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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Oct 05. 2020

통일 독일의 약사

독일 통일에서 배우기 시리즈


독일은 문자 그대로 유럽의 중심이다. 유럽에서 독일만큼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없다. 9개 국가, 곧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가 독일의 접경 국가이다. 약 50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지만 게르마니아(Germania)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 시절부터이다. 로마제국은 현재의 서부와 중부 유럽 전체를 점령했지만 라인강 동쪽의 게르마니아 지역부터는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만큼 강인한 종족이 살던 곳이 현재의 독일 영역이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대부분의 지역이 독일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지만 정작 독일이 단일 민족국가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71년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이 수립된 이후이다. 단인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의 역사는 150년도 채 안 된다. 그러나 그 150년 동안 독일은 근현대의 인류 역사를 흔들고 이끄는 역할을 하며 그 대가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당장 독일 제국의 수립과 더불어 농경국가에서 산업국가로 급속한 변모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독일은 계속 역사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먼저 독일은 1914년부터 4년 동안 진행되며 약 1,7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였다. 40여 개 국가가 참전한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등 3개국과 동맹을 맺으며 나머지 국가들과 맞서 싸웠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인원만 약 7천만 명에 이른다. 인류 역사에서 이 정도 규모의 전쟁은 일찍이 없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독일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어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독일의 구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를 무너뜨린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나치 정권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도 독일은 이탈리아와 일본을 포함한 이른바 주축국(Achsenmächte)을 형성하며 문자 그대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다가 패전 국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60여 개 국가의 1억여 명의 인원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그 가운데 약 8천만 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인류 역사의 최대의 비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의 이른바 ‘제3제국’은 완전한 종말을 맞이한다. 순전히 독일 지역만 본다면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1806년에 멸망한 신성로마제국과 1918년에 멸망한 독일제국에 이어 등장한 것이기에 제3제국이기도 하지만 로마제국까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신성로마제국과 독일 제국을 하나로 보아 2000년 넘는 유럽의 제국의 역사를 완전히 종식시킨 것이기도 하다.   

  

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의 지도는 다시 그려지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 영토의 상당 부분이 주변 국가들에 귀속되었다. 심지어 그런 와중에 독일은 동서로 나뉘게 된다. 서독, 공식적으로는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은 1949년 5월 24일 수립되었다. 그리고 동독, 공식적으로는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esche Republik, DDR) 1949년 10월 7일에 수립되었다. 이후 독일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둘로 나뉜 세상에서 벌어진 동서냉전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길을 택한다.


더 이상 세계대전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 못지않은 냉전 상황에서 구서독은 전쟁의 후유증을 털어버리고 다시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구동독은 구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면서 과거의 화려했던 제국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구동독의 경제 체제가 완전히 공산주의적인 모습을 갖춘 적은 없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개인사업이 가능하여 백만장자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직업에 따라 제각각인 급여 수준으로 빈부격차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1970년대부터 구서독이 추진한 동방정책, 곧 동서독 화해 정책으로 서독의 상품들, 특히 소비재 물자가 암시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고 구서독의 지원이 구동독의 경제를 지탱하는 주요 요소가 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에 통일되기 훨씬 전부터 구동독은 경제적으로 구서독에 의존해왔던 것이다.     


1990년 통일 당시 구동서독을 비교해 보면 모든 면에서 구동독은 열세였다. 구서독은 주민이 6,300만 명이고 구동독은 1,600만 명이었다. 한 달 평균 소득은 구서독이 1,700마르크, 구동독은 900마르크였다. 국가 면적도 서독이 두 배 이상 넓었다. 국민총생산의 경우에도 구서독은 구동독의 7배에 달하였다. 더구나 1990년을 전후하여 구소련이 붕괴하여 구서독 이외의 다른 외부의 지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흡수 통일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통독 30년이 지난 지금 독일의 인구분포도 바뀌고 있다. 1990년 이후 태어난 연령층이 전체 인구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통일 무렵 10살 이하인 세대까지 합친다면 이제 독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분단에 대한 기억이 없거나 희미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독일은 분단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동서독 간의 빈부격차는 사회적 불안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구동독 주민들 가운데 아직도 자신이 이른바 2등 시민이라는 의식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겨우 40여 년의 분단이 남긴 상처가 생각보다 깊은 것이다. 과연 75년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한국은 어떨 것인가? 더구나 남북 간의 교류가 독일에 비하면 일천한 한반도의 상황은 결코 낙관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독일을 연구하는 이유는 한반도의 통일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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