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늘 탈출을 꿈꾸었다.
엄마가 ‘신앙마을’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공부를 잘했고 음악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사범대학교에 진학하여 음악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 곧 내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충남 예산의 대대로 대농인 집안의 장손으로 평생 놀고먹을 재산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노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중국대륙을 유람하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결혼하고 나서도 직업을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나의 외할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미녀였고 그에 반해서 외할아버지가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자식을 7명이나 낳았다. 아들 둘, 딸 다섯이었다. 가세가 기울자, 예산의 땅과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돈이 모자란 탓에 집값이 싼 해방촌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가세는 기울었고 결국 어린 자식들이 일해서 연명해야 할 수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외할아버지는 안방을 차지하고는 12첩 반상을 차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가 상차림이 맘에 안 들면 밥상을 뒤집곤 했다. 게다가 외할머니가 산후조리를 잘 못하여 몸이 약해져서 집안 살림은 딸들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특히 딸 중에 맏이였던 엄마의 책임은 더 막중했다. 그러나 가난과 엄격한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서 힘들어하던 엄마의 유일한 기쁨은 명동의 르네상스와 필하모니에서 음악감상을 하고 YMCA에서 개최하는 ‘문학의밤’에 참석하여 강연을 듣는 것이었다. 남편, 곧 나의 아빠도 그 문학의밤에서 만났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한 엄마는 그 당시 세력이 큰 신흥종교인 ‘신앙마을’에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의 폭력과 가난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구원해 줄 참다운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마의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신앙마을’에서 엄마에게 요구한 것은 무임 노동과 살아있는 ‘하나님’ 숭배였다. 그 집단 안에서 엄마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 신자들과 서로 위로하며 살았지만, 자비하고 엄마를 구원해 줄 하나님은 없었다. 게다가 엄마는 그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도 부족했다.
그래서 엄마는 결국 결혼을 선택했다. ‘문학의밤’에 나올 때 내 미래의 아빠는 철도고등학교를 나와 철도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가 아빠를 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너무 잘생긴 남자였다. 둘째로 공무원이라서 안정된 가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결코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와 대화를 나눈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내가 물었다.
“엄마는 죽으면 아빠와 다시 만날 거야?”
엄마가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아빠와는 다시는 안 만날 거야 나는 홍택이 오빠를 만나고 싶어.”
홍택이 오빠는 엄마가 아빠를 만나기 전에 사귀던 의사였다. 그러나 집안의 차이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그 후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엄마는 탈출과 경제적 안정을 위해 아빠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결혼 직후부터 성급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아빠의 얼굴과 월급 말고는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엄마 맘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성격이 어두웠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 아빠의 아버지는 아빠가 세 살 때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할머니, 아빠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의 형이 있었지만 10대 때 역시 사고로 돌아가셔서 아빠는 고아가 되었다. 원주에서 내로라하는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렇게 고아가 되어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겨우겨우 철도고등학교를 나와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늘 외로웠다. 친척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친척이 다 빼앗아 가버렸다. 나중에 내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는데 그랬다. 그렇게 아빠는 남에게 다 빼앗기고 늘 외로웠다. 그래서 나이가 한참 연상인 엄마를 만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가 꿈꾸던 그런 현모양처가 아니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할아버지, 곧 엄마의 아버지에게 질려서 엄마를 한 없이 사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위로해 줄 남자를 기대했던 꿈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처음 가진 아이를 임신 3개월이 될 무렵 낙태시켜 버렸다. 아빠가 너무 증오스러워 저지른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엄마가 믿던 신흥종교인 ‘신앙마을’의 교리를 어겼다는 죄의식도 있었다. ‘신앙마을’의 교주는 신자들에게 섹스를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라고 가르쳤다. 어차피 말세가 곧 올 것인데 결혼하고 섹스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지옥에 떨어질 죄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도 큰 위로를 받지 못한 엄마는 교회를 나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의 현실이 자기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엄마는 ‘신앙마을’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광신도가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엄마는 나를 임신했다. 그리고 엄마는 이번에는 임신을 확인하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낙태할 생각을 안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앙마을’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광신도가 된 엄마는 ‘신앙마을’의 종교 활동에 참여하느라고 집안 살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집을 비우는 일이 점차 늘었다. 아직도 내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네 살 무렵의 일이었다. 엄마가 ‘신앙 마을’의 종교 활동에 참여하느라고 며칠 집을 비우게 된 일이 있었다. 아빠는 출근하고 집에 없었다. 엄마는 과자를 사서 내가 있는 방에 넣고는 방문을 자물쇠로 잠갔다. 어디 못 가게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 종일 빈집에 있으면서 과자를 먹고 놀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방 안에서 혼자 여러 가지 놀이를 하면서 아빠의 퇴근과 엄마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엄마 아빠의 맘을 슬프게 하면 안 된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절대로 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 되는 일에 충실했다. 퇴근한 아빠는 국수를 끓였다. 강원도 출신답게 장칼국수를 맛나게 만들 줄 알았다. 고추장과 된장을 적절히 조합하여 풀어낸 칼칼한 맛을 나도 매우 즐겼다. 그렇게 엄마가 외출한 집에서 아빠와 둘이 먹는 장칼국수는 참 맛이 있었다.
엄마의 종교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나를 ‘신앙마을’에 함께 데려가기 시작하였다. 예배와 ‘하나님’의 설교가 반복되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합창이었다. 엄마도 속한 합창단의 노래는 마치 천국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리 같았다.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환희를 느꼈다. 엄마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직장 생활도 안 해본 전업 가정주부였지만 클래식 음악과 팝송에 매우 조예가 깊었다. 노래도 잘 불렀다. 그래서 합창단에서도 솔로 파트를 맡아할 정도였다.
그렇게 나까지 ‘신앙마을’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아빠는 더욱 고립되었고 아빠의 우울증적 기질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엄마는 물론 나도 그런 아빠의 변화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는 착한 딸이었을 뿐이다. 엄마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아빠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나도 엄마를 따라서 ‘신앙마을’의 충실한 신도가 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신앙마을’의 독실한 신자가 되는 매우 특별한 예식을 치르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엄마의 권유를 따른 것이다. 그 당시 내게는 하나님이 둘이 있었다. ‘신앙마을’의 교주와 엄마였다.
그렇게 아내는 물론 딸까지 ‘신앙마을’에 빼앗긴 아빠는 더욱 고립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 무너졌다. 어느 날 엄마와 ‘신앙마을’의 교회를 다녀와서 집에 와 보니 아빠가 집에 일찍 퇴근하고 방에 누워 있었다. 회사를 안 나간 것이다. 엄마가 난리가 났다. 유일한 돈벌이하는 사람인 아빠가 직장을 그만둔다면 가정이 풍비박산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패닉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아빠를 다그쳐 회사에 나가게 했다. 아빠는 엄마 말을 들었다. 그래서 큰 사고로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회사에 나가 돈을 버셨다. 그리고 그 돈으로 엄마와 나는 ‘신앙마을’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때 아빠는 중증 우울증이었다. 엄마도 그것을 알고 아빠를 병원에 몇 번 데리고 갔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엄마에게 남자는 오로지 ‘신앙마을’의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하나님에게 사랑하는 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기뻐하는 일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