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Mar 13. 2024
4. 아빠의 우울증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를 가슴에 묻었다.
아빠는 겨우 3살 때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그래도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문학을 사랑했다. 비록 고등학교만 나와서 철도청 공무원이 되었지만, 감수성이 뛰어나고 독서를 많이 했다. 그런 연고로 내 엄마를 만났다. 내 엄마를 만난 이유는 물론 어릴 때 집을 나간 내 할머니, 곧 아빠의 어머니가 주지 못한 모성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내 엄마는 그런 모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당신의 철저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신흥종교와 결혼을 택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아빠는 이용당한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신앙마을’에 빠져 살다시피 하고, 특별한 직업 없이 생활하다가 아빠를 만난 엄마는 박봉이지만 가장의 의무를 다하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저 엄마가 사랑하는 딸을 낳도록 해준 존재일 뿐이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와중에 아빠를 길러준 아빠의 이모 집에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자 분노 발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분노 발작은 엄마의 아버지, 내 할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빠는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았다. 반발을 안 한 정도가 아니라, 한마디 말도 안 했다.
엄마와 내가 부산 기장에 있는 ‘신앙마을’의 종교 행사에 참석하느라고 주말마다 며칠씩 집을 비워도 아빠는 잘 견뎠다. 아니 잘 견디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엄마마저 3살 때 집을 나가고 유일한 혈육인 형마저 10대에 잃은 아빠의 삶이 아빠의 정신을 단련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시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빠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처음에는 내 엄마였으나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이후 아빠의 의지처는 딸이 되었다. 그러나 그 딸도 아빠에게 애정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엄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엄마와 함께 종교 생활에만 몰두한 것이다. 부산 기장의 종교 행사에서 돌아오는 일요일 밤에 집에 들어와 보면 늘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잠들지 않고 오도카니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집에 들어와 불을 켜는 엄마와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빠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커져만 갔다. 왜 저리 무능하고, 무기력할까? 그런 생각과 원망만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빠에게도 장점은 있었다. 엄마가 아빠의 얼굴을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할 만큼 미남이었다. 오마 샤리프와 같은 강한 아랍인의 풍모가 있었다. 그리고 무척 말이 없었지만, 소년처럼 순수하고 수줍은 태도로 가족을 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에게 무조건 헌신했다. 아빠의 어머니, 곧 내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렸지만, 아빠는 전혀 아빠의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신을 버린 내 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들 사이를 전전하던 아빠의 어머니는 그립지도 그렇다고 원망스럽지도 않은 무덤덤한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이모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고 결혼을 해서도 신흥종교에 미친 아내와 딸 때문에 늘 외로웠어도 아빠는 잘 견뎌내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우울증 증상을 보였지만 말이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는 우울증이 질병이라기보다는 그저 소심한 성격의 발로로만 보였기에 누구의 애정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 아빠는 무너졌다. 갑자기 회사에 안 나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의 성화에 다시 회사에 나갔고 상태는 더 악화하였다. 그때가 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학교에서 유진이의 ‘음모’에 처절하게 희생되기 시작한 때에 아빠의 우울증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빠가 회사 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 아빠가 직장 동료들에게 일종의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내가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빠의 증세는 더욱 악화하였다. 더는 집에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신앙마을’을 안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늘 엄마의 말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랑스러운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할 뿐이었다.
'신앙마을'을 찾지 않으면서 엄마는 아빠의 병간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병간호하려고 교회를 그만둔 거야?”
“아냐.”
“그럼 왜?”
“넌 알 필요 없어.”
“그런데 아빠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며 왜 그리 열심히 간호하는 거야?”
“너를 낳게 해 주었으니까.”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엄마가 아빠를 간호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정신과 병원에 열심히 다녔다. 병원에서 지어온 약도 정성껏 아빠가 복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빠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내 학교 성적도 나빠지면서 엄마의 유일한 희망인 공부 잘하는 딸의 꿈도 사라져 갔다. 그렇게 희망이 꺼져가는 집에서 엄마가 분노 발작을 일으키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그 대상은 물론 나였다. 엄마는 모든 원망을 내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집안의 분위기를 어둡게 하는 주체는 아빠였는데 내가 왜 엄마의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다 받아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고등학교 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대학의 원하지 않는 간호학과에 입학했다. 엄마는 집안의 경제에 보탬이 되는 딸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는 뜻밖에 나에게 숨퉁이 트이는 탈출구가 되었다. 엄격한 금욕주의적 수도 생활을 요구하던 ‘신앙마을’도 떠났다. 나는 해방구를 찾은 것이다. 엄마의 폭력도 줄었다. 아빠 간병에 내 생활에 관여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삼겹살을 먹고 맥주도 마음껏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남자도 사귀었다. ‘신앙마을’의 교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이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억제되었던 욕망이 분출하면서 마침내 신세계가 열렸다.
그런데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사달이 벌어졌다. 남자 친구와 집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사실 내 삶에서 아빠는 이미 지워진 존재였다. 늘 어둡고 말도 없고 퇴근하면 잠들 때까지 텔레비전만 보았다. 그리고 엄마가 준 약을 먹고는 잠자는 것이 내게 보여준 모습의 전부였다. 그래서 속으로 아빠를 증오하였다. 무기력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였다. 물론 아빠가 번 돈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날 아빠는 평소와 다르게 철로에 올라가 별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았다고 한다. 사무직인 아빠가 할 일은 아니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아빠는 철로 위에 그대로 서 있다가 기차에 치여 숨진 것이다. 사고 현장에 엄마와 남자 친구와 달려갔다. 그런데 아빠 동료가 시신이 너무 처참하니 보지 말라고 말렸다. 아빠의 몸은 여러 조각이 난 상태였다. 아빠 동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고라고 했다. 기차가 오는 것이 분명히 보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고 기적 소리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빠의 시신 ‘조각’을 수습하여 ‘재조립’하였다. 그렇게 아빠는 우울한 세계와 작별했다. 다가오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말 궁금했지만, 답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아빠는 하나밖에 없는 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역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아빠의 장례식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남자 친구가 실질적으로 상주 역할을 하였다. 엄마가 ‘신앙마을’을 떠난 지 3년이 되었지만, 그 마을에 아직 남은 친인척의 도움으로 장례식은 ‘신앙마을’의 예식으로 진행하였다. 그렇게 아빠와 영원히 이별하였다. 그런데 엄마는 무슨 일인지 이웃이 권하는 대로 진혼굿, 정확히는 지노귀굿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날 거행한 지노귀굿은 황해도의 토속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리고 후일 내가 만날 시아버지가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이었다. 그때는 그런 인연이 계속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해도식 지노귀굿은 먼저 망인의 넋을 받아들이는 초부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무당이 무명과 베를 몸으로 가르면서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길을 갈라주는 시옹가르기와 뒷전으로 마무리된다. 그 굿이 진행되는 도중에 넋대내림과 맑은혼맞기라는 의식이 있다. 이때 가족이 대를 잡아 망인의 넋을 받는다. 그런데 이때 황해도 식과 달리 서울·경기 지역의 영실처럼 무당이 망자의 넋에 빙의되어 넉두리를 하게 되었다. 아빠가 무당을 통해 내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처음에는 말이 없이 그저 내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기만 하였다. 그런데 그 손길은 아빠가 어릴 때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하던 몸짓과 똑같았다. 그러는 가운데 무당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내 예쁜 공주야. 내 예쁜 공주야. 내 예쁜 공주야. ....”
같은 말을 아빠가 만든 노랫가락에 맞추어 무한히 되풀이했다. 먼 옛날 나를 안고 바라보며 하던 그 노래였다.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문자 그대로 폭포처럼 솟구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아빠는 노래하고 딸은 통곡하며 시간이 멈추었다. 아니 실제로는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지만 내게는 영겁의 순간이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저 계속 통곡만 했다. 참회? 아니었다. 후회도 아니었다. 슬픔?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물이 한없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렇게 통곡하는 딸을 두고 ‘아빠’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단 한마디 말만 했다.
“불쌍한 사람. 당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소.”
엄마도 울었다. 나는 태어나서 엄마가 우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보았다.
주변에 모인 친지도 울었다.
이렇게 넋두리와 한풀이로 깨끗해진 넋을 맞아들인 무당은 사왕가르기로 저승으로 아빠를 인도하였다. 그렇게 아빠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신앙마을’에서 엄격히 금하는 미신인 굿을 통해 나는 아빠를 만났다. 그 후에 엄마가 맘이 변해 나를 데리고 ‘신앙마을’을 다시 나가기 시작했지만, 아무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도 그 지노귀굿 때 체험한 것을 또 느끼지 못했다. 그 무당을 통해 내 얼굴을 쓰다듬던 아빠의 손길을 다시는 느끼지도 못하고 끝없이 이어지던 ‘내 예쁜 공주야...’라는 노래를 또 들을 수 없었다. 아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남아 있었다. 아빠는 천국에 가신 것일까? 사랑이 없는 아내와 우울증으로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관심과 분노만 보인 딸을 두고 가신 그곳에서 행복하실까? 그러나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꿈에도 안 나타나셨다. 아빠 나이 43살에 20살의 딸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