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독일을 점령한 연합국은 이른바 나치 청산(denazification, Entnazifizierung)을 독일과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먼저 나치당, 정확히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erpartei)을 해체했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나치당으로 알고 있는 이 당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노동자 당이었다. 이는 거의 공산당과 비슷한 의미를 지녔지만 극우정당이었다. 히틀러는 국수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노동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유대인,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실현한 인물이다. 그가 이해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른 체제이다. 나치당의 강령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총통(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히틀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독재와 결합한 독특한 정치 제도를 추구하는 나치당을 1920년에 수립하여 1945년 전사할 때까지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체를 이끌어 온 현대사의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30년 가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미친 나치의 영향을 없애버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연합국은 1945년부터 야심 차게 추구해온 나치 청산 조치를 1950년 아데나워 정권이 이끄는 독일의 요구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나치보다 더 심각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적, 곧 공산주의가 더 큰 위협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12년간 히틀러가 철권통치를 하는 나라에서 히틀러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조국 독일을 패전국에서 승전국으로 만든 장본인 아니었던가. 그에게 열광하지 않는 것은 당시 독일인들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1943년에는 나치당원만 해도 770만 명이었다. 당시 독일 국민의 10%가 넘는 숫자였다. 그리고 나치당이 권력을 쟁취한 1933년의 총선 득표율은 43.9%였다. 그 이후의 나치에 대한 독일 국민의 지지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치 정권 시절에 히틀러에 맞서 싸운 독일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그 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조직적인 저항이 없었고 개인의 결단으로 저항한 것이 다였다. 게다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을 주도한 슈타우펜베르크 백작(Claus von Stauffenberg, 1907-1944)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히틀러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더 이상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이후 나치 청산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독일 국민 전체를 죄인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아데나워(Konrad Hermann Joseph Adenauer, 1876-1967)와 에어하르트(Ludwig Wilhelm Erhard, 1897-1977)를 이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독일의 3대 수상을 역임한 키싱어(Kurt Georg Kiesinger, 1904-1988)도 나치 당원이었다.
1945년 이후 소련이 점령한 구동독지역에서는 연합국 3국 곧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구서독지역보다는 나치 청산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의 나치에 대한 증오도 커다란 요인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련 점령 지역의 신속한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 국가로 이행되는 과정이 쉬울 리가 없는 일이었다. 나치 당원이었던 사람들이 체포되어 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동독지역에 있던 많은 과거에 나치 관련된 주민들이 구소련의 탄압을 피해 구서독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반공이었다. 당시 구동독지역에서 12만 명이 구금되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이 고문과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그리고 1949년 구동독 정권이 수립되어 명분상 정권을 구소련으로부터 물려받았어도 나치 청산은 계속되었다. 이는 나치 청산을 중단한 구서독에 대한 이념적 공격에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심지어 나치 정권에서 탄압을 받아 불구자가 된 구서독의 사민당(SPD) 당수였던 슈마허(Kurt Schumacher, 1895-1952)까지 비난하고 나섰다. 슈마허는 반나치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전후 독일의 민주주의 수립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극우도 반대했지만 공산주의도 철저히 반대한 인물이었다. 동독은 그런 인물마저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나치 청산을 ‘제대로’ 한 구동독과는 달리 나치 청산에 반대한 구서독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동독에서조차 에어푸르트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는 현실적 국가 운영을 위하여 과거 나치당의 핵심 요인이 정부 관료로 일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치 청산은 그토록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청산을 모범적으로 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독일의 초대 수상이며 국부로 존경을 받고 있는 아데나워이다. 그는 나치 청산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 자신이 쾰른 시장으로 근무하던 당시 나치 정권의 압력을 받아 굴복하였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 자신도 나치 정권에 맞설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인의 집단적 죄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묻는 연합국, 특히 미국의 식자층에 맞서 개별 보상 정책,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무제한 보상 정책과 유럽 연합 구축 정책으로 치고 나갔다. 독일 민족들끼리의 소모적인 이념 논쟁으로 국력을 소비하기보다는 법제도와 국제 협약을 통한 긍정적인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과거청산을 마무리한 독일에서 아데나워 정권을 이어받아 사회적 시장경제로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에어하르트도 나치 정권에서 잘 나가던 인물이었다. 독일은 소모적인 이념 논쟁 대신에 실용적인 경제 발전과 국제 협력을 택하였고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은 어떤가? 1948년 친일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해산되었다. 무엇보다도 미군정청의 정책이 반공주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친일파보다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의 국익에 더 위협이 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독일의 경우에 강력한 나치 청산 정책을 추구한 미국이 한국에서는 친일청산을 오히려 막고 이른바 ‘능력 있는’ 친일 전력이 있는 인사들을 정권의 핵심 요직에 등용한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이승만이다. 이승만 정권 수립과 유지에 친일파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들에게 이승만은 특혜와 친일청산 중단이라는 선물로 보답한 것이다. 여기에서 아데나워와 이승만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아데나워는 국론 통일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나치 청산을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하여 친일청산을 반대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친일청산은 반공주의에 밀려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한국전쟁은 친일청산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독일과 한국의 상황이 달라진 또 다른 주요한 이유는 청산할 과거의 기간이다. 독일은 1933년 나치 정권 수립된 이후 1945년까지 12년 동안 모순적 체제를 경험했다. 그러나 한국은 1910년 경술국치부터 1945년까지 그 3배가 되는 36년 동안 모순적 체제가 아니라 외국의 침탈을 당했다. 출발 조건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36년이면 한 세대가 바뀌는 기간이다. 너무 긴 기간 동안 침탈을 당하여 외국에 종속되는 식민 제도라는 모순적 지배 체제가 공고해진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맞이한 해방 이후 나라를 이끌 인재가 친일파밖에 없다고 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 문제가 된 것은 1948년부터 12년간 지속된 이승만 정권이 민주항쟁의 결과로 물러났지만 그를 대체할만한 제도가 수립되기도 전에 다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무려 18년 동안 독재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본 제국의 장교였던 박정희가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친일청산이라는 단어조차 언급될 수 없었다. 박정희를 이어 들어선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은 1987년에 끝났다. 그러나 그 후에 들어선 노태우 정권은 1993년까지 이어졌다. 비록 민주적인 선거 절차로 수립된 제6공화국이지만 군사 정권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리 보자면 일제 36년의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이 이승만 친일 정권 12년 군사 정권 32년을 포함하여 무려 48년 미루어진 것이다.
독일과는 너무 다른 상황의 한국이 친일청산에서 독일에서 배울 것은 일견 거의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프랑스를 참조하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 또한 마뜩지 않은 일이다. 프랑스의 흔히 비시 정부(Régime de Vichy)라고 부르는 프랑스국가(l'État français)는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어 1940년부터 명목상 주권국가가 되어 겨우 4년 동안 존속하였다. 게다가 1942년 독일군이 프랑스 남부를 점령하면서 군정청을 통하여 사실상 프랑스 전체가 독일의 직접 통제 하에 들어갔다. 그래서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한국의 친일청산과는 비교되기 힘들다. 그리고 1945년 이후 수립된 망명정부 인사들이 주축이 된 프랑스 임시정부가 비시 정권과 관련된 나치 청산에 적극적인 것은 권력 싸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사실 비시 정권도 나치 정권이 점령한 지역이기에 연합국은 여기도 독일처럼 군정청을 수립하여 다스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드골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아 적극적인 나치 청산 정책을 통하여 프랑스에 의한 프랑스 정권의 회복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스가 해방되자마자 이른바 부역자들의 처단의 광풍이 몰아쳤고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인들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프랑스는 자국민을 ‘처단’하는 데에 독일보다 더 무자비하였다. 그래서 사진으로 유명해진 독일군과 사귄 프랑스 여자들의 삭발 행진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암시장에서 거래하는 이들도 매국노로 단죄하였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 때의 피의 숙청의 재현처럼 보일 정도였다. 종전을 전후로 하여 일종의 인민재판으로 죽은 프랑스인만 1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법적 절차로 12만 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1,5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한 광기가 지나가자 프랑스에서도 과격한 나치 청산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렸고 결국은 관용 정책의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과연 독일식과 프랑스식이 한국의 상황에 어떤 시사점을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열려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친일청산은 아직 끝나지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이 시점에서도 독일과 프랑스에서 배울 것은 있다. 과거사 청산은 과거사 청산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친일청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반드시 한국의 보다 나은 미래와 사회 통합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독일은 과거사 청산을 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방법이 독일 통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통일 이후 구동독의 정권이 저지른 실정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보여준 독일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실용주의이다. 광기는 파멸만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죄는 단죄해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이성적 단죄가 바로 독일이 보여준 모범이다. 이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