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Aug 16. 2023
시아버지 장례식과 며느리
가부장제의 종말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나온다. 그런데 매우 검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른다고 한다. 연세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문상객을 받는 모양이다. 신문 뉴스를 보니 참으로 소박하다. 대통령 혼자서 문상객을 다 맞이하고 있는 모습만 보인다. 형제라고 해봐야 그동안 외아들인 윤석열 대통령 대신 부모를 돌보고 있던 여동생 윤신원 한 명뿐이니 워낙 단출하기는 하다. 보통 사위도 문상객을 맞이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들도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여염집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처가댁 식구도 모이는 법이다. 김건희 여사의 나이 15살 때 아버지가 40살로 유명을 달리한 집안에 윤석열 대통령의 손위 처남 2명, 손 아래 처남 1명으로 처남이 모두 3명이나 되는데 그들도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게다가 김건희 여사 모습도 언론에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장례식도 삼일장으로만 치른단다. 정말로 최고 권력자의 부친 장례식이 이렇게 검소하게 치러지는 것은 못 본 것 같다. 과거 독재 정권 때의 대통령의 배우자를 포함한 여러 관계자의 장례식을 요란하게 보도하는 언론을 통해 시시콜콜 간접 경험해 본 것에 비해 볼 때 여러모로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방송을 아무리 돌려봐도 TV조선 조차 애들 노래 잔치 방송에만 열을 올린다. 한국이 정말로 일찌기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여염집 부모 장례 때도 동네방네 떠들썩한데 대통령의 부친 장례가 이리 조촐하다니...
이 소식을 보면서 이렇게 변한 대한민국 사회의 며느리와 시아버지, 더 나아가 며느리와 시가의 관계에 대해 문득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본다.
조선시대에 며느리는 de facto 노예였다. 물론 양반집의 며느리는 종을 부리기에 몸은 편했지만, 시댁의 도구가 되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 집에 완전히 한 식구가 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가서 그 집 귀신이 되어도 성씨는 원래의 것으로 남는다. 결국 한 집안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한심한 일부 학자는 한국이 여성의 권리를 존중했다는 어불성설을 늘어놓는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한 마디로 며느리의 성씨를 고치지 않는 이유는 유산을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집안 핏줄만 받을 수 있는 유산을 남의 집 다른 성씨에게 줄 수 없다는 얄팍한 계산으로 성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물론 남편이 죽으면 며느리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재가를 안 한다는 조건에서였다. 재가하는 순간 그 유산을 다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며느리는 물론 여자는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부터 재산은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문은 제사 승계로 가름하였다. 곧 제사에 참여하고 제사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가 가문에 속한 이고, 그자가 재산도 상속할 수 있었다. 고려가 불교 국가였지만 제사와 재산에 관해서는 철저히 유교적이었다. 사실 이는 신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늬만 불교지 정치 제도나 민간의 통제에서 이미 뼛속까지 유교적인 DNA가 뿌리 박힌 나라였다. 그런 유교가 무려 2천 년 가까이 이 한반도를 지배한 것이다. 그러니 유교적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이 가부장제도, 특히 시집을 중심으로 한 남성중심주의 제도가 붕괴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장 큰 징표가 여초 카페에 수시로 올라오는 이른바 ‘시모 증오 글’이다. 대부분이 며느리가 시모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그 글들을 읽다 보면 한국의 모든 시모는 거의 악마의 화신으로 보일 정도다. 그리고 며느리들은 모두 콩쥐쯤 되는 존재다. 시모, 더 나이가 시집의 악행과 폭력과 차별과 비인간적 행패로 며느리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가끔, 아주 가끔 그런 고발 글들 사이에 ‘우리 시모는 달라요!’라는 글들이 올라온다. 시모가 천사와 같다는 내용이다. 자세히 읽어보니 보잘것없는, 심지어 ‘과거가 어두운 여자’를 며느리로 들인 시모가 애면글면 딸보다 더 소중히 여겨준다는 내용이다. 밥도 해주고 반찬도 해주고, 철철이 돈도 주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편히 살게 해주는 천사 같은 시모가 있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좋은 집에 시집와 편히 살고 있다는 자랑이다. 그러나 그런 글은 극소수고 대부분이 증오와 분노로 넘치는 ‘시짜’ 집안에 대한 욕이 가득한 글들이다.
그 글들의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가 아직 서슬이 퍼런 나라가 대한민국이니 시모에 박해받는 일이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벌어질 법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며느리의 분노는 감추어져 왔다. 그런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면 배우지 못한, 예의범절이 없는 패륜을 저지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느리들은 모두 화병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특히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순이 절정에 이르는 것이 바로 시부모의 장례 때였다. 자기 부모도 아니고, 더구나 자기를 학대한 시부모의 장례 때 며느리는 상복을 입고, 밥도 못 먹고, 문상객 뒤치다꺼리는 다 하면서 고생해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드러내야 한다. 꺼이꺼이 통곡해야 한다. 그래야 동네에서 효부 났다고 소문이 나게 되는 법이다. 그 시집에서는 바로 그런 효부를 들인 명문가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며느리가 통곡하다가 혼절하도록 강요한다.
사실 며느리의 처지에서는 자기를 학대하고 고통을 준 원흉인 시부모가 사라졌으니 춤추고 노래할 일 아닌가? 그런데 겉으로는 대성통곡하고, 밥도 안 먹고, 혼절까지 해야 한다. 정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 아닌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고 가면 화병에 더해 조현병에 걸리지 않을 수 없을 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꾸는 징후가 보인다. 며느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면서 동네방네 자기 시집 소문을 다 낸다. 시집이 얼마나 못됐는지, 특히 시모는 얼마나 악녀인지를 말이다. 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지금 당장 여초 카페에 들어가서 ‘시모’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의심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시모가 며느리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도 흔히 회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며느리의 복수’가 만연하는 세상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부모 장례식이다. 꼴 보기 싫은 시누들은 울고불고 난리 피우지만, 며느리는 심드렁하다. 억지로 눈물을 쥐어짜지 않는다.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경우는 대부분 그동안 그 시부모 때문에 고생한 나를 위로해 흘리는 것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라며 자기 마리를 툭툭 치며 위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기쁨이 저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예 시부모 장례에서 문상객을 받지 않는 며느리조차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가부장제의 폐습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럴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며느리가 시모가 되어 그 장례 때 아들 며느리도 안 올 것을 생각하면 그저 다 업보인가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