리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은 롤스(John Rawls, 1921~2002)가 1971년에 쓴 <정의론>에서 처음 소개한 개념이다. 무지의 장막은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개인이 놓인 가상의 무지의 상태를 말한다. 이 가상의 상태에서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자연 능력이나 재능, 인종, 성별 또는 민족성, 종교를 포함해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개인적 특성을 알지 못한다.      


롤스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무지의 베일 뒤에 서면 편견 없이 기초적인 사회 구조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롤스는 인간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나 자신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정의롭고 공정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무지의 베일은 롤스의 정의론을 사회적 공정을 촉진하는 이론으로 이해하는 데 종종 활용되는 사고 실험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회는 그 사회의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구성원들의 복지를 극대화하면서 나머지 구성원의 자유와 기회도 보장하는 공동체이다. 롤스는 모든 인간이 무지의 베일을 쓰면 한 사회에서 최고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전체 구성원의 이익을 고려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적 계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무지의 베일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관한 사유 실험에 유용한 도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계와 단점이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고난 개인적인 특성과 편견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기에 매우 어릴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의미하는 대로 인간은 타고난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잊으려고 해도, 자신의 본성과 경험만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강력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백인 중산층으로 태어나 무난히 초중등교육을 받고 대학교를 졸업해 미국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과 한국의 황인 중산층으로 태어나 비슷한 교육 과정을 거쳐 직장인이 된 사람은 많은 점에서 다른 세계관과 인간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실 한 사회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예측해 볼 수 있다. 이건희의 맏아들로 태어나면 성격, 인격, 지력, 능력과 무관하게 세계 최고의 기업인 삼성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시원에서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의 미래가 절망적일 확률은 대단히 높다. 물론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문자 그대로 가에 콩 나듯 할 뿐이다. 그래서 무지의 베일은 롤스가 생각한 만큼 인간의 편견을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의 결정적인 단점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합리성과 판단력을 타고 난고 가정하는 것에 기인한다. 실제로 인간은 서로 다른 수준의 지능과 성격을 타고나며 후천적인 교육과 경험으로 형성된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니게 되어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는 능력에 현저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결국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고 현실 세계에서 너무 동떨어진 개념이다. 인간은 결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선천적인 지력과 성격, 육체적 조건이 매우 상이할 뿐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도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등한 인간들이 모인 사회를 정의롭고 공정한 것으로 만들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살아가도록 한다는 생각은 현실 세계와 거리가 먼 꿈일 뿐이다. 현실 세계의 다양한 인간 집단의 이해충돌과 복잡성, 그리고 무엇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인간의 ‘맹목적 생존본능’(blinder Wille zum Leben)에서 나오는 질투심과 경쟁심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롤스의 낙관주의에서 나온 산물일 뿐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통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지의 베일은 인간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 건설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꿈을 위한 중요한 사유 실험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무지의 베일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정의와 공정이 넘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러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종교적으로 설파한 존재가 바로 예수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회 정의에 대해 말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는 사회 안의 구성원 가운데 특히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본능적인 연민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그들을 공정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을 촉구했다.     


특히 예수는 정의에 대한 의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 부족한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을 비판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는 성직자와 정치가의 미움을 사서 결국 십자가형이라는 최악의 극형을 당한 것이다. 이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잘난 척했지만 실제로는 형식적 율법주의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박해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자기들이 만든 법에 신의 권한을 부여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법을 휘두르는 만행을 뻔뻔하게 저지른 것이다.    

  

예수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이 법이 아니라 연민이라는 진실을 가르쳤다. 사회에서 연민의 일차적 대상은 당연히 가난하고 무식하고 소외된 이들이다. 예수는 이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였다. 이 복음의 내용은 단순하다. 곧 조만간 하늘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이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이 하늘나라는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이 세상이 이미 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삶의 질곡에서 해방된다. 그러한 해방을 이끄는 예수는 당연히 메시아가 되는 것이고. 이 하늘나라는 정치나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신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살 권한이 있는 이들은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 영생과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나라에서 인간은 출신 배경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가, 병든 자에게 치유가, 신에게 죄를 지은 자에게 용서가 보장되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존본능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의 행복을 보장할 마음을 보편적으로 지니지 못하게 한다. ‘나’와 ‘너’의 목숨이 달린 경우, 특히 그 ‘너’가 낯선 이거나 심지어 원수인 경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거부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강조한 것은 바로 부활과 내세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시작되는 세상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천지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에는 신천지가 이미 와서 정치력까지 발휘하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수작이다. 신천지는 이른바 '아마겟돈의 전쟁'을 치르고 난 인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 죽음과 부활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에덴동산에서 신을 배신하여 죽음의 저주를 받은 인간과 신의 화해다. 이제 인간은 죽지만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구원의 희망을 지니게 되었다. 다 예수 덕분이다.     


하늘나라가 도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는 신이 다스리는 상태이기에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사회가 등장하게 된다. 하늘나라가 신의 뜻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근원적으로 비지상적인 것이기에 매우 낯설다. 그러나 이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 인간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롤스는 공정한 사회 건설을 위해 인간의 의식적으로 무지의 베일을 쓸 것을 권유하였지만 이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구차한 방식을 쓸 필요가 없다. 그 안에 들어온 이들, 곧 신의 은총으로 아무런 공덕 없이 다만 회개하고 믿은 덕분에 들어온 이들은 더 이상 죄가 없기 때문에 가식이나 억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런 하늘나라는 앞에서 말한 대로 예수의 강생, 곧 신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온 사건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이 안 된 것이라서 예수가 약속한 인류의 소망으로 남아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하늘나라는 영적으로는 이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직  가시적으로, 곧 구체적인 물리적 형체를 지닌 사태(Sache)로 완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완성은 오로지 예수의 재림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가 속히 재림 하기를 기다리며 '마라나타'(Maranatha), 곧 '어서 오소서!'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재림하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고통과 괴로움과 죽음이 없는 완전한 나라가 들어서게 된다고 약속했다. 하늘나라에 사는 새 인간은 사랑과 연민과 정의를 저절로 실현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한 마디로 참다운 의미의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 삶의 방식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원수를 사랑하고, 모두를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살게 된다. 하늘나라의 본질은 신의 사랑, 은총, 정의가 구현되기에 인간이 사랑과 연민과 정의의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카이로스', 곧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말한 대로 하늘나라는 이미 인간들 사이에 왔지만 미래에 완성되는 일종의 미완의 상태이다. 하늘나라는 신이 통치하는 것으로 이미 모든 인간의 마음과 삶, 세상 안에 존재하지만 아직 완성된 형태로 실현되지 않기에 미완성인 것이다. 그 완성은 예수가 다시 와서 마무리하는 최종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이를 위해 예수는 재림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만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예수가 선포한 그 기쁜 소식, 곧 하늘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을 세상에 전하며 그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신의 명령을 따르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늘나라의 도래를 촉진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일 말고는 인간이 하늘나라의 도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 그래서 예수를 진실로 믿는 참 기독교인은 정의, 연민, 사랑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이어 나갈 뿐이다.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때, 곧 예수의 재림 시기를 모르기에 그러한 노력은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2천 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예수에 대한 신뢰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도 재림에 대한 확신이 예전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실망과 기대에 찬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거짓 선지자, 더 나아가 가짜 예수가 여기저기 나타나 소동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도 이미 박태선과 문선명이 스스로 이른바 '재림 예수'임을 공언한 적이 있다. 지금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흔히 신천지로 불리는 사이비 교단이 기독교의 종말론을 오용하여 혹세무민 하는 중이다. 기존의 기독교는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신천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자기 ‘식구들을’ 빼가는 집단을 누가 좋아할까? 사실 이러한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신흥종교는 예수 사후 지속적으로 역사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만희의 신천지도 교주가 죽으면 박태선의 천부교나 문선명의 통일교와 마찬가지의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다. 후계자들이 그 사교 집단의 재산과 권력을 놓고 사분오열되어 싸우다가 자멸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천지'가 무너지고 나면 또 다른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개인적 죽음과 더불어 인류의 집단적인 종말에 대한 공포를 떨치지 못하는 별난 종이기 때문이다.      

 

사실 인류 종말은 100% 확실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차원의 전염병, 핵전쟁, 소행성 충돌, 초대형 화산 폭발로 인류가 멸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더해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흉작, 물 부족으로 발생한 대량 이주민과 난민이 야기할 환경 파괴와 사회적 혼란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재간이 없다. 게다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인공 지능, 생명 공학 및 나노 기술이 전혀 통제 불가능한 소수의 사악한 인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경우 인류의 파멸은 좀 더 앞당겨질 수 있다. 특히 영화 <메트릭스>에서 묘사된 대로,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은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을 지구를 망가뜨리는 바이러스로 판단하여 제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류는 이러한 종말 이전에도 지진, 쓰나미,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만이 아니라 전쟁과 핵발전소 붕괴와 같은 인재로 이미 무너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인류 파멸을 가져올 핵전쟁, 기후변화, 대전염병과 같은 요인들을 막거나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국제적 협력이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에 물든 집단 이기주의라는 시대정신으로 불가능한 지경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바로 이러한 극도로 어두운 인류의 미래와 당장 현실에서 보이는 국내외적 갈등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악용하는 악의 세력이 판치는 세상이기에 많은 인간이 증오, 분노, 환멸,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악으로 기우는 경향'에서 나오는 이 모든 악한 현상의 배경에 실체로 존재하는 사탄과 맞서 싸우는 길 밖에는 없다. 현재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정치계만이 아니라 한반도 하늘 전체를 사탄의 악령이 배회하고 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이들의 얼굴을 보면 사탄에 빙의된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아를 상실하고 사탄에 빙의되어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흑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분노, 이기주의, 분열, 갈등, 질투로 날뛰고 만취되어 고주망태의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것이다. 이에 맞서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한국 사회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그날이 오면 천사가 아마겟돈으로 임금들을 불러 모은다고 했다. 아마겟돈은 원래 성경 그리스어로 하르마게돈( Ἁρμαγεδών)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히브리어로 ‘산’이란 뜻의 하르(הַר)와 이스라엘 북부 지방의 언덕 지역인 ‘메기도’를 의미하는 므깃돈(מְגִדּוֹן)의 합성어를 음역 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통 요지인 이곳은 많은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인류 최후의 전쟁도 이곳에서 일어난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환란이 시작되면 하늘에 있는 ‘증거장막성전’에서 일곱 가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일곱 천사가 나온다. 신천지가 말하는 바로 그 성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일곱 천사 가운데 여섯째가 강물을 말리고 나면 용과 짐승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세 악령이 나오게 된다. 이 악령들은 세계의 지도자를 모은다. 최후의 심판 이전의 혼란이 극에 이르게 되면 무시무시한 창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가 그 창녀와 불륜을 저지르고 국민도 그 여자의 불륜을 보고 취하게 된다. 그런데 그 창녀가 타고 다니는 짐승의 머리에 난 뿔이 창녀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지만 결국 그 창녀를 미워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 창녀를 벌거벗기는 것도 모자라 그 몸을 먹어버리고 불태워버린다. 그 창녀와 불륜을 저지른 지도자는 아무런 힘도 못 쓰고 바라만 보고 있다. 사실 그도 권력 때문에 창녀와 불륜을 저지른 것일 뿐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모든 악, 특히 세 악령이 멸망한 다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다. 이제 정의와 공정이 펼쳐지는 하늘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모습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물론 비유지만 때로는 인류 역사의 타락한 시기에 벌어지는 사달을 매우 적확히 설명하기도 한다. 세 악령, 창녀, 창녀에 취한 지도자와 백성. 이 구도는 한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이 극에 이르면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창녀는 권세를 누리는 자들의 혼을 빼앗는 악한 세력의 중심이다. 그리고 세 악령을 각각 토해낸 용은 사탄이고 짐승은 그 사탄의 앞잡이고 거짓 예언자는 적그리스도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있지 않은가? 그저 신의 섭리의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정의와 공정한 세상이 오기 전에 이 창녀와 그 무리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한 불길에서 고통을 당하기만을 기대해 본다. 그러고 나면 적그리스도인 가짜 목사와 가짜 종교가 넘치는 한반도에 드려진 사탄의 음기가 곧 거두어지게 된다. 그 시작은 세상이 이제 다 알게 된 창녀가 제일 먼저 쓰러지는 것에서 이루어 진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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