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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24. 2024

6. 대학교의 남자들 I

내게 해방은 없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자존감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부유하고 자상한 아빠, 아름답고 지혜로운 엄마, 건전한 종교, 그리고 뛰어난 성적과 학력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 네 가지가 다 없었다. 그러나 내게 남은 희망이 있었다. 바로 남자였다.      


신입생이 되어 거니는 캠퍼스는 별세계였다. 아직 꽃이 제대로 피지는 않았지만, 학생들 자체가 꽃이었다. 강의는 따분했다. 이런 거나 들으러 그 고생을 하고 입학한 것은 아니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지만, 그것도 따분했다. 환영회가 끝나고 나서 강의동 앞에서 여러 동호회에서 회원 모집을 하고 있었다. 사람 많이 모이는 데 가지 말고 남자 만나지 말라는 엄마 말을 가슴 깊이 새긴 나는 집에 갈 생각으로 부지런히 교문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개나리와 진달래꽃이 막 피어난 것을 보면서 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모르는 남자였다.    

  

“ 현주 씨. 도를 알아요?”  

   

뭔 뜬금인가?   

  

“네? 누구시죠?” 

    

“저는 증산도 학생회 회장 채준석입니다. 우리 회에 가입해 봐요. 진리를 알게 될 거예요.”  

   

크지 않은 키에 안경을 쓴 체격이 작은 남자였다. 내 키가 170cm라서 웬만한 남자가 다 작아 보였지만 그는 유난히 왜소했다.  

    

“집에 가서 엄마 도와야 해요. 다음에 뵐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걸음을 더 서둘렀다. 사실 그날 교회 합창 연습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었다.   

   

다음 날 오전 심리학 교양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강의실 문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또 뵙네요. 심리학 재미있나 봐요.”   

 

“네?”     


“인간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심리학보다는 진리를 알아야 해요. 우리 증산도회에 가입해요.”     


내 인생에서 내게 말을 걸어온 첫 남자치고는 매력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어느 사이 증산도 학생회 모임 방에 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그의 자취방에도 자주 갔다. 그는 한의학과 2학년 생이었다. 부산 출신이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비밀이었다. 

    

이후 그는 강의실 앞에서 늘 나를 기다렸다. 그리고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는 몸집만큼이나 손이 작았다. 그리고 따스했다. 그가 내 손을 이끌고 간 첫 음식점은 삼겹살집이었다. 평생 처음 고기 맛을 보았다. 더구나 신앙마을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돼지고기였다. 그런데 그가 구워서 알맞은 크기로 썰어 내 입에 넣어준 삼겹살의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맛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종교적 교리를 어긴다는 죄의식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입안을 가득 채우는 그 고소함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먹었다. 아마 3인분을 앉은자리에서 해치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놀랐다. 그런데 놀라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나의 주식은 삼겹살이었다. 신앙마을에서 남자와는 말도 섞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어느 사이 나는 그 남자와 CC가 되어 있었고 엄마도 알게 되었다. 내가 철저히 안 된다고 했지만, 그가 무작정 나를 따라와서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엄마를 보더니 넙죽 절하고 말했다.     


“장모님. 현주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전혀 놀라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렇게 그와의 관계가 깊어졌다. 남자를 만나는 것을 철저히 금하는 신앙마을 신자이면서 나는 남자를 만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남자가 좋았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제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내 인생에서 만난 여러 남자 가운데 첫 번째였기에 추억에 더 깊이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러나 나의 마음 저 깊은 속에 있는 죄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방학이 되자 의대에서 농촌 봉사 활동을 간호학과와 같이하는 행사가 있었다. 4박 5일 동안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깡촌에 가서 봉사하는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엄마가 허락했다. 난생처음 남녀가 함께하는 행사에 참석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 봉사 활동에 참여한 의대생 가운데 김동찬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본과 1학년으로 나보다 나이가 3살 많았다. 그가 자꾸 나를 유심히 보는 시선을 느꼈다. 봉사 활동이 마무리되어 쫑파티를 하는 자리였다. 찌개와 밥 그리고 맥주와 소주가 오가는 소박한 파티였다. 김동찬 선배가 내게 다가오더니 맥주를 권했다. 신앙마을에서 가장 금지하는 것이 술이었다. 그런데 내 손이 저절로 나가 잔을 받아 바로 비웠다. 날이 무척 더운 8월 저녁이었다. 바람도 불지 않아 짜증이 나 있었다. 나는 더위를 참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그런데 그 맥주의 시원함이 나의 마음에 행복이 밀려오게 했다.    

 

“너 이름이 현주지? 간호학과의 퀸이라며? 나는 김동찬이야.”   

  

“네? 무슨...”     


“다 알자너. 이번 활동 어땠어?”     


그렇게 그가 내게 다가왔다. 준석이와는 달리 키가 크고 준수한 얼굴이었다. 팔과 가슴의 근육이 그리스 조각처럼 아름답게 발달해 있었다. 목소리도 남자다운 저음이었다. 그가 내미는 잔을 마다하지 않고 계속 마셨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왠지 싫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저물어 가는 8월의 어느 날 밤이 지금 기억에도 좋게 남아 있다. 그 찐득한 습한 여름 공기가 맥주만큼이나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맥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죄의식이 큰 만큼 맥주는 더 맛이 났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준석이와 서먹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준석이가 너무 집요하게 나에게 집착했다. 나는 남자를 좋아했지만, 너무 깊은 관계에 이르는 것이 싫었다. 내게 드리운 신앙마을의 신앙의 그림자가 너무 큰 탓이었다. 그가 자꾸 결혼을 이야기할 때마다 거부감이 더 커졌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말다툼을 벌였다. 그래서 한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동찬 선배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동찬 선배는 준석이와 전혀 달랐다. 서울 출신으로 문자 그대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매우 선하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와 대화하는 것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아니 대화가 아니라 그가 거의 혼자 말하고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그리고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도 준석이처럼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리고 엄마를 보자마자 넙죽 절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어머니 현주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엄마는 대답도 안 하고 또 웃기만 했다. 엄마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동찬 선배도 내게 음식을 사주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삼겹살이 아니라 양식집에서 비프스테이크를 먹었다. 사실 나는 대학교에 입학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의 명령으로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터라서 양식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앙마을에서 금지하는 것을 맛보고 즐길 수는 없었다. 그 금기를 준석이가 삼겹살로 깨 주었고 동찬 선배는 우아한 양식집에서 남자와 둘이 비프스테이크를 써는 방식으로 확인 사살을 해주었다. 나는 소고기가 비싼 음식이고 그토록 우아한 맛이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열심히 요리해 주던 채소와 해산물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동찬 선배는 2학기가 끝나갈 무렵 늦가을에 압구정동의 자기 집에 나를 데려갔다. 매우 우아하게 생긴 분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적당히 섞인 말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현주구나. 말 많이 들었다. 이쁘네. 동찬이가 좋아할 만하구나.”    

 

“아녜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생일이 언제가?”    


“3월 14일입니다.”     


“시는?”     


“네?”     


“태어난 시간. 궁합 좀 봐야겠다.”    

 

“저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6시쯤.”     


“알았다. 놀다 가라.”     


동찬 선배의 방에 들어갔다. 한강 바로 옆이라 강이 보일 줄 알았는데 안 보였다. 내가 살던 도곡동과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 이후 우리는 주로 강남에서 만났다. 그런데 만난 지 두어 달쯤 된 늦가을 무렵 동찬 선배 어머니가 날 보자고 하셨다.    

 

“거기 앉거라.”     


“네 어머니.”    

 

“내가 여기저기 물어보았는데 우리 동찬이랑 니랑 잘 안 맞는다. 그저 친구로 지내고 말그라. 관성이 복잡단다.”     


“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눈치 못 챌 나이는 아니었던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후에도 동찬 선배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사이 다시 연락이 온 준석이와도 화해하고 만났다. 말하자면 양다리였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어차피 결혼할 생각이 없고, ‘마지막 선’을 넘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1학년 때 만난 남자는 이렇게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남성 편력’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여정은 무한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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