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이 닿을 때까지만 좋았다.
2학년이 되자 놀기만 하던 삶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간호학과에 들어가도록 강요한 엄마의 소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를 만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남자가 좋았다. 무엇보다 나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는 그들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고, 내가 좋아하는 곳에 함께 가고, 무엇보다 내가 부탁하는 일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엄마의 압박이 심해질수록 남자들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욕망이 더욱 커졌다. 엄마의 강요로 다시 나가기 시작한 ‘신앙마을’의 교리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남자는 일단 나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비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철저히 배려하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관계가 조금 깊어지면 나의 내면에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엄마와 함께 초등학교 시절부터 다닌 ‘신앙마을’의 철저한 금욕주의적 교리가 어느 사이 내 머리, 아니 잠재의식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꿈이었다.
2학년 1학기 초여름 무렵에 그 꿈을 꾸었다. 키가 거의 나만 한 남자였다. 그리고 안경을 쓰고 마른 체형의 남자가 나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내 남편이다. 그는 철학자였다. 아니 철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것은 내 운명의 남자가 그렇게 생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훗날 나는 꿈속에 본 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그 결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과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만난 그 어떤 남자도 내 꿈에 나타난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내게 잘해 주어도 내 맘을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받는 것을 즐기기만 하였다. 그러고는 손끝이 닿기까지의 그 감미로운 감각을 즐기는 데 몰두하였다. 특히 이 무렵 맛을 들인 것은 클럽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록 음악에 몸을 맡기고 마구 흔들어 대다가 블루스가 나오면 남자 친구의 품에 안겼다. 그 ‘남자 냄새’가 무척 좋았다. 주일에 ‘신앙마을’에 가서 기도하고 봉사하면서 그 죄를 씻고 다시 주중에는 남자들과 만나는 ‘이중생활’을 계속했다. 사실 이때 ‘살아있는 하나님’, 곧 교주가 죽고 난 다음이라 종교적 열정은 전과 같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원하는 것을 거부할 의지도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내 주변의 다른 대학교 남자도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남자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해도 늘 나의 주변에서 나를 기다려 주고 다시 다가오는 것은 준석이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식 때와 마찬가지로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모든 궂은일을 챙겨주는 것도 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 건강을 챙겨주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한의학과 3학년이었지만 이미 온갖 보약을 제조하여 내게 먹였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마다 내게 걸쭉한 부사 사투리로 결혼 이야기를 하였다.
“현주야. 내 아를 낳아도.”
그러면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나는 철학자와 결혼할 거야. 너는 한의사자너.”
그러면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나를 어디론가 강제로 끌고 갔다. 그의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의대생이던 동찬 선배의 어머니와 닮았다.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머니가 다짜고짜 말했다.
“그런데 생일이 언제가?”
동찬 선배의 어머니와 똑같은 말이었다. 부산 사람은 생일이 중요한가?
“3월 14일 저녁 6시입니다.”
한 달 후 다시 서울에 올라온 준석이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우리 두 사람이 갔다. 그 자리에 나온 준석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우리 준석이가 니칸 결혼하믄 죽는단다. 헤어지거라.”
간단명료했다.
“어머니 저도 준석이랑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나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준석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며칠 후 화요일 학생회관에 있는 증산도 학생회 방에 가보니 준석이가 있었다. 준석이는 학생회 회장으로 신입 회원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 준석이가 말했다.
“밥 묵었나?”
그가 내게 할 말 없으면 늘 하는 소리였다. 우리는 즐겨 가는 학교 앞 식당에 가서 예의 삼겹살 구이를 시켜 밥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늘 하던 대로 그의 자취방으로 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다짜고짜로 말했다.
“니 내캉 결혼하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방바닥에 나를 눕히고 치마를 걷어 올려 스타킹을 벗기려고 하였다.
“뭐 하는 거니?”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스타킹을 강하게 벗겨 내렸다. 그러나 서투른 그의 손길은 스타킹을 찢으려고만 할 뿐 내가 무릎을 굽히고 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그가 내 팬티도 벗겼다. 그러고 나서 내 다리를 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스타킹이 무릎에 걸린 상태라서 그의 뜻대로 되지 못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그가 바지를 벗었다. 이미 발기가 된 그가 삽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리를 꼰 상태에서 그가 내 안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 몸 위에서 몸부림치는 그가 갑자기 짜증이 났다. 그래서 무릎을 들어 그의 사타구니를 찼다. 왜소한 그의 몸이 쉽게 내 몸 위에서 왼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헐떡이며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올이 다 나간 스타킹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그의 자취방을 나왔다. 그는 내게 매우 친절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다 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는 내 사람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나도 다른 남자를 또 만났다. 남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 남자가 왔다가 가면 다른 남자가 또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때는 두세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나는 양다리든 세 다리든 상관이 없었다. 그냥 남자를 만나 먹고 노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다만 그 남자들 가운데 누구도 내 남편이 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안심하고 만나고 즐길 수 있었다. 순결을 지킨다면 아무리 많은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순결에 집착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내가 낳을 아이에게 더러운 엄마가 될 수는 없다는 마음뿐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모순적일 수 있지만 내게는 매우 합리적인 가치 태도였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종강을 얼마 앞둔 때 준석이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래. 이제 고마하자. 지쳤다 아이가.”
이상하게 아쉽거나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그는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일 뿐이었다. 한 번 마음이 식으니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멀어졌다. 그 후 나의 결혼을 앞두고 그가 만나자고 해서 다시 한번 만났다. 그때 그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물었다.
“행복하나?”
“그럴 거야.”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