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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22. 2024

윤 대통령은 고려 현종과 조선 인조에게 배울까?

한반도의 운명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달려있다.

요즘 <KBS>에서 방영되는 ‘고려거란전쟁’에서 고려 8대 왕 현종 대왕이 결국 도통사 강감찬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 귀주대첩에서 요나라의 거란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나온다. 이때가 1019년 2월 1일이다. 즉위 10년 만에 벌어진 외적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한반도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현종도 조선 시대의 세종과 마찬가지로 세종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리기도 한다.    

 

현종은 1009년 17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여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22년에 걸친 재위 동안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가 제도의 틀을 잡아 이후 고려 17대 왕 인종 때까지 고려 시대 황금기의 기반을 닦은 군주다. 워낙 탁월한 군주라 해동 천자라는 칭호로 불릴 정도의 인물이다.     


고려는 조선과 달리 중앙 군주의 권력이 약했다. 그래서 지방 토호 세력이 왕을 우습게 알기 일쑤였다. 그래서 현종도 태조 왕건과 마찬가지로 정략결혼을 통해 정권을 강화해야 할 정도였다. 사실 현종은 사생아로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고아가 되어 왕실에서 배척되어 승려가 되어 생명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런 현종을 눈엣가시로 여긴 천추태후의 지시로 암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천추태후는 태조 왕건의 손녀로 12년 동안이나 아들 목종을 내세운 섭정을 통해 고려 권력을 장악한 여장부였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데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갑자기 왕위에 오른 것이 바로 현종이다.     

 

이렇게 현종은 아무런 준비 없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문자 그대로 죽을 고생을 한 다음에 인생의 의미를 배우고 권력에서도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며, 외적의 침입과 같은 국난에 대비해서는 내부적인 정권 싸움을 바로 중단할 줄도 아는 현명한 군주였다. 일반적인 인간의 삶에서도 어릴 때 고생해 본 사람과 평생 꽃가마만 타고 다닌 사람이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자세가 전혀 다른 법이다.     

 

948년 지금의 서울 낙성대에서 태어난 강감찬은 992년에 태어난 현종과 44년이나 나이 차가 난다. 과거 급제도 983년 36세의 늦은 나이에 했다. 그 뒤에도 별 볼 일 없는 한직으로 돌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갑자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다음 해인 1010년에 바로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할 때 모든 관료가 항복하자고 야단법석을 피웠으나 강감찬만이 대가 아니니 물러서자고 주장하였고 현종이 이를 받아들여 몽진에 나선다. 이때 수도가 불바다가 되었고 지방으로 도망가는 길에 현종은 여러 차례 암살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여러 차례 죽을 뻔한 경험을 한 현종은 개성에 환도한 이후 탁월한 능력으로 제도 개혁을 이루어 실질적인 중앙 집권 국가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고려가 현종을 왕으로 맞이하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 현종 이후 1392년 이성계의 쿠데타로 왕권을 빼앗는 변고가 발생하기까지 400년 가까이 고려가 버틸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했으니 말이다.     


거란이 고려를 세 차례 침입했다. 그런데 만약 현종이 2차 침입 때 항복을 해버렸으면 400년 고려 왕조는 없었을 것이다. 물러나고 나갈 때를 알았기에 거란의 간섭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외적의 침입이 있었다. 그리고 반정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조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당시 신흥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청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 신공으로 간신히 조선의 평화를 유지하던 광해군을 몰아낸 데에는 명분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전통적으로 우방국가인 명을 배신하고 신흥 세력이지만 오랑캐인 청을 섬길 수 없다는 명분론이다. 물론 광해군이 ‘패륜’에 가까운 살육을 자행했고 그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커졌기 때문에 궁중 쿠데타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인조가 정권을 의도적으로 잡은 후에 왕권을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성의 안녕을 돌보는 데는 실패했다. 무엇보다 쿠데타를 일으킨 조선의 왕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명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난 국고를 낭비했다. 광해군이 쓴 뇌물 이상의 비용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낼 때 인조 패거리가 내세운 명분이 ‘친명 배금’이었는데 정작 명나라가 조선에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한 것이다. 인조와 그 측근의 쿠데타 명분이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게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적에 대한 의심도 날로 커져서 툭하면 이런저런 명분으로 북인 세력을 숙청했다. 이에 많은 엘리트가 죽어간 것이다. 게다가 쿠데타에 적극 가담한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 국경을 지켜야 할 북방 수비대를 끌고 이괄은 순식간에 한성을 점령해 버렸다. 그러자 인조는 공주의 공산성으로 튀어버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겠다고 말이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으나 이괄 휘하의 군대는 지리멸렬되어 버렸고 일부는 청나라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한성을 점령하는 데 충실한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다 결국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또다시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가 자기만 살겠다고 버텼다. 이괄의 난 이후 군대를 불신한 인조가 방어에 소홀한 탓이 컸던 사건이다. 패전국의 왕인 인조는 후금과 형제의 맹세를 맺고 겨우 다시 한성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 사달에서 인조는 배운 것이 없었다. 후금에 엄청난 공물을 바치면서 기존의 명나라에 뇌물 바치는 행태와 명나라를 숭상하는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치욕적인 1635년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이다. 명나라와 단교하고 청나라를 섬기라는 요구는 굴욕적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힘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청군이 너무 빨리 진격하는 바람에 왕이 강화도로 피난할 여유도 없어 남한산성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 와중에 왕족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점령당했다.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도 버틴 강화도가 쉽게 넘어간 것이다.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 청나라의 우두머리 홍차이지 앞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를 정권 다툼으로 날려버리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이렇게 왕권의 기강이 무너지자, 인조는 역설적으로 성리학을 더욱 강화하여 백성을 틀어잡는 도구로 활용하여 더 이상 학문이 아니라 종교적인 교리로 만들어 버렸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보지 못했던 남녀 차별을 강화하여 조선 시대 여성이 지옥의 삶을 살도록 하는 실마리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인조는 명나라를 섬기는 전통에 집착하여 신흥 강대국인 청나라의 힘을 끝까지 과소평가하여 조선이 끝까지 고생하게 만드는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명나라의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다. 명나라가 볼 때 인조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 멀쩡한 조선의 왕인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낸 패륜을 저지른 자였다, 그런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그 모든 돈은 백성의 고혈에서 나왔다. 그런 와중에 청나라의 심기도 돈으로 달래야 했으니 나라 재정이 파탄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당하면서도 툭하면 청나라를 쳐야 한다는 황당무계한 말이나 해대면서 신하들의 신뢰를 더욱 잃게 되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라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국제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다. 윤석열 정권이 그렇게 공을 들인 바이든의 미국은 트럼프로 정권이 바뀔 가능성이 거의 분명해졌다. 일본의 기시다 정권도 부패 스캔들로 지지율이 최악을 달리고 있다. 정권이 곧 바뀔 것이다. 한때 바이든 기시다와 더불어 윤 대통령이 동아시아 삼각편대를 구상한 것처럼 선전했으나 현재 곤경에 처한 윤 대통령에 바이든이나 기사다나 아무런 관심이 없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고 북한은 남한을 주적으로 선언하고 적화통일을 공언하고 나서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외교에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할 때다. 그런데도 총선에서 대패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김건희 리스크’의 덫에 걸려서 외교는 생각조차 못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저 고려의 현종에게 배우고 조선의 인조를 타산지석으로 삼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가 흔들려도 지도자는 살아남지만, 그 국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한국은 실질적으로 섬나라나 다름이 없어서 전쟁이 나도 도망갈 길이 없다. 그래서 유사 이래 한반도의 백성은 죽자고 싸운 것이다. 지도자가 자기만 살겠다고 이리저리 도망가는 일이 빈번해도 백성에게 남은 선택은 죽든지 싸우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목숨 걸고 지켜온 것이 바로 이 한반도의 백성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현명하다면 그런 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없는 법 아닌가? 이제라도 윤석열 정부가 상식과 공정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현재 한반도가 처한 극한의 위기를 잘 넘겨 국민이 고생을 안 하도록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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