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Apr 16. 2024
8. 엄마가 나를 영원히 떠났다.
모녀의 애증 관계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보어만 4형으로 진행성 위암입니다. 앞으로 6개월 남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3기 위암이었다. 엄마와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왔다. 강남세브란스 병원에서 우리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4월 하순의 하늘은 맑았다. 신록은 벌써 초여름처럼 우거지고 있었다. 집으로 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리고 그 후 정확히 7개월이 지난 11월 하순에 엄마가 나를 영원히 떠났다. 그런데 그 7개월은 내 인생 전체 이어진 엄마와의 질긴 인연이 힘들게 끊어지는 긴 과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다음 거실에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았다.
“어떻게 할 거야? 치료받아야지?”
“생각 좀 해보자.”
“무슨 생각? 일단 방사선 치료하고 케모세러피도...”
명색이 간호사인 내가 머리에 떠올리는 그 ‘치유 과정’의 결과는 뻔했다. 그래도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막 환갑을 지난 엄마가 내 곁을 떠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내 나이 20세에 돌아가시고, 동생은 이제 군대에 가 있고, 늘 엄마의 팔베개를 하며 꼭 붙어 자던 내게 엄마의 부재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무렵 나는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과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사귄 지 3년이 되었어도 그는 프러포즈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결혼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난한 집 장남이라서 부모와 시누이들의 입김이 세었다. 게다가 힘든 집안에서 외국 유학까지 보낸 처지라서 며느릿감을 아무나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가 매우 우유부단했다. 부모 특히 엄마와 여자 친구 사이에서 최대한 균형을 잡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나의 엄마 또한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남자가 너무 유약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나와 미래의 남편 사이에서 막연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던 차에 엄마의 암 소식이 나온 것이다.
사실 엄마는 그때까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나와 갈등이 깊어졌고, 신앙마을의 교리를 강요하여 내가 사회적으로 외톨이가 되도록 만들었지만, 엄마의 큰 딸에 대한 사랑을 모를 수는 없었다. 미래의 남편이 될 그가 내게 매우 헌신적이었고, 문자 그대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지만 엄마와의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이제 이 세상에 6개월만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소화가 약간 안 될 뿐 별 증상이 없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러나 보어만 4형 위암은 매우 드문 경우여서 설사 미리 알았다고 해도 예방할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내 의학 지식을 총동원해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친가와 외가에 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성격이 강퍅한 면은 있어도 엄마 동년배 ‘아줌마’들에 비해 유별나게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처럼 깡마르고 키가 커서 비만과도 거리가 매우 멀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에서도 특이 증상은 없었다. 암 진단을 받은 다음에도 나는 직장 생활을 계속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 진단을 받은 지 열흘쯤 지나서 엄마가 어디서 알아보았는지 병원 치료 대신 그 당시 유행하던 ‘물 따로 밥 따로’ 요법을 시작했다. 나는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방법은 간단했다. 철저한 섭생을 하여 물 섭취량을 줄이는 것이었다. 사실 말기 암을 이런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엄마가 원한 것이니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사의 진단을 받고 나서도 엄마에게는 별 증상이 안 보였다. 그저 약간 속이 쓰린 증상만 있을 뿐 병원에서 흔히 보아온 말기 암 환자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 두 달 지난 후 엄마는 갑자기 웅담주사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3천만 원을 들여서 구매했다. 엄마는 그렇게 해서 치유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여전히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보자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러나 11월이 되자 엄마의 다리가 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의학 지식으로 그것은 마지막이 왔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소금 치료를 시작하였다. 강원도 깊은 산골에 들어가서 식사를 끊고 오로지 소금만 먹는 것이었다. 그 깊은 산속에 그런 시설이 있는 것을 엄마가 어찌 알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먼 길을 언제나처럼 내 미래의 남편이 차로 모시고 갔다. 그 소금 치료를 한다는 ‘도사’는 이미 선을 넘은 엄마의 치료를 장담하였다. 그러나 열흘 정도 지나자,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손 쓸 수 없으니 모시고 가라고. 열흘 만에 엄마는 뼈와 가죽만 남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로 달려가 집 근처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사흘도 못 되어 엄마는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모셨다. 늘 그랬다, 엄마는 평생 엄마의 뜻대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가는 길까지 엄마의 의지를 관철했다.
오래된 중앙난방식 아파트는 겨울 외풍을 견디지 못했다. 뼈밖에 안 남은 엄마는 모든 옷이 헐렁했다. 그래서 엄마의 온몸에 의료용 붕대를 감았다. 다 감고 나니 마치 미라처럼 보였다. 그 겉에 다시 환자복을 입었다. 그리고 엄마와 늘 같이 눕던 온열 침대 위에 엄마를 눕혔다. 내가 직장을 포기할 수 없어서 낮에는 이모가 엄마를 돌보았다. 퇴근하고 나서 출근할 때까지 밤새 엄마를 돌보는 일이 반복되었다. 엄마의 정신은 명료했지만 이제 몸을 움직이기 힘든 단계에 이르렀다. 말소리도 힘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른 날 밤이었다. 엄마 옆에서 꾸벅 졸고 있는데 엄마가 그냥 누워서 방 천장만 바라보는 자세로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떠나면 너는 이 서방하고 잘 살겠지?”
“엄마 왜 그래?”
“네가 나를 버리고 잘 살 것 같으냐?”
“무슨 말이야 엄마?”
“네가 날 버렸어. 네가 날 버렸어.”
“도대체 왜 그래?”
“......”
기운이 전혀 없고 눈빛도 총기를 잃은 엄마에게서 그런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기보다 소름이 끼쳤다. 겨울바람으로 창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냉기가 방안을 감쌌다. 알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내 등 뒤에 모여 뭔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엄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가만히 눈을 부릅뜨고 천장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이전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다음 날 저녁에는 내 미래의 남편이 퇴근하고 바로 우리 집에 왔다. 그리고 엄마 곁에 가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주 조용하게 말을 해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그가 엄마의 입에 귀를 바짝 대고 말을 듣고 다시 엄마의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을 했다. 그러더니 그가 엄마의 붕대를 풀고 새 붕대로 온몸을 감기 시작하였다. 팔을 다 감고 나서 다리를 감기 시작하였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드러났다. 뼈가 더 앙상해 보였다. 그는 마치 종교 예식을 하듯이 천천히 붕대를 발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 감아올렸다. 나중에 기억해 보니 그것은 염습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가 어서 집으로 가기를 바라면서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붕대 감는 일을 다 마친 그가 다시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더니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내일도 또 올게요.”
그가 집으로 가기 위해 문으로 다가왔다. 내가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했어?”
“응, 어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끝에 그러시네. ‘현주를 잘 부탁하네.’ 웬일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는 그와 만나는 것을 매우 탐탁지 않게 여겨왔는데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이상하네. 엄마가 왜 그런 소리를?”
그렇게 그를 배웅하고 나서 엄마에게 다가가 보니 벌써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새벽 무렵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 빛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무심코 엄마의 코에 귀를 가져다 대었는데 숨소리가 안 들렸다.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졌다. 엄마의 앙상한 몸을 만져보았다. 전기장판의 온기로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러나 심장이 뛰지 않았다. 바로 119를 불렀다. 그리고 내 미래의 남편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모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13분이었다.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실려 간 엄마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친척들이 모이고 장례 절차가 시작되었다. 내 미래의 남편도 병원으로 왔다. 그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운명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본격적인 불행의 시작이었다. 엄마와의 30여 년에 걸친 애증관계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