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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17. 2024

5. ‘신앙마을’의 살아있는 하나님

나를 살아 있는 하나님에게 바칠 수 없었다.

엄마는 ‘신앙마을’을 고등학교 때부터 다녔다. 지난번에 말한 대로 아버지의 폭력과 집안의 가난을 피해 위로받을 곳을 찾다가 ‘신앙마을’의 살아있는 하나님에게서 안식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엄마가 찾은 것은 무임 노동과 세상에 대한 환멸이었다. ‘신앙마을’의 살아 있는 하나님은 이 세상이 곧 망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고, 돈도 벌지 말고, 몸을 정결히 하여 말세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신앙마을’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 ‘신앙마을’이 한창 뜨기 시작한 50년대 말이었기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권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겨우 7살 때 한국전쟁의 참화를 겪고 나서 가정폭력과 가난으로 육체나 정신이 모두 피폐해진 엄마에게 그 살아있는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없애줄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앙마을’의 모임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이 보여준 이적은 엄마의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 살아있는 하나님은 한국전쟁 때 자기의 피가 예수의 피로 바뀐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엄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안수기도로 모든 병을 고친다고 했다. 엄마는 병이 낫는 사람을 보고 믿었다. 게다가 일단 무임 노동이기는 했지만 재워주고 먹여주니 엄마에게 ‘신앙마을’은 신천지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떠나 영원한 행복이 기다리는 구원의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더욱 좋았다. 더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이 축복한 생명수는 절대로 썩지 않는 만병통치약이었다. 특히 그 물을 몸에 바르면 불에 덴 상처도 낫고 피부가 눈처럼 희게 되었다. 더구나 장례 때 죽은 시체에 그 물을 바르면 검은 살이 희게 살아난다고 했다. 엄마는 장례 때마다 그 장면을 목격했고 그래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더욱 굳게 믿었다. 게다가 ‘신앙마을’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성령의 이슬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곤 하였다.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이 느껴진 것이다. 그곳에 모인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엄마는 열심히 일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은 점점 부자가 되었다. 인천의 복숭아밭을 산 이유도 교리에 따른 것이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태초에 이브가 생명나무에서 따 먹은 것은 사과가 아니라 복숭아라고 했다. 그래서 복숭아밭을 사서 다 밀어버리고 ‘신앙마을’을 만든 것이다. 그 마을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의 품질은 매우 좋았다, 그래서 장사가 잘되었고, 그렇게 무임 노동으로 만들어 판 물건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은 많은 돈을 벌었다. 교리상으로 세상에서 물질을 쌓으면 안 되었지만 살아 있는 하나님은 다 필요해서 돈을 모은 것이니 신자들이 보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 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은 땅을 샀다. 서울, 양평, 그리고 부산에도 샀다. 특히 기장은 축복이 넘치는 땅으로 모든 구원이 이루어질 곳이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곳에서 열리는 신앙 대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곳에만 가면 성령의 이슬이 신자들 머리 위로 흠뻑 내렸다. 그 이슬을 맞으면 황홀한 느낌이 저절로 솟았다.        

            

그런데 엄마가 그런 축복을 마다하고 ‘신앙마을’을 떠났다. 나중에 내가 물어도 무슨 이유인지는 절대로 말을 안 해주었다. 그러고는 속세에서 클래식 음악과 '문학의밤'을 즐기다가 아빠를 만나 나를 낳은 것이다. 그렇게 잠시 속세의 생활에 전념하던 엄마는 또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신앙마을’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마가 사랑하는 딸, 나를 데리고 갔다. 처음에는 나를 집에 두고 엄마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나도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본격적으로 ‘신앙마을’의 모든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엄마가 체험한 것을 모두 체험했다.    

                

사실 살아 있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예수를 악마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신앙마을’에서는 일반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도 읽고 찬송가도 불렀다. 그러다가 1980년부터 갑자기 살아 있는 하나님이 놀라운 선포를 하였다. 예수는 악마고 자신이 진짜 예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욕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했다. 결혼도 섹스도 아이 낳는 것도 일절 금지였다. 그런데 살아 있는 하나님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래도 신자들은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전능한 존재였다. 내가 본격적으로 부산 기장의 신앙 행사에 참여한 것은 1984년부터이니 이미 세상에서 살아 있는 하나님을 타락한 신흥종교의 교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교세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한때 100만 명에 이르던 신자가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다시 ‘신앙마을’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딸인 나를 살아있는 하나님에게 바치고자 했다.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이 거처하는 숙소로 찾아갔다. 그 건물은 3층이었다. 1층은 사무실이 있었다. 2층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에 있는 큰 방에는 이미 많은 여자가 모여 있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중학생부터 고등학교 언니들까지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살아 있는 하나님이 그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이끌고 간 간부 신자가 우리 모두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 방에 남자라고는 살아 있는 하나님 한 사람만 있었다. 그래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조금도 못 했다. 옷을 다 벗고 서 있는 여자들을 앞을 살아 있는 하나님이 한 사람씩 바라보며 천천히 지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아이 앞에 서면 간부 신자가 그 아이를 따로 세웠다. 살아 있는 하나님이 내 앞으로 와서 섰다. 나도 그 따로 세운 아이들 무리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12명이 선발되었고 나머지 여자는 다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선발된 12명은 못을 벗은 채로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은 옆방으로 들어갔다. 간부 신자가 기다리던 여자를 한 명씩 그 방으로 들여보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 방은 작았고 침대가 하나 있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내게 그 침대 위에 누우라고 했다. 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자 살아 있는 하나님이 내 몸 전체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내 몸을 샅샅이 다 쓰다듬은 다음에 내게 키스했다. 나는 평생 처음 남자와 키스했다. 그런데 살아 있는 하나님이 침을 내 입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시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다 마셨다, 마치 생명수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자 살아 있는 하나님이 말을 했다.  

                  

“너는 참 맑은 아이구나.”              

      

그러고 나서 나보고 나가라고 했다. 나가서 기다리니 내 뒤 순서의 여자도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모든 순서가 끝났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간부 신자가 우리 가운데 3명을 선발했다, 나는 아니었다. 그 3명은 옷을 입고 3층으로 갔다, 그들은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자로 이제부터 평생을 살아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수행하며 천국에 들어가도록 선택된 존재가 된 것이다.          


내가 그 3명에 선발되지 않은 것을 엄마는 무척 서운해했다. 아니 분노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앙마을’을 다니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신앙마을’을 열심히 다녔다.                    

‘신앙마을’에서 내게 가장 큰 기쁨을 준 것은 합창이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은 특히 어린 여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합창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여자들 가운데 선발된 아이들이 그 ‘2층’으로 불려 갔고 거기서 최종 선발이 되면 ‘3층’으로 가서 천국 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선발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래 자체가 좋아서 합창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성악가가 될 꿈까지 꾸게 되었다. ‘신앙마을’의 합창단은 1,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봄·가을로 정기 콘서트까지 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이 정도 규모의 합창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즐겨 부른 작품에는 하이든의 사계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 작곡가의 작품도 불렀다. 그 노래를 작곡한 작곡가가 직접 지휘까지 했다. 그 당시 1,000명이나 되는 합창단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세종문화회관밖에 없었다.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청량리 시립대 근처에 있는 교회로 달려가서 밤 12시가 다 될 때까지 본격적인 연습을 했다. 그리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하루 종일 보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기장의 신앙 모임 때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엄마와 함께 전세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모인 신자들과 합숙하면서 성령의 이슬을 맞는 기적을 맛보고 황홀경에 빠졌다. 지금 기억해 봐도 가장 바쁘고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비록 유진이의 간계로 학교에서 나는 더욱 고립되었지만, ‘신앙마을’의 생활이 그 고통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생활이 이어졌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엄마가 ‘신앙마을’을 그만 다닌다고 했다. 이번에도 아무런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착한 딸인 나는 아무 반발도 안 하고 엄마의 뜻을 따랐다. 내게는 엄마가 하나님이었다. 그 뒤 고등학교 3년 동안 엄마는 아빠 간병에 충실했다. 그러나 나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갔고 엄마의 분노 발작은 그에 비례하여 늘었다. 분노 발작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이어졌다. 나는 폭력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에 대한 반감이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것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밖으로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나는 착한 딸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지옥 같은 고등학교 생활이 끝나고 나는 원하지 않는 대학교의 원하지 않는 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을 맛보았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90년 살아있는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미 ‘신앙마을’의 존재감이 거의 희미해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아빠가 돌아가시자 엄마가 다시 ‘신앙마을’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도 물론 나를 데리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때 이미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맛’을 보고 있었기에 종교적 열정은 많이 식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난 다음이라 양가감정이 있는 상태로 ‘신앙마을’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말을 늘 따르는 착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신앙마을’에서 금지하는 삼겹살을 먹고, 남자를 사귀고 있었지만 말이다. ‘신앙마을’의 하나님도 어차피 이 세상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앙마을’이 금하는 ‘죄악’을 기꺼이 저지르면서도 교회를 다시 나가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세상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도 성령의 이슬만큼이나 달콤했다. 그리고 ‘신앙마을’이 금지하는 삼겹살은 고소했고 복숭아는 너무도 향기로웠다. 그러나 내 무의식 세계에 잠재한 그 ‘죄의식’은 영원히 남아 나를 괴롭혔다. 세상을 즐기려고 할수록 죄의식은 점점 더 그만큼 무거워졌다. 내 인생이 계속 꼬이기 시작한 것도 결국 그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대학교에서 ‘노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나를 예뻐해 주는 남자를 거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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